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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 로드리고 세희의 초소형 여행기] 열정은 한없이 넘치는데 재능은 안타까울 정도로 미천할 때
글·사진 박 로드리고 세희(촬영감독) 2025-10-08

암벽 등반은 나의 아픈 손가락이다. 열정은 한없이 넘치는데 재능은 안쓰러울 정도로 미천해서 하는 소리다. 입문한 지 20년이 훌쩍 넘지만 여태 열정과 재능 사이에서 허우적거린다. 교육과정을 몇번이나 거쳤어도 정말 실력이 늘지 않는다. 직업적 제약도 한몫 거들긴 했다. 들쭉날쭉한 촬영 일정 때문에 교육에 참가한 날보다 빠진 날이 더 많으니. 카메라를 들었을 때는 다리 하나쯤 부러지는 것은 조금도 두렵지 않은 사람처럼 굴지만, 사실 나는 천성적으로 겁이 많고 엄살도 심하다.

언젠가 드라마 촬영을 하나 마쳤을 때였다. 8개월 넘게 매진한 작업을 무탈하게 마쳤으니 여행을 떠날 시간이었다. 목적지는 버킷 리스트에서 오래 묵은 한줄, 요세미티국립공원. 미국 캘리포니아의 요세미티 계곡은 세계적인 암벽등반의 성지다. 그곳에는 하늘을 찌를 듯한 화강암 거벽이 즐비한데, 900m의 수직 벽 ‘엘 캐피탄’이 특히 유명하다. 아마도 세계에서 가장 잘 알려진 암벽 이름이리라. 클라이머들은 줄여서 폼나게 ‘엘 캡’이라 부른다.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다큐멘터리상을 받은 <프리 솔로>의 전설적인 클라이머 알렉스 호놀드가 안전 장구 없이 오른 암벽도 엘 캡이다. 요세미티의 엘 캡은 내 실력으로 덤비기에는 터무니없이 어려운 곳. 하지만 너무 가보고 싶었으니, 나는 오래전부터 연을 맺어온 전용학 선배를 찾아갔다. 그는 한국 알피니즘계의 입지전적인 인물이다. 세간의 평가를 빌리자면 ‘안전한 시스템으로 원하는 등반을 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합리적인 알파인 등반 가이드’다. 가이드라고 해서 보통 여행의 가이드를 생각하면 곤란하다. 알피니즘이란 죽어도 이상할 것이 없는 곳에 가는 일이고, 결코 남이 데려다줄 수 없는 곳에 스스로 가야 하는 것이어서 알파인 가이드의 권한은 막강하다. 위험하다고 판단되면 당장 하산을 ‘명령’할 수도 있으니. 알파인 가이드는 모든 역량과 경험, 지식을 동원해 ‘무모한’ 죽음만큼은 막아낸다. 등반을 잘하지도 못하는 녀석이 잊을 만하면 나타나기가 수년째라 내 실력을 뻔히 아는 용학 선배는 어지간히도 가고 싶어 하는 내 마음을 갸륵하게 여겨 요세미티 원정대의 합류를 허락했다.

일행은 모두 8명이었다. 공원에 딸린 캠핑장의 허름한 로지를 빌려 며칠 동안 머무를 준비를 했다. 두동의 텐트를 추가로 설치했고, 곰이 있는 지역이라 모든 식량은 ‘베어 박스’라는 철제 보관함에 숨겼다. 아이스박스에는 얼음과 각종 음료를 채웠다. 공동의 일을 끝낸 나는 나무 사이에 해먹을 설치해 기분 좋게 드러누워 ‘등반 교본’을 읽었다. 한국 등반의 역사 챕터에 에베레스트를 등정한 최초의 여성 산악인 ‘최오순’이 여러 번 언급되었는데, 이번에 함께 등반에 나선 선배였다. 역사적인 인물과 함께해 영광스럽기도 했지만 여기 내가 낄 데가 맞나 싶어 마음이 쪼그라들기도 했다.

