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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는 것들, 배우 이강생, 차이밍량 감독
이유채 사진 백종헌 2025-09-29

34년째 이어진 인연의 자연스러움이란 이런 걸까. 차이밍량 감독이 인터뷰 테이블 중앙에 놓인 쿠키를 집자, 이강생은 어느새 접시째 그의 앞에 밀어두었다. 대화의 흐름에도 막힘이 없었다. 차이밍량이 진지한 대답을 마치면 경청하던 이강생이 부드럽게 말을 이어갔고, 이강생의 흩어진 기억은 차이밍량이 슬그머니 메워주었다. 부산국제 영화제가 30주년을 맞는 동안 여러 차례 영화제를 찾아온 두 영화적 동지는, 올해 <안녕, 용문객 잔>(2003)이 ‘아시아영화의 결정적 순간들’ 섹션에 선정되며 다시 부산을 방문했다.

이강생, 차이밍량(왼쪽부터).

2023년 한국의 원주 아카데미 극장 철거를 취재했을 때, 올해 서울 대한극장의 폐업 소식을 접했을 때 <안녕, 용문객잔> 속 복화극장을 떠올렸다. 두분에게도 단골 극장이나 오래된 극장이 문을 닫은 경험이 있나.

=차이밍량 내가 다니던 과거의 수많은 극장이 떠오르고 그곳들에 대한 기억을 <안녕, 용문객잔>에 담았다. 알다시피 예전 극장의 규모는 대단했다. 1천석 이상의 좌석이 들어찬 상영관 안으로 관객들이 우르르 들어가는 모습이 내게는 아주 특별한 의식을 치르러 가는 것처럼 보였 다. 이제는 전세계의 극장들이 속속 문을 닫고 있다. 이 비극적 소식을 꿰고 있는 건 그곳들로 부터 극장 마지막 영업 날, 이 영화를 틀고 싶다는 요청을 자주 받고 있어서다. 안타깝게도 이제 <안녕, 용문객잔>은 극장에서 부르는 최후의 노래가 됐다.

=이강생 감독님 말씀을 들으며 나도 내 추억 속극장들을 떠올렸다. 이를테면 어릴 적에 새해를 맞이했던 극장과 극장과도 같았던 사당들. 대만에는 마을마다 작은 사당이 있는데 그곳에서 늘 그림자놀이 같은 전통 공연 뒤에 영화를 틀어줬다. 무엇보다 낮에 긴 영화를 보고 나오면 어느새 저녁이 돼 있었는데, 어두워진 하늘을 보며 내가 아주 특별한 체험을 하고 있다는 생각에 마음이 벅차곤 했다.

- 이번 영화제에서 차이밍량 감독의 신작 <집으로> 도 상영된다. 함께 작업한 적 있는 호웅흐항시 배우가 고향 라오스를 직접 카메라에 담은 작품이라고.

=차이밍량 최근 10년간 나는 극영화를 찍고 싶지 않았다. 돈을 끌어모으고 팀을 꾸리는 일에 지쳤달까. 산업화된 제작 환경 속에서 영화의 자유는 극도로 줄어들었고, 아는 이야기를 반복하는 것 같아 회의감도 들었다. 그럼에도 영 화에 아직 가능성이 남아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다. 그 과정에서 찾은 게 비(非)극영화, 심지어 비(非)다큐멘터리였다. <집으로>가 바로그 실험이다. 호웅흐앙시의 고향을 예전에 함께 가본 적 있는데 무척 좋았다. 그가 다시 간다기에 나도 데려가달라고 부탁했다. 대본도, 구조도 없이 모든 영화적 규칙을 깨버린 작품이다. 그래서 나는 이 영화가 좋다.

- 이강생 배우는 <집으로>에 총괄 프로듀서로 이름을 올렸다.

=이강생 그렇지만 나는 정말로 한 게 없다. 그나마 도움을 드린 게 있다면 작품의 타이틀 정도다. 지난 10년간 감독님의 모든 작품 타이틀을 내가 붓글씨로 직접 써왔는데, 이번에도 그랬다.

- 영화 <오후>(2015)에서는 두분의 대화가 일과 생활을 오가며 두 시간 넘게 이어진다. 요즘은 어떤 주제로 이야기를 나누나.

