아름다운 만화책이 있다. 내용과 겉포장이 잘 조화를 이룬 책이다. 책이야 내용만 좋으면 되는 것이 아니냐고 이야기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책꽂이에 빛을 발하기 위해서는 모양도 중요하다. 시인 김정환은 “내용은 머릿속에 진열은 모양 예쁜 걸로만 한다”고 자신의 신조를 밝히기도 했다. 내용을 머릿속에 집어넣지 못하는 나는 내용과 모양이 함께 조화를 이루는 책이 좋다. 그래서 고급스러운 장정에 다양한 디자인으로 무장한 프랑스나 일본 만화에 마음을 빼앗기는 건지도 모르겠다.
한때 우리나라에도 고급스러운 만화책들이 나온 적이 있었다. 50년대에 잠깐 출판되었던 서점용 만화책이나 70년대 후반에서 80년대까지 나왔던 백제, 까치의 단행본(길창덕, 박수동, 고우영, 강철수 등)은 무척이나 고급스러웠다. 그러나 조악한 지질과 그저 저가에 묶어내기 급급한 만화방 만화는 만화를 ‘책’이 아닌 다른 무엇으로 만들어갔다. 90년대 다시 서점용 만화책이 등장했고, 일본의 만화시스템을 받아들인 국내 만화출판사들이 서점에서 만화를 판매했지만 만화를 만드는 기준은 잘 만들어진 한권의 책보다는 빨리 저가에 만들어진 여러 권의 책에 있었다. 본래 책이었던 만화는 값싸게, 시간 때우기로, 빌려보는 것이 되어버렸다.
만화책은 책이다(가끔 이 당연한 진리를 망각하는 사람이 있기도 하다!). 책이라면 당연히 독자를 사로잡을 만한 내용과 겉모습이 필요하다. 그리고 서점에서 팔려야 한다. 여러 권의 만화 중 잘 만들어진 내용과 겉모습의 책이라면 수십년 동안 꾸준히 팔릴 것이다. 만화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늘어나면 좋은 만화를 발표한 작가와 출판사는 돈을 벌 것이고, 그 돈은 더 좋은 작품을 만들어내거나 새로운 작가를 발굴하는 데 쓰일 것이다. 너무나 당연한 이치며 쉬운 진리를 우리는 잊고 살았다.
넓게 펼쳐진 조선의 산하
바다출판사의 한국만화대표선과 바다어린이만화는 당연한 이치와 쉬운 진리가 척박한 한국 만화의 토양을 바꿀 수 있다는 믿음으로 시작된 프로젝트다. 그것도 한국만화출판사상 사전기획된 프로젝트로 시작되었다. 프로젝트를 제안받은 출판사는 외부인력과 함께 기획안을 완성하고, 그 계획에 따라 차근차근 작품을 출판했다. 명랑만화를 하나하나 복원해낸 뒤 시작된 한국만화대표선의 1차 프로젝트는 ‘역사만화’였다. 20대에서 40대까지 광범위한 만화세대를 묶어낼 수 있는 힘으로 중후한 이야기의 재미를 선택했다. 첫 주자 백성민의 1권짜리 <상자하자>의 뒤를 잇는 두 번째 주자는 과감하게도 10권짜리 이두호의 <객주>였다. <객주>는 <상자하자>에 비해 겉모습이 꽤나 안정감 있게 정착되었다. 하드보드 양장에 편안한 파스텔톤 이미지, 그리고 음각된 제목까지. 겉표지의 오른쪽에는 이야기를 끌고 가는 주인공 천봉삼이 그려져 있고, 왼쪽에는 중요한 인물이 바뀌어가며 은색으로 인쇄되었다.
한국만화출판사상 처음 만나는 세련된 겉모양에 어울리는 내용 또한 압권이다. 특히 1권에서 4권까지는 한번 잡으면 놓을 수 없을 정도로 독자를 사로잡는다. 하지만 5권 이후 뒷 권으로 갈수록 앞 권에 비해 현저하게 밀도가 떨어지는 뒷심 부족의 문제점도 분명하다.
-→ 섬세한 조선의 풍광, 힘있는 이야기가 어우러진 <객주>는 세밀하게 조선 말의 삶을 재현하고 있다. 고급스런 장정으로 새로 펴낸 편집도 읽는 재미를 더한다.
조선말 굳건하던 조선의 신분사회가 해체되고 상업자본이 형성되던 그 격랑의 시기를 살아나가는 조선의 남성과 여성은 전형적이면서도 개성적인 인물형으로 자리잡으며 역사만화의 총체성을 이끌어간다. 이두호 <객주>는 김주영 원작과 절묘한 균형을 유지하며 새로운 아우라를 만들어낸다. 풍부한 시각 이미지, 특히 완성된 공간의 미장센은 소설에서는 따라올 수 없는 이두호 <객주>의 아우라다. 섬세한 펜 선으로 그려낸 조선의 산하는 낯익으면서도 절묘한 시대적 감성을 내포한다. 가장 절경은 나루와 객주, 주막 등을 버드아이뷰(bird-eye view)로 바라본 장면이다. 저 멀리 야트막한 산길에서 내려오는 사람들과 길가에 벌인 난전, 나룻배와 주막까지를 세밀하게 조망한다.
김주영, 탁월한 이야기의 힘
이야기의 힘도 탁월하다. 황석영과 함께 한국의 대표 이야기꾼인 김주영의 빚어낸 이야기는 세밀하게 당대의 삶을 재현한다. 주인공 천봉삼과 그와 인연을 맺은 두 여인 조소사, 매월이의 삶은 드라마틱한 이야기의 중심축을 만들어낸다. 여기에 다양한 계급의 인물들이 등장해 이야기를 풍성하게 채워간다. 재물의 힘이 권력과 결탁하고, 권력이 재물과 결탁하는 과정에서 상처받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등장한다. 이야기는 척실로 가득한 조선왕조와 세력간의 갈등의 축을 타고 내려오기도 한다. 격정적인 연출, 과장된 효과, 욕망에 충실해 때론 멍청해 보이는 만화에 오염된 눈에는 궁상맞게 보일 수도 있지만 이두호식의 풍부함에 익숙해진다면 감동과 재미를 한꺼번에 즐기게 된다.
이두호 만화의 정점을 접할 수 있는 <객주>, 부디 이 아름다운 책이 시장에서 선전해 침체된 만화시장에 새로운 모범사례를 만들어주기 바란다. 더불어 만화의 여러 문제를 일거에 해결하는, 보고 싶은 작품들로 꽉 채워진 ‘새로운’ 잡지 창간도 함께 기원한다(바다출판사 펴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