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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한국영화: 경쟁 - 안간힘과 받아들임, <다른 이름으로> 이제한 감독
김소미 사진 최성열 2025-10-03

<다른 이름으로>에는 시한부판정을 받고도 영화를 찍으려는 남자 제현(문인환)과, 돌이킬 수 없는 상실에 대처하는 방식으로 영화를 찍으려는 여자 수진(정회린)이 나온다. 이제한 감독은 실제로 남자를 쓰며 자신을, 여자를 그리며 아내를 생각했다고 한다. “죽어가는데 영화를 찍겠다는 남자나, 죽은 남편을 잊지 못해 영화에 담겠다는 여자나 미련하기는 매한가지나 그 둘의 안간힘은 슬프다.” 우리는 이 영화에서 같은 배우가 사람과 유령을 오가며 세 가지의 다른 존재로 변신하는 것을 지켜보게 되는데, 그들 주위의 모두가 ‘영화 만들기’라는 행위에 너무도 절박했다가 어느덧 순순히 홀연해진다. 기억하는 것이 아니라 잊으라는 주문에 가까운 이제한의 신작을 보고 나면 애달프지만 맑은 여운도 찾아온다. 이에 감독은 담담히 덧붙였다. “기억도 기록도 영화도 어느 순간 없어진다고 생각하면 마음이 편하다. 없어진다니, 괜한 욕심도 사라지는 기분이 든다.”

- 같은 인물들이 나오지만 인과관계상 온전히 연결된다고 보기 어려운 두 이야기가 붙어 있다. 구태여 논리를 찾자면 제현이 죽은 뒤의 이야기인 2부의 현실이 있고, 1부는 그가 그토록 만들길 원했던 영화를 구현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죽은 사람이 남겨둔 시나리오가 영화에서 어떤 역할을 하길 바랐나.

두 번째 이야기를 쓰기 전까지는 첫 번째 이야기가 어떤 역할을 할지 몰랐다. 첫 번째 이야기의 중간 정도를 쓰다, 갑자기 남자가 암 덩어리를 토하는 장면이 떠올랐다. 황당했는데 동시에 웃겼다. 죽다 살아난다. 그게 마음에 들었다. 그러고 나서 두 번째 이야기를 쓰는데 앞의 이야기가 달리 보였다. 제현이 죽은 건 아닐까 하는 예감이 들었고, 1부가 어쩌면 제현의 시나리오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고 나니 2부의 수진은 사별자가 되어버렸다. 그 설정을 수렴하기로 하고 2부를 썼다. 2부를 쓰다 잠시 1부를 돌아보니 그것이 죽어가는 제현의 소망이자 그가 생전에 남긴 시나리오처럼 보였고, 수진이 마침내 찍어내려 하는 영화처럼 보이기도 했다.

- 1부는 2부에 비해 상황, 연기, 리듬 면에서 전반적으로 과장된 톤을 보인다. 붓글씨체의 타이포그래피 디자인부터 꽤나 의외로 다가온다. 두개의 이야기를 구별하는 형식적, 시각적 측면의 구상 과정을 들려준다면.

처음에 프로듀서에게 단편을 쓰겠다고 했다. 돈은 없는데 영화는 찍고 싶어서였다. 그래서 이야기 하나를 썼는데 하나를 더 써야 할 것 같았고, 분량 조절에 실패해 결국 장편이 되었다. 프로듀서는 화를 냈지만 읽고 나선 찍어보자고 했다. 이야기는 두개였지만 그 이야기에 몇몇 연결점들이 있어서 하나처럼 보이기도 하고, 두개처럼 보이기도 하는 게 재밌다고 생각했다. 두 덩어리가 구별되면 이 효과가 좀더 살아나겠다 싶어서 타이포그래피도 차이를 두었다. 첫 이야기의 타이포그래피는 결연한 글씨체를 넣었다. 그게 제현의 태도와 닮아 보였다. 죽음을 다루긴 해도 나는 이 영화가 코미디라고 생각했고 그래서 과장이 필요했다.

- 촬영에 소요된 총기간, 시나리오 순서와 실제 촬영간 배열은 어떠했나.

돈이 없었다. 일주일 안에 5회차가 가능한 최대치였다. 그래서 되도록 시나리오 순서대로 찍되, 회차를 줄이기 위해 장소별로 묶어서 찍었다. 원래는 시나리오 순으로 찍는 것을 선호하지만 그 정도는 참아야 했다. 일주일 안에 중간에 하루를 쉬면서 5회차를 끝내기로 계획했다가 묘하게 배우들과 스태프들의 일정이 맞지 않아서 2부를 여름에 먼저, 그리고 1부를 가을에 따로따로 찍었다. 그게 영화의 변수가 되지는 않았고 오히려 두 이야기에 서로 다른 계절을 담을 수 있어 좋았다.

- 문인환, 정회린, 황미영 배우를 영화 속 역할로 초대하기까지 그들에게서 어떤 면모를 보았나.

인환씨는 고집이 세지만 생각이 깊고 순수하다. 미영씨는 강해 보이지만 실은 다정하고 의리가 있다. 회린씨는 날카롭지만 속은 여리고 아이 같은 매력이 있다. 이것이 내가 가진 세 배우에 대한 인상이었다. 거기엔 내가 상상한 인물들과 닿아 있는 부분이 있었고 어느 정도의 예외성 또한 존재했다. 그게 좋았다. 이야기가 꽉 차는 느낌이 들었다.