=차이밍량 일단 우리 둘 다 말을 잘 안 한다. (좌중 폭소) 한다고 해도 보통 사람과 똑같다. 밥 먹었니, 뭐 먹을까. 뭐 이런 얘기다. 작품을 함께하면 더 말을 안 한다. 소통을 안 해도 되는 상태에 이르기 때문이다. 최근 10년간 강생과 좋은 곳을 찾아 걷는 ‘행자 연작’을 찍고 있다. 강생에게 참 고마운 게 행자를 찍으려면 머리를 밀어야 해서 다른 작품을 못한다. 그런데도 늘 흔쾌히 응한다. 얼마 전에 스페인에서 행자를 찍고 와서 지금 강생의 머리가 저렇게 짧다.

- <오후>에서 차이밍량 감독이 “다음 생에도 나와 함께 일하겠냐”고 묻자 이강생 배우가 “물론이다. 다만 그때는 내가 감독을 하고 감독님이 배우였으면 좋겠다”고 답하는 대목이 있다. 지금 이강생 배우는 차이밍량 감독을 주인공으로 어떤 영화를 만들고 싶나.

=이강생 감독을 하겠다는 말을 번복하겠다. (웃음) 그사이 두편을 연출했는데 정말 어렵고 고생스러웠다. 대본 쓰고 자금을 모아 영화를 만들면 박스오피스를 신경 써야 하고 여기저기서내 영화를 설명해야 하는데 도저히 못하겠다. 평생 배우로 남을 거다.

=차이밍량 나는 다음 생엔 감독도 배우도 하지 않겠다. 오로지 관객만이 진정으로 행복하다.

- 이번 자리로 차이밍량의 <너의 얼굴>(2018)도 다시 떠올랐다. 이강생 배우를 포함해 총 13명의 얼굴을 빅 클로즈업으로 관찰한 작품이었다. 이제 두분은 서로의 얼굴을 보지 않고도 설명할 수 있지 않나.

=이강생 감독님은 내 아버지와 인상뿐만 아니라 전체적으로 굉장히 닮았다. 과묵하고 느리고 안정적이다. 굉장히 엄하시기도 해서 배우 들이 무서워하기도 하는데 나는 30년 넘게 함께해서 괜찮다. 감독님 얼굴빛이 안 좋아 보이면 눈치껏 말을 줄이고 맞춰간다.

=차이밍량 지금의 이강생은 나를 무서워하지 않는 게 분명하다. (웃음) 나 역시 우리 둘의 관계보다 더 가깝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얼굴뿐만 아니라 성격까지도 익숙하다. 설명은 내 영화들이 대신할 것이다. 이강생이 출연한 내 모든 영화가 곧 그의 얼굴이니까.

- 차이밍량 감독은 지난해 전주국제영화제에서 ‘행자 연작’ 전편을 상영하며 “지금 나이에서 할 수 있는 창작이 무엇일까 고민 중”이라고 했다. 답을 찾았나.

=차이밍량 아직이다. 40대, 50대, 60대… 나이가 들수록 나이대마다 다른 영화를 만드는 중이다. 지금은 아까 말한 비(非)극영화, 손으로 만든 듯한 창작법으로 지금까지 작업했던 배우들을 다시 찍고 싶다. 이들과 여전히 사이가 좋은데 이들이 늙어가는 모습을 내 카메라에 담는 것도 의미가 있을 테니까. 물론 이강생도 포함이다.

- 이강생 배우는 올해 ‘대만 톱 탤런트’에 선두로 서며 여전히 국제 무대를 활발히 오가고 있다. 최근 몇년은 <블루 선 팰리스> <누군가 지켜보고 있다> 등 젊은 감독의 작품에 출연을 이어가고 있는데 어떤 즐거움을 느끼나.

=이강생 말 그대로 즐겁다. 나를 원하는 신인 작가와 감독들은 대개 어릴 적에 차이밍량 감독님의 작품을 감명 깊게 보며 자란 분들이다. 그래서 내 연기 방식과 내가 거친 현장을 잘 알고 있어서 마음 놓고 연기한다. 나를 믿는 만큼 내게 자유도 많이 주어 현장에서 즉흥적인 도전도 한다. 꽤 큰 도전의 결과물이 내년 개봉할 영화다. 거기서는 할머니로 등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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