엘 캡 등반을 하루 앞둔 날까지, 나는 고민했다. 우리가 등반하려는 루트는 ‘이스트 트래버스’인데, 로프 한동의 길이에 맞춰 13번을 나눠서 올라야 했다. 새벽같이 출발하면 밤 늦게 돌아올 수 있는데, 문제는 중간에 탈출할 방법이 없는 폐쇄된 루트라는 점이었다. 한번 시작하면 끝까지 올라가야만 한다. 괜히 따라갔다가 모두를 난처하게 만들까봐 주저하고 있는데, 선배들이 부추겼다. 함께 가자고. 이분들 지난 며칠 동안 내 실력을 보고도 하는 소리겠지? 에라 모르겠다, 선배들 믿고 도전해보자! 새벽밥을 지어먹고 헤드랜턴에 의지해 어두운 산길을 헤치며 암벽 밑둥에 이르렀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인간이 붙들 수 있는 모든 것을 붙들며 기어오르기 시작. 바위가 갈라진 작은 틈에 손을 집어넣어 고정시켜 몸을 끌어올리고, 손가락 한 마디 남짓한 돌기에 발끝을 겨우 디뎌 몸을 일으키고, 크게 난 틈에는 온몸을 집어넣어 등과 발을 서로 반대 방향으로 밀며 애벌레처럼 조금씩 기어 올라가고. 얼마 안되는 등반 지식을 총동원하고 동물적 본능까지 더해서 올랐다. 마치 유인원이 된 기분으로. 등반은 앞서가는 사람이 훨씬 위험하고 고도의 기술을 요한다. 뒤따르는 사람은 선등자가 설치해놓은 안전 로프에 마음을 기대며 오른다. 때때로 도저히 통과할 수 없는 구간에 이르면 후등자는 ‘텐션!’이라고 외친다. 그러면 앞선 사람이 로프를 힘껏 당겨 팽팽하게 고정해준다. 그래도 결국 올라가기는 본인의 능력으로 올라가야 한다. 뒷사람이 자꾸 텐션을 외치면 앞사람은 불필요하게 체력을 소진하게 되겠지. 그도 갈 길이 구만리인데. 내 앞에 가는 성격 좋은 동걸이 형의 말 못하는 난감한 마음이 쌓여 줄 끝에 전해졌다. 더 이상 폐를 끼칠 수 없다는 생각이 들자 초인적인 힘과 기술이 뿜어져나왔다. 마치 다른 사람으로 빙의된 것처럼. 어떻게 올랐는지 모르게 기억은 새하얗기만 하다. 중력을 거슬러 직벽을 오르는 이 기술을 인류는 어떻게 축적한 것일까? 내가 오르고 있긴 하지만 이 절벽을 오르려는 욕망을 품은 인류가 그저 놀랍기만 하다.

등반을 위해 각자 챙긴 물은 1.5리터씩이었다. 하루를 버티려면 아껴 마셔야 했다. 혹여 물이 맛있어서 홀짝홀짝 다 마셔버릴까봐 얼음은 넣지도 않았다. 밍밍한 물을 딱 한 모금씩 끊어서 마셨는데도 물이 모자랐다. 남은 물이 부족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힘들 때면 바위에 매달려 한숨 한번 쉬고, 물 한 모금을 마셔야만 했다. 그날따라 늦더위가 기승을 부려 다들 탈진에 가까운 상태였다. 역시나 등반은 극한의 위급 상황을 스스로 만나러 가는 일. 바위 어딘가에 한줌의 물이 고여 있다면 주저하지 않고 빨아먹었을 텐데 그마저도 없이 엘 캡은 말라붙어 있었다. 그렇게 고투 끝에 정상에 닿았고, 마지막 남은 누군가의 물 한병을 일행 모두가 조금씩 나눠 마신 후 하산을 시작했다. 해가 져서 더위가 가셨기에 망정이었다. 다들 지쳐 있었지만 하나같이 걸음을 재촉했다. 숙소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 시원한 맥주와 샤워를 생각하며. 목이 너무 말랐고 몸은 천근만근이었어도 마음은 가벼웠던 하산길의 기억이 생생하다.

엘 캡을 다녀온 것을 생각하면 여전히 얼떨떨하다. 선배들의 희생과 배려 덕분에 터무니없는 실력으로 다녀온 것을 잘 안다. 좁은 지면 탓에 세세한 상황을 옮기진 못했지만 존경해 마지않는 알파인 가이드 전용학 선배를 위시해 목마른 나에게 늘 물을 나누어준 정희, 남신, 오순, 서원, 동걸, 수경 선배에게 감사한 마음을 전한다. 다음에 엘 캡을 다시 가게 된다면 나도 선등을 해보고, 목마른 후배에게 물을 나누어주고 싶다. 요세미티는 나의 버킷 리스트에서 아직 지워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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