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실과 가상 세계의 경계가 무너진다. 20세기 후반 디지털 기술의 혁신적인 발전상을 이야기와 형식 모두에 접목시킨 영화 <트론>시리즈의 세 번째 신작 <트론: 아레스>가 개봉한다. 컴퓨터그래픽 이미지를 도입해 시각특수효과의 지평을 넓힌 1982년작 <트론>, 가상 세계의 스펙터클을 3D와 아이맥스 상영으로 업그레이드한 2010년작 <트론: 새로운 시작>에 이어 이번에는 인류 최대의 혁명적 난제인 AI를 내세운다. 복잡한 트론의 세계에 갇히지 않으려면 세계관의 설명서는 필수다. 영화를 보기 전에 알고 보면 좋을 정보를 소개한다.
디지털 세계로 이끈 트론의 탄생
필름과 컴퓨터가 만난 역사는 그리 길지 않다. 그 시작점에 <트론>이 있었다. 1982년 <트론>이 만들어지던 때에는 영화의 특수효과에 컴퓨터그래픽 이미지가 쓰인다는 것이 낯설고 도전적인 과제였다. 애니메이터 출신 신인감독 스티븐 리스버거는 이제 막 태동하기 시작한 비디오게임을 보면서 게임 속에 갇힌 한 남자의 이야기를 구상한다. 가상현실과 멀티버스라는 단어가 생소했던 시절, 이 세계를 배경으로 한 그의 기획은 수많은 스튜디오에서 외면당했다. 유일하게 그의 손을 들어준 건 당시 29살의 젊은 CEO 톰 윌화이트가 이끌던 월트디즈니 픽처스였다.
<트론>은 제작 과정에서 영화 스태프보다 컴퓨터 기업 엔지니어들과 더 많은 논의를 거쳐야 했다. 녹화나 스캔 같은 일반적인 기술조차 없던 시절, 컴퓨터로 만들어낸 이미지를 띄운 모니터를 애니메이션 촬영용 카메라로 직접 촬영하기도 했던 당시 제작 과정은 할리우드의 시각특수효과 역사에서 전설처럼 전해진다. 그 때문에 2025년 관객이 오리지널 <트론>을 보게 되면 콘솔 게임기나 플로피디스크 같은 초창기 아날로그 디지털 시대의 유산이 전해주는 투박한 매력을 즐길 수 있다. 당시엔 최첨단 기술의 집합체였다. 심지어 디즈니는 리스버거 감독이 상상했던 게임 속 세계를 시각적으로 구현하기 위해 최고의 SF 만화가 뫼비우스에게 프로덕션디자인을 맡겼고, 전설적인 산업디자이너 시드 미드가 합류해 영화에 등장하는 기계장치를 디자인했다.
제임스 캐머런의 <어비스>나 픽사 스튜디오의 <토이 스토리>가 등장하기도 전의 일이다. 이후 영화산업은 빠르게 진화했고, 게임과 영화, 나아가 가상과 실재의 이념적 경계가 허물어지는 지각변동이 일어나면서 가상현실을 다루는 블록버스터영화의 시각적 충격효과는 극장이란 공간을 테마파크의 일종처럼 둔갑시켰다. 월트디즈니 스튜디오는 여기에 그치지 않고 <트론>의 세계관을 애니메이션, 비디오게임, 심지어 테마파크의 어트랙션 등으로 확장해왔다.
AI 시대의 미래상을 제시할 <트론: 아레스>
지금 보면 조악한 이미지로 이뤄진 듯한 오리지널 <트론>이 당시에 얼마나 낯선 형식의 영화였는지를 설명해주는 일화가 있다. 영화가 공개된 이후, 제55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는 이 영화가 컴퓨터그래픽 이미지로 상당 부분 구성된 점이 일종의 ‘반칙’과도 같다며 시각특수효과 부문에 후보 등록조차 올리지 않았다. 이후 40여년의 세월이 흐름 지금, 놀랍게도 그때와 똑같은 맥락의 화두가 할리우드를 뒤덮고 있다. 2025년 제97회 아카데미 시상식의 쟁점은 AI다. 인간의 고유 영역인 창작도 AI가 침범하게 되는 것 아니냐는 위기의식이 팽배해 있는 현재, <트론: 아레스>가 제시하는 미래 디스토피아의 풍경도 AI로 인한 인류의 위기다.
세계적인 컴퓨터 기업 엔컴의 엔지니어였던 케빈 플린이 창조한 가상공간 그리드에서 펼쳐졌던 프로그램들의 반란과 전투를 다룬 이전 시리즈와 달리 이번 <트론: 아레스>에서는 인류에게 새로운 위기가 찾아온다. 고도로 진화한 디지털 프로그램이 의인화된 형태로 가상 세계 그리드 안에서만 존재하던 아레스(재러드 레토)가 세상 밖으로 나오는 일이 벌어진다. 존재 자체로 마치 AI의 미래와도 같은 아레스는 처음으로 인류와 조우하게 되고, 이제 인류는 아레스를 통해 인간이 된다는 것, 유한한 생명을 얻는다는 것이 무엇을 뜻하는지를 되묻기 시작한다. 10여년간의 기획 기간, 감독 교체 등 몇 차례 제작 과정에서의 부침이 있었던 것으로 보이지만 그럼에도 기어이 속편을 밀어붙여 완성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트론: 아레스>는 디지털 초창기에 상상했던 사이버 가상 세계라는 유토피아의 아름다움, 평면의 스크린을 벗어난 3D 시각 혁명을 이끈 블록버스터에 이어 AI 시대를 맞닥뜨린 인류의 아찔하고 혼란스러운 풍경을 기어이 상상하고 구현해낸 영화로 기억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