- 캐스팅 후 리딩 과정도 오래 거쳤나.

시나리오에 사실상 거의 대사밖에 없기 때문에 리딩을 많이 하는 걸 선호한다. 이번에는 3번정도 한 것 같다. 리딩은 내가 먼저 상상한 대사의 톤을 전하고, 그다음에 배우들의 톤을 들어보고 적당한 중간지점을 찾는 식으로 진행된다. 내 욕심은 버리고 배우들의 해석을 많이 반영하려고 노력하는데, 글쓴이의 유치한 고집은 내려놓기 어렵다. 그 욕심을 알아서 그런지 배우들이 내 의견을 많이 따라주는 편이고 그걸 감사히 여긴다. 배우들과 대사에 대해 주로 이야기를 나누는 과정을 지나다보면 인물을 통해 자연스레 어떤 의미가 생기는 것 역시 보게 된다. 그걸 잘 기억해두었다가 실제 촬영 단계에서도 적용해보려 애쓴다. 하지만 가끔은 그냥 잊기도 하는데 어떨 땐 내가 설계한 의미란 게 그다지 의미가 없기도 해서다.

- 유령이 되어 나타난 제현이 외로움을 토로하는 수진에게 이제는 집을 떠나라고 말할 때처럼 순간의 생생함으로 잊기 힘든 장면이 있다. 앞서 <다른 이름으로>를 감싸는 형식에 대해 이야기했다면 그 안에 알알이 맺힌 순수한 감정이 형식과 어떻게 관계맺고 있다고 보나.

유령이 되어 나타난 제현과 수진의 대화 장면은 나도 무척 좋아한다. 이미 한번 죽어봤기 때문인지 제현은 살아선 하기 힘든 말들을 수진에게 거침없이 건넨다. 하지만 그 말들은 여전히 아내를 위하는 마음에서 나온 것들이라 사랑이 담겨 있다. 슬픈 것은, 그 장면에서의 제현은 이미 죽어버린 유령에 불과하다는 사실일 것이다. 영화의 형식은 우리에게 어떤 관점을 제시해준다. 특히 내가 재밌어하는 경우는 형식이 잘 작동해서 지금까지 봐왔던 무엇이 어떤 유의미한 변화를 가지게 될 때이다. 관점이 바뀌면 다른 것들이 보이는데, 나는 그렇게 뭔가가 달리 보였을 때 어떤 감정이 일어나기를 바라며 형식을 조정하는 것 같다. 왜인지는 모르겠으나 나한텐 그것이 아름답다고 느껴진다.

- 영화를 찍고자 하는 주체가 제현에게서 수진으로 이행한다. 신묘한 것은 두 사람 다 자신이 예상하지 못했던 순간과 형태로, 그러니까 ‘다른 이름으로’ 뜻밖의 회복을 경험한다는 점 같다. 몸에 독이 되는 선택을 하던 제현에게서 암 덩어리가 튀어나오기도 하고 부도덕한 인물과의 조우가 수진 스스로 용기를 내게 만든다.

시나리오를 쓰면서 이 영화가 코미디였으면 했다. 그리고 이 코미디가 동시에 슬플 수도 있을 거라 기대했다. 암 덩이를 토하고 살아났다고 기뻐하는 제현이나, 양아치 같은 배우를 만나(공교롭게 남편과 완전히 닮은) 영화 찍기를 포기하는 수진이나 그 둘의 마음엔 괴로움이 있겠으나 보는 우리에겐 웃음을 줄 수도 있을 것 같았고, 그게 마음에 들었다. 죽음이 꼭 슬픔과 연결된 것만은 아니라는 생각을 했고, 그게 시원했다.

- 감독님의 모든 영화에서 말미엔 최소한의 낙관 혹은 용기가 지켜진다는 점이 놀랍다. 한편의 영화가 결국 도착하는 지점이 있다고 할 때, 거기서 희망의 의미가 중요한 이유는 무엇인가.

나는 다른 사람들에 비해 비관적인 편인 것 같다. 그래서 그 끝에선 되레 희망을 찾고 싶어 한다. 그걸 이미 갖고 있는 사람에 비해, 훨씬 더 그것을 소중히 여긴다.

이제한 감독

이제한 감독은 2012년부터 독립영화 제작사에서 8년간 일한 뒤 직접 카메라를 들었고 데뷔작부터 지금까지 모든 작품이 비전 부문에 초청됐다. 그는 아내인 김수민 촬영감독과도 줄곧 협업하고 있다. 첫 장편 <소피의 세계>(2021)의 소피, <환희의 얼굴>(2024)의 환희, 그리고 <다른 이름으로>의 제현까지 이제한 감독의 영화에는 여러 시간과 장소에서 조금씩 다른 정체성으로 변모해가는 존재들이 있다. 저예산의 제약 속에서도 한층 과감하고 유희적인 구조를 선보이는 이번 신작에선 그 형식적 생기뿐 아니라 삶의 현재적 의미와 당면한 감정들 역시 짙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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