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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미국이라는 더러운 유산에 새로운 점화를 외치는 PTA의 ‘진짜’ 21세기, <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

토머스 핀천의 <바인랜드>는 1980년대 레이건 시대에서 시작하지만 읽어나갈수록 불안과 해방 사이에 놓였던 ‘반문화’의 60년대가 피어오르는 소설이다. 일찌감치 핀천의 <인히어런트 바이스>를 동명의 영화로 만들었던 폴 토머스 앤더슨이 다시 한번 같은 작가의 <바인랜드>에서 영감을 받은 <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로 돌아왔다. 60년대와 80년대를 가로지르며 전개되었던 소설과 달리 <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의 이야기는 우리가 맞닥뜨리고 있는 현재로 시대를 옮겼다.

무장혁명단체 ‘프렌치 75’에서 폭발물 제조를 담당하는 밥(리어나도 디캐프리오)은 억류된 이민자들을 탈출시키는 급습 작전에 동참한다. 조직의 핵심 인물이자 누구보다 급진적인 철학을 지닌 퍼피디아(테야나 테일러)는 작전 도중 군인 스티븐 록조(숀 펜)를 성적으로 모욕한 후 생포하면서 그에게 충동과 분노를 동시에 산다. 작전을 성공적으로 마친 프렌치 75는 이후로도 미국 도심에 게릴라식 폭발을 일으키면서 경찰의 우선 추적 대상이 된다.

영화의 초반부는 급속하게 진행된다. 재빠른 몽타주로 이 조직의 구성을 유연하게 요약하는 동시에 부모로서의 책임과 사회적 이상을 두고 갈등하는 두 연인의 서사 또한 압축적으로 전달한다. 시간은 여기서 멈추지 않고, 모종의 사태가 발생한 후 16년이 지난 2020년대로 단숨에 점프한다. 이제 지친 중년이 된 밥은 유일한 피붙이이자 사랑하는 딸 윌라(체이스 인피니티)만을 의지하며 지내고 있다. 오랫동안 조용히 사는 데 익숙해진 그에게 어느 날 예기치 못한 위협이 닥치며 삶의 방향이 뒤틀린다. 밥은 옛 동지들에게 도움을 요청하려 하지만 몸과 정신 예전 같지 않아 계속해서 진퇴양난에 처한다.

전작 <리코리쉬 피자>에서 70년대 대중문화의 틈바구니에 놓인 젊은 연인을 담았던 폴 토머스 앤더슨은 4년 만의 신작 <원 배틀 애프터 나더>를 통해 동시대 미국의 병폐적 영웅주의를 심문한다. 달리 말하면 오랫동안 줄곧 20세기라는 시간에 머물러 있던 그의 영화가 이제 관객의 시계와 실질적으로 같이 살게 되었다는 뜻이기도 하다. 20세기가 배경인 작품을 원작으로 삼고도 이야기를 2000년대로 재구성해야 했던 이유는 어쩌면 현실에서 마주한 위험성과 문제에 대한 긴급함이 기제이자 동력 중 하나로 작동했는지도 모르겠다. 지속적으로 미국이라는 허망한 신화를 해부해온 감독인 만큼 <원 배틀 애프터 어 나더>에서는 특히 테러와 총기를 주요 소재로 삼아 당대 극단적 세계의 모양을 까발린다. 가령 스티븐 록조를 둘러싼 요소들은 트럼프와 그 지지자들로 위시되는 마가(MAGA)의 귀환을 여지없이 드러낸다. 찰리 커크의 죽음을 기폭제 삼아 더욱 부끄러움 없이 결집 중인 동시대의 모습이 영화의 서사를 초과하는 절망적 현실을 보여준다는 점은 단연 아이러니다.

무엇보다 <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는 양손 모두로부터 더러움을 물려받은 자의 자기 투쟁에 관한 영화이기도 하다. 궁극적으로는 가장 어린 사람이 이 끔찍한 상속을 어떻게 타개할 것인지, 그리고 어른은 그에게 어떤 양보와 신뢰를 보여줄 수 있을지를 고민하는 영화로 보인다. 누구 하나 흠집 없는 연기를 선보이며 완성된 앙상블을 보이며, 장르적으로는 심각한 추격 스릴러에 머물지 않고 코미디로서도 미덕을 발휘한다.

close-up

배우의 장악력이라면 무엇보다 긴장감을 조이는 것뿐만 아니라 푸는 데도 완숙해야 할 터, 그 점에 있어 윌라에게 가라테를 가르치는 사부- 밥은 그를 항상 ‘센세’라고 다급하게 부른다- 이자 믿음직한 이웃이며 지역 이민자들의 거취를 돕는 세르지오(베니치오 델 토로)는 특유의 느긋함으로 영화에 큰 웃음을 더한다. 세르지오는 모두가 액셀을 밟아나가는 영화에서 홀로 고유한 왈츠의 리듬을 지킨다. ‘파도’를 떠올리며 평정을 찾으라는 그의 주문이 공허하기보다 미덥게 들려올 정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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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어 윌 비 블러드>감독 폴 토머스 앤더슨, 2007

장르의 특성상 2010년대 중반에 만든 다큐멘터리 <주눈>과 <아니마>를 차치한다면 폴 토머스 앤더슨은 21세기에도 20세기에 머물러 있었다. 그 시작점은 2007년 연출한 <데어 윌 비 블러드>다. 주인공 다니엘 플레인뷰는 그야말로 석유의 맛을 본 사업가로, 미국의 기원이라 할 만한 교회와 자본을 등에 업고 선 파괴적 남성성의 상징이다. 모순과 광기에 사로잡힌 ‘아버지’는 시대를 막론하고 우리의 뒤에 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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