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그루의 은행나무와 세 사람. 각기 다른 시점에 독일의 한 대학 캠퍼스에 뿌리내린 존재들은 말없이 긴밀해진다. 개념미술작가이기도 한 일디코 에네디는 영화감독으로서의 긴 공백 끝에 <우리는 같은 꿈을 꾼다>(2017), <내 아내 이야기>(2021)를 추수한 뒤 신작 <사일런트 프렌드>에 이 식물적 상상력을 심었다. 그가 기른 정원이 베니스, 토론토를 거쳐 부산에서 한국 관객을 맞이했다.
- 한국에는 식물을 키우며 삶의 의미를 찾는 사람들을 일컫는 ‘식집사’라는 말이 있다. 이 영화 속 인물들에게도 그런 면모가 엿보인다.
도시에서 자라 자연을 잘 아는 편은 아니지만, 내가 청소년이던 1970년대는 히피문화가 범람하던 시기다. 히피들은 모든 생명을 향한 열린 태도를 강조했고, 과학계에서는 식물의 의사소통을 연구하는 물결이 일었다. 그때 오려둔 신문 기사를 아직도 갖고 있다. 내 관심을 끈 건 식물보다는 식물을 비롯한 다른 생명체들의 숨겨진 삶이었다. 이 영화는 그 모든 것을 다 인식할 수는 없다는 겸허한 자세를 지니고 있다.
- 배우 양조위가 팬데믹 초입에 독일 대학에 부임한 교수 토니로 분했다. 그와 협업한 배경은.
처음부터 그를 염두에 두고 시나리오를 썼다. 그가 출연 제의를 거절한다면 줄거리를 다시 쓸 각오도 하고 있었지만, 다행히 줌 미팅으로 처음 인사를 건네자마자 그가 말했다. “일디코, 난 이 영화를 하고 싶어요!” 그러자 모든 긴장감이 사라졌고, 우리는 그가 맡을 역할보다는 이 영화의 철학에 관해 긴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 2020년의 교수 외에도 1972년의 남학생, 1908년의 여학생이 식물을 향한 호기심을 키운다. 이들이 그리는 반복과 차이를 조형하고자 기울인 노력이 있다면.
서사적 연결은 원하지 않았다. 연결되는 것은 오직 나무와 정원이다. 단 세 사람은 각자의 방식으로 식물 실험을 하는데, 괴테가 200년도 더 전에 쓴 연구서 <식물변형론>을 영화에 등장시킨 건 우연이 아니다. 제2차 세계대전 말까지만 해도 과학자가 신적 존재처럼 실험 외부에 있어야 한다는 뉴턴의 관점이 지배적이었다. 그러나 괴테는 과학자의 존재도 실험의 일부라는 점을 고려해야 한다고 말했다. 괴테의 주장은 오늘날 자연과학 실험의 중요한 전제가 되었고, 이 영화도 그 점을 신경 썼다.
- 흑백필름부터 디지털 이미지까지 다양한 시각적 접근이 필요했던 까닭은.
이 영화는 인간의 지각(知覺)과 그 한계를 다룬다. 인간의 감각으로는 도저히 느낄 수 없는 것을 어떻게든 느껴보려는 시도를 보여주는 동시에 그 감각이 얼마나 사회적으로 구성된 개념인지도 보여주고 싶었다. 세 인물은 같은 장소, 같은 정원에 있지만 100년 사이에 이 공간은 전혀 다르게 인식된다. 35mm 흑백필름으로는 생명력이 느껴지는 정밀한 디테일을, 16mm 필름으로는 인상파 회화 같은 감성을, 디지털 촬영으로는 선명함을 표현하려 했다.
- 식물이 움틀 때 나는 효과음은 어떻게 구현했나. 영화에 가사가 있는 노래는 딱 한번 흐르는데, 그 선택에 대해서도 들려준다면.
<내 아내 이야기>에도 참여한 독일인 사운드디자이너, 이번에 처음 만난 프랑스 음향효과팀이 함께 작업했다. 인간의 귀에 들리지 않는 소리를 만들어내야 했는데, 그들이 장면에 깃든 느낌을 살려 영화 전체 분위기에 맞게 소리를 창조해냈다. 노래는 토니처럼 폐쇄적인 인물이 자기 내면을 시험해보고 싶을 때 들을 만한 곡으로 골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