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파르 파나히의 <그저 사고였을 뿐>이 올해 칸영화제 황금종려상을 거머쥔 영화적 사건은, 단지 한 예술가가 도달한 미학적 성취를 극찬하는 것에 머무르지 않는다. 세계 3대 영화제가 최고상의 영예를 수여하는 동안, 이란은 자국의 감독에게 15년간 법적 제재를 가했다. 그렇기에 감독의 영화는 치안적인 것을 분열시키는 정치적인 표현으로 간주되곤 했다. 영화감독을 향한 잔인한 박해는 망명 혹은 이주의 결과를 산출한다. 프리츠 랑과 루이스 부뉴엘. 그리고 태국 정권의 계속되는 검열에 맞서, 검은 화면을 영사하거나 자국에서 장편영화를 찍지 않겠다고 선언하고 새로운 영화적 영토에 발을 디딘 아피찻퐁 위라세타꾼을 떠올릴 수 있다.
자파르 파나히의 여정은 이들과는 식별되는 것인데, 그는 이란에서 줄곧 영화를 찍었다. 그럼으로써 그의 카메라는 가혹한 현실 아래에서도 성립 가능한 시네마의 증거가 되어왔다. 다시 말해 그의 영화는 이란을 한사코 떠나지 않으면서 자국의 현주소를 정확하게 직시하고 있는 픽션이자 다큐멘터리이며, 갱신되는 역사이다. 자파르 파나히는 이란에 비하면 자유로운 땅에서 시네마의 종말을 목 놓아 부르짖는 우리에게, 새로운 형식의 시네마를 계속해서 내놓고 있다. 이란의 척박한 땅에서, 영화의 미학적 최전선이 격렬하게 생성되고 있다. 현재 지구상에서 가장 혹독하게 억압받는 영화감독이자, 가장 자유롭고 창발적인 예술가, 자파르 파나히는 국경 안에 갇혀 있으면서 그 분할선을 무화하는 동시대 시네마의 역설이 되었다.
<그저 사고였을 뿐>은 눈이 가려진 채 수감되어 고문당했던 무고한 사람들이 기억을 재생하는, 장님들의 로드무비이다. 영화는 체제의 부역자와 희생자들을 좁은 차에 탑승시킨 후, 완성될 수 없는 폭력의 조각들을 짜맞추는 뒤엉킨 모순 속에 있다. 깜깜하고 고요한 밤. 영화는 개 짖는 소리만 들리는 어둠을 가로지르는 차 안의 한 가족을 비춘다. 실수로 개를 친 남자는 차에서 내려 개의 죽음을 확인하고선 다시 운전대를 잡는다. 임신 중인 그의 아내는 ‘아무도 안 다쳐서 다행이야’라고 말하고, 남자는 ‘난 보지도 못했다’며 자신의 실수를 변호한다. <그저 사고였을 뿐>의 오프닝 시퀀스는 목격자가 없는 사고에서 스스로에게 면죄부를 주며 유유히 빠져나가는 가해자를 보여주면서, 눈에 띄지만 않는다면 죄는 성립할 수 없음을 주장하는 폭력의 부조리를 죽은 개를 통해 은유적으로 예고한다. 이어지는 시퀀스에서 주인공 바히드(바히드 모바셰리)는 곧장 반문한다. 그는 남자의 의족 소리를 듣고, 자신의 청각과 기억에 침잠해 있던 과거의 폭력을 곧장 기억해내고, 에크발(에브라힘 아지지)로 추정되는 남자를 납치할 계획을 꾸미고 실행에 옮긴다. 바히드는 자신과 마찬가지로 공권력이 휘두른 무자비한 폭력을 겪었던, 그리고 여전히 트라우마에 붙들린 피해자들을 공모한다. 에크발의 밴에 탑승한 자들이 가진 공통점은 잔혹한 신체적, 정신적 트라우마를 겪었음에도 그 원흉을 한번도 제대로 본 적이 없다는 것이다. 두눈이 강제로 가려진 채로 겪었던 폭력. 이들은 폭력의 가해자로 짐작되는 남자를 눈앞에 두고서 응시된 적 없는 폭력의 빈자리를 가늠해보려 애를 쓴다.
