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신설되어 올해로 4년차를 맞은 액터스 하우스가 9월18일과 19일 네명의 배우에게 집 열쇠를 건넸다. 각자 한 시간 동안 집의 주인이 된 배우 김유정, 손예진, 니노미야 가즈나리, 이병헌은 저마다의 방식으로 손님들을 맞이했다. 무대인사나 관객과의 대화 같은 행사와 달리 액터스 하우스는 오직 한명의 배우에게만 집중해 그의 삶과 필모그래피를 깊이 있게 조명한다는 점에서 배우와 관객 모두에게 특별하고 친밀한 시간을 선사했다. 객석을 가득 메운 이들은 스타의 팬, 영화의 관객이자 한 사람의 인생에 호기심을 품은 또 다른 인간으로서 네 배우의 우주를 여행했다.
니노미야 가즈나리
9월19일 오후 4시30분. 영화 <8번 출구>로 부산을 찾은 배우 니노미야 가즈나리의 액터스 하우스는 한일 양국 팬들의 열기로 가득 찼다. ‘아이돌 아라시의 니노’와 ‘배우 니노’를 모두 사랑하는 이들이 한데 모인 이 집은 그 체온이 모여 온돌방을 데운 듯 따스했다. 올해 칸영화제 미드나이트 스크리닝부터 부산영화제 미드나잇 패션까지 그해 최고의 장르영화 성지에 모두 진출한 신작에 대해 배우는 “제가 세계로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제 작품을 세계로 보내는 일이 오랜 꿈이었다”라며 공을 관객들에게 돌렸다. 니노미야는 자신의 연기 철학을 전달하는 데 창의적이고 맛깔나는 비유를 사용하며 언어적 틈새를 좁혀나갔다. 다른 회차와 달리 동시통역이 필요했기에 한 시간이라는 시간은 그 어느 때보다 빠듯했고 질문의 기회는 단 한명의 관객에게만 돌아갈 수 있었다. 배우가 직접 지목한 그날의 유일한 질문자는 운명처럼 “중학생 때부터 아라시의 팬이었으며, 니노미야를 롤 모델 삼아 한일 양국에서 활동하는 배우를 꿈꾸는” 이였다. 조금이라도 더 시간을 벌어 연기에 대한 조언을 이어 나간 그가 겨우 답변을 마쳤을 때, 객석에서는 뜨거운 환호가 쏟아졌다.
김유정
9월18일 오후 2시. 25살의 배우 김유정이 액터스 하우스의 역대 최연소 주인이 되었다는 사실은 단순히 생물학적 나이만으로 설명되지 않는다. 5살에 광고모델로 데뷔한 후 아역배우로서 영화 <추격자>(2008), 드라마 <해를 품은 달>(2012) 등 굵직한 작품들을 이끌어왔다. 그는 성인이 된 이후의 필모그래피를 “밝고 희망찬” 작품들이었다고 말했다. 그러나 올해 부산영화제에서 처음 공개된 신작 드라마 <친애하는 X>에서 김유정은 성인이 된 후 처음으로 한 인간의 어두운 면을 극적으로 파고드는 캐릭터를 맡았다. “인간이 가질 수 있는 가장 극한의 욕망과 최대치의 절제를 동시에 가졌으며, 많은 사람과 부딪히며 스릴러적인 인간관계를 만들어가는” 소시오패스를 연기하게 된 그는 이 캐릭터를 제 옷처럼 입게 해준 이응복 감독을 “인생에 가장 큰 영향을 준 분”으로 꼽으며 연출자와 연기자를 넘어선 신뢰 관계를 고백했다. 질문 기회를 얻은 관객들은 이구동성으로 “어린 시절부터 팬이었다”고 말했지만 그들 역시 김유정과 비슷한 시기를 지나고 있는 또래들이었다. 관객이 배우에게 보내는 존경과 지지는 이미 나이를 초월한 어떠한 것이었다.
손예진
9월18일 오후 5시30분. 개막작 <어쩔수가없다>의 주역으로 액터스 하우스를 찾은 배우 손예진은 1999년 데뷔 이래 한국영화와 드라마에 수많은 흥행작을 남겨왔다. 그런 그에게도 여전히 ‘첫 경험’은 계속되고 있다. 올해 신작으로 베니스는 물론 국제영화제 자체를 처음 경험했다는 그의 이야기는 완숙한 배우에게도 얼마나 많은 ‘처음’이 남아 있는지를 보여주었다. 반면 20대 때부터 수없이 찾아온 부산영화제의 의미를 그는 “우리가 주인이 되어 손님들을 맞이하는 경험”이라 표현하며 애정을 드러냈다. 20대 때 한 인터뷰에서 “알면 알수록 더 모르겠는 배우가 되고 싶다”고 말했던 신인배우의 당찬 포부는 스스로에 대한 예언이 되었다. 섹스 코미디 <작업의 정석>(2005)부터 미스터리 스릴러물 <비밀은 없다>(2015)에 이르기까지 21세기 한국영화를 대표하는 여성 캐릭터를 탄생시키면서다. 질문을 바라는 수많은 팬들의 눈빛을 차마 외면할 수 없었던 그는 못다 한 질문을 자신의 인스타그램 계정에 남겨달라고 요청했다. 공식 일정이 끝난 지금까지도 손예진은 팬들의 질문에 하나하나 답변을 달며 자신만의 ‘온라인 액터스 하우스’를 이어 나가고 있다.
이병헌
9월19일 오후 7시. 개막식 사회부터 개막작 주연까지, 단연 올해 부산영화제의 ‘프런트맨’으로 활약한 배우 이병헌에게 데뷔 34주년을 맞은 2025년의 키워드는 ‘글로벌’이었다. 넷플릭스 시리즈 <오징어 게임>과 <케이팝 데몬 헌터스>의 세계적인 흥행, 애니메이션 <킹 오브 킹스>의 미국 박스오피스 정상, 그리고 <어쩔수가없다>의 베니스국제영화제 경쟁부문 진출까지. 2009년 <지.아이.조: 전쟁의 서막>으로 할리우드에 진출한 이래 언어와 문화의 장벽을 넘어 온전히 이중언어를 구사하는 배우로 진화해온 그이기에 올해의 성과는 결코 운이나 우연으로 설명되지 않는다. 박찬욱 감독을 만나기 전까지 영화계에서 “망한 배우”라 불렸다는 신인 시절의 기억부터, 카메라 앞이 아닌 무대 위에서는 여전히 크게 긴장하고 실수하기도 한다는 고백까지. 그는 스크린 속 ‘완벽함’ 이전에 존재하는 한 인간의 ‘부족함’을 숨기지 않았다. 이 모든 고백을 뒷받침하는 에피소드 하나하나의 모든 요소를 정확하게 기억해내는 그는 그 자체로 뛰어난 스토리텔러였다. 출중한 연기력과 의심의 여지없는 필모그래피를 자랑하는 배우의 ‘액터스 하우스’는 이내 거장의 ‘액터스 클래스’로 변모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