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년의 밤> <행복의 나라>의 추창민 감독이 차기작의 주인공으로 내세운 이는 배우 로운이었다. 자신의 과거를 숨긴 채 왈패가 된 시율(로운)은 함께 청렴한 관리가 되자고 약속했던 친구 정천(박서함), 장사에 소질이 있는 최은(신예은)과 뜻밖의 인연으로 묶인다. 로운은 <탁류>에 강한 자신감을 내비쳤다. “이유는 명확하다. 내가 28살에 할 수 있는 최선의 연기를 했기 때문이다.” 로맨스 장르의 백마 탄왕자님이 아닌, 자신의 결핍에서 시작해 세상을 바꾸고자 나아가는 왈패 시율이 되어 로운은 <탁류>를 이끈다. “내 연기 인생에 찾아온 하나의 변곡점 같은 작품이다.” 30대의 시작을 앞두고한 단계 올라선 배우 로운과 <탁류>에 관해 대화를 나눴다.
- <혼례대첩> <연모> 등 이미 사극에 주연으로 참여한 경험이 있지만, 시율만큼 거친 인상을 보여준 건 이번이 처음이다. <탁류>에 합류하게 된 계기는.
= 처음 <탁류>의 대본을 받은 건 드라마 <연모> 가 끝난 이후였다. 사극의 호흡이 길다보니 또 할 수 있을까 싶었는데 대본이 무척 강렬했다. “나, 그리 심성 고운 놈 아니오”라는 시율의 대사 한줄이 나를 <탁류>로 이끌었다. 분장 테스트 날짜가 잡혔을 때 감독님이 “네게 제일 중요한 무기를 빼앗을 것”이라 말씀하셨는데, 그게 뭐냐고 여쭤보니 “잘생김을 빼앗을 것”이라고 하셨다. 내가 정말 기다려왔던 순간이었다. 배우에게 외모는 좋은 무기다. 하지만 과연 언제까지 외모를 앞세워 연기를 할 수 있을지 스스로 의문이 들던 시기였고 변화에 목말라 있었다. 멜로물의 주인공으로서만 소비되고 싶지 않던 차에 감독님이 먼저 변화를 제안해주셔서 기뻤다.
- 시율은 한때 절친한 정천과 함께 좋은 세상을 만들어보자는 포부를 지녔었다. 하지만 예기치 못한 일로 정천의 곁을 떠나고 신분을 감춘 채 살아 간다.
= 항상 시율이 왜 지방으로 숨어드는 게 아니라 한양 근처에 머무르는 것인지가 궁금했다. 내가 내린 결론은 그런 식으로라도 훌륭한 무관이 된 정천을 보고 싶었을 거라는 것이다. 잘 지내고 있구나, 자기 뜻을 잘 펼치고 있구나 하고 말이다. 그만큼 정천은 시율에게 가장 소중한 가족과 다름없다.
- 유독 타인과의 접점을 잘 만들지 않는 인물이기도 한데.
= 소속감이라는 걸 느끼면 안되는 친구라고 생각 했다. 시율은 자신의 신분을 숨기고 항상 쫓기는 입장이다. 돌아갈 곳도, 마음 둘 곳도 없이 벼랑 끝에 몰린 채 살아간다면 생존과 관련된 생각 외엔 하기 어렵지 않았을까. 배고픔과 같은 원초적 본능을 제외하곤 별다른 감정을 느끼지 못할 것 같았다. 내게 시율은 그런 캐릭터였다. 혼자서 모든 것을 책임지고, 타인에게서 그 무엇도 기대할 수 없는 상황으로 보였다. 한번은 감독님에게 <탁류>의 장르에 관해 여쭤본 적이 있다. 대부분 액션 활극을 떠올리지만 감독님은 성장드라마라고 하시더라. 과거 시율에겐 좋은 세상을 만들겠다는 큰 포부가 있었다. 하지만 그런 그에게 신분의 위계가 명확한 당대 시스템에 어쩔 수 없이 순응해야 하는 상황이 찾아온다. 그렇게 침묵하다 또 달라지는 계기를 맞이하는 것 때문에 성장드라마라는 표현을 쓰신 것이라고 받아들였다.
- 정천과 시율의 액션 스타일이 다르다. 정천이 주로 검을 사용한다면 시율은 맨몸 액션을 보여 준다.
= 그동안 나도 검을 주로 써와서 처음엔 주먹 액션이 어색했다. 연습밖에 답이 없었는데 하다 보니 재밌더라. 초반에 관군들과 혼자 대적하는 신도 웬만하면 직접 소화하고 싶어서 정말 열심히 했다. 이후 액션팀이 “대역이 필요 없을 것 같다, 나중에 액션물만 들어오는 거 아니냐” 라고 칭찬해주셔서 뿌듯했다. 몸도 키우긴 했는데 예쁜 근육을 만들고자 했다기보다는 험하게 살아온 과거의 세월이 주는 몸의 느낌을 살리고자 했다.
- 최은과 주변인들이 품삯을 제대로 치르지 않았다는 오해로 인해 둘의 인연이 시작된다.
= 최은은 시율에겐 감히 넘볼 수 없는, 눈도 마주칠 수 없는 존재다. 하지만 시율은 사흘을 굶은 상황이고 노동의 정당한 대가를 받지 못한 것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어 최은을 찾아가 품삯을 요구한다. 가장 긴장했던 장면 중 하나다. 그 장면이 설득력 있게 나와야 최은과의 관계도 설명되고 시율의 신념도 잘 보일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 시율이 적대시하던 무덕(박지환)의 왈패 패거리에 들어가는 결정은 어떻게 받아들였나.
= 시율에겐 아무리 힘들어도 남의 것은 절대 빼앗지 않겠다는 나름의 규칙이 있었다. 돌아가신 어머니와 자신을 친아들처럼 돌봐준 정천의 어머니를 생각해서라도 그런 짓을 하면 안된다고 생각했는데, 결국 무덕에게 꼬투리를 잡히는 일이 발생한다. 원해서 패거리에 들어간 건 아니지만 이후로 시율의 심리가 달라진다. 저들에게 소속감을 느껴도 되겠다는, 나의 또 다른 가족으로 받아들일 수 있겠다는 마음. 이후로 행동도 바뀌며 시율은 자신이 겪은 부조리한 시스템을 변화시키려 한다. 극이 흐를수록 변화하는 시율의 행보를 기대해주셔도 좋겠다.
- 오늘 대화하면서 연기에 대한 열정이 대단하다는 것을 느꼈다. 햇수로 데뷔 7년차인데 여전히 연기에 대한 애정이 큰가.
= 돌이켜보면 처음엔 연기를 온전히 즐기진 못했다. 하지만 요즘 느끼는 건 완벽이란 건 없고, 완벽을 추구하는 것도 일종의 회피라는 것이다. 완벽엔 실체가 없다. 불안함을 받아들이니 이젠 모든 순간이 즐겁다. 어떤 연기든 하다 보면 짜릿한 때가 온다. 그래서 앞으로도 작품과 캐릭터가 좋다면 마다할 생각이 없다. 난 망가질 준비도 되어 있다. 시력이 좋지 않은데도 라섹을 하지 않는 이유이기도 한데, 안경 도수가 높아 안경을 쓰면 눈이 상당히 작아진다. 언젠가 코미디 장르에 도전하면 이 모습을 써먹을 수 있지 않을까. (웃음) 앞으로도 오래, 즐겁게 연기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