시각이 부재하는 어둠의 역사를 증명하기 위해, 이들은 삐걱대는 의족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잠든 남자의 체취를 맡는다. 혹은, 남자의 다친 다리를 만져보며 조각난 트라우마의 파편들을 끼워맞추려 한다. 청각과 후각, 촉각이 동원된 육체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폭력의 형상은 복원되지 않는다. 분노와 함께 폭력의 참상을 쏟아내는 동안, 붕대를 한 채로 잠든 외발의 남자는 그들의 말을 듣지도, 대답하지도 않는다. 끝내 완성되지 않는 가해자의 몽타주 앞에서, 바히드와 여성 사진가 시바(마리암 아프샤리), 결혼을 앞둔 알리(마지드 파나히) 커플, 그리고 다혈질의 하미드(모함마드 알리 엘야스메흐)는 무엇을 하려는 것일까. 이들은 ‘어떤 사람이 누군가의 눈을 멀게 한다면, 그 역시 장님이 되어야 한다’는 구절이 지배하는 함무라비법전의 수혜자들이 아니다. 다시 말해 이들은 보복을 위해 같은 방식으로 칼을 휘두르는 검객이 아니며 오히려 서로의 복수를 저지하고 교화시키는 중재자에 가깝다. 누군가가 이성을 잃고 누워 있는 남자에게 달려들 때, 나머지 탑승자들은 주저 없이 나타나 질문한다. ‘우리가 이 남자에게 가하는 행위는 온당한가.’ 의식 없는 남자를 태운 밴은 죽음을 확정하는 운구 차량이나 강요된 합의로 이뤄지는 전체주의의 공간이 아니라, 깜깜한 시야 속에서 경험했던 폭력의 잔재들을 차별 없이 공유하면서 서로의 실존을 부릅뜬 두눈으로 확인하는 민주주의의 공간이다.
에크발의 전화벨이 울리면서 영화는 새로운 경로를 탐색한다. 그의 아내가 출산해야 하는 긴박한 상황을 맞이한 것. 이들은 부역자 색출에서 산파로 바뀐 역할을 망설임 없이 수행하면서, 새로 태어난 생명을 축하한다. <그저 사고였을 뿐>은 폭력의 대상자들을 불러모은 뒤, 이들로 하여금 가해자의 얼굴이 아니라, 도래하는 시간을 목격하도록 하면서 발언과 응시, 그리고 동참과 같은 감각적인 행위들을 재분배하는 도발적인 정치영화이다. 자파르 파나히는 폭력의 피해자가 아닌, 행위의 주체가 될 수 있는 복수(複數)의 순간들을 생성하면서, 앙갚음이 촉발하는 복수의 공식을 전복시키고 이들의 머무는 자리를 과거의 트라우마가 아닌 가능성이 내재된 현재로 재배치하려는 것 같다. 그러나 감독은 끝내 몸서리를 치게 하는 엔딩 시퀀스에서 우리에게 한번 더 묻고 있다. 일상을 되찾은 듯한 바히드의 등을 향해 다시 삐그덕대는 의족 소리가 다가오기 시작한다. 이것은 환청일까, 그의 발소리일까. 바히드는 끝내 에크발을 살려둔 그날 밤 자신의 선택을 후회하고 있을까. 영화는 결국 실체를 드러내지 않았던, 어쩌면 바히드 일행과 개를 친 일가족 모두의 눈을 여전히 가리고 있는지도 모르는 비대한 권력이자 폭력의 주체, 이란의 빈자리를 선명하게 들춰낸다. 실제로 이란에서는, 시위대의 눈을 겨냥하는 사례가 종종 발생한다. 영화는 진실을 응시하는 시선이 탈각된 현실을 재현하면서, 설령 어둠 속에 있더라도 폭력의 형상을 계속해서 가늠해 나가야 함을 전 세계의 눈먼 자들에게 촉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