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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평] 프레임의 죽음을 희망하며, 최선 평론가의 <얼굴>
최선 2025-10-01

“그런 게 일종의 오해야, 오해.” 연상호의 <얼굴>은 눈이 보이지 않는 전각 명인 임영규(권해효)의 이 첫마디로 시작한다. 사건의 핵심을 직접 드러내는 대사는 아니지만, 작품 전체의 운명을 짧게 예고한다. 오해라는 말은 잘못 인식했다는 뜻을 넘어 인간이 서로를 바라보는 방식 자체가 얼마나 불완전한지를 의미한다. 얼굴로 사람을 온전히 이해하기란 불가능에 가깝다. 감추고, 왜곡하고, 전혀 다른 이미지를 덧씌우려 하니까. 그동안 연상호는 개인의 얼굴보다는 집단 폭력과 희생의 굴레를 탐구해왔다. 좀비 아포칼립스를 앞세운 <부산행>부터 지옥의 심판대에 인간을 떨어뜨린 <지옥>, 종말 서사로 인간 군상을 해부한 <계시록>까지 애니메이션과 실사영화를 넘나들며 확장해온 그의 세계는 언제나 집단 폭력, 군중의 광기, 제도화된 공포를 전면에 내세웠다. 그에 속한 개인은 집단의 운명을 짊어진 채 대표성을 띤 기호로 기능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얼굴> 은 확연히 다르다. 저예산, 소수 인력, 짧은 제작 기간으로 만든 이 작품은 화려한 시각효과나 대규모 세트, 자본의 힘이 필요한 장치들을 모두 배제했다. 특수효과와 과장된 장면이 제거되니 작품에 강력한 중력이 생긴다. 관객을 현실로 끌어들여 두발을 지면에 단단히 딛고 서게 만든다. 이전 영화가 가상의 세계와 영웅적 인물이 개입하는 장치로 집단 폭력을 드러냈다면, <얼굴>은 오직 날것의 현실로 다가간다. 이 변화는 단순히 제작 조건에 의한 결과물이 아닌, 연상호가 자신의 작품 세계를 새 궤도로 들여놓았음을 알리는 징후다.

궤도의 이동은 카메라가 향하는 지점에서도 알 수 있다. 카메라는 군중이나 시스템에 초점을 맞추지 않는다. 대신 한 사람의 얼굴 앞에 서서 배경을 지우고 인물의 삶을 바라보게 만든다. 단체 사진을 찍듯 연출되었던 이전 작품과 달리, <얼굴>은 단독 사진처럼 한 사람 한 사람의 이목구비를 집요하게 들여다본다. 관객은 스크린을 가득 채운 얼굴과 마주하며 표정에 숨겨진 진실을 발견한다. 표정은 수십개의 미세 근육이 만드는 긴장과 이완의 감정지도다. 입가에 이는 경련, 이마에 잡히는 주름, 눈가에 번지는 물기가 곧 인물의 서사가 된다. 언어가 사건을 설명한다면, 얼굴은 그 설명을 덮거나 반박한다. 대사가 바깥을 향한 말이라면, 얼굴은 속내의 무의식적인 진술이다. 인물의 진심은 근육의 미세한 움직임으로 드러나고 관객은 대사를 듣는 대신 표정을 읽는다. 임영규를 연기한 권해효의 얼굴을 보자. 주름과 굴곡을 굽이굽이 만들어내며 해명하는 그의 표정은 오랜 세월 인간이라는 칼날에 패고 도려진 흔적을 고스란히 그려낸다. 자신이 깎아온 글자처럼 모자라지도 넘치지도 않게 놀랍도록 세밀하고 정교하다. 임동환을 연기한 박정민의 얼굴은 전혀 다른 궤적을 보인다. 그의 표정에는 ‘새로 깎여나가는 자’의 고통이 선연하다. 아버지의 아름다운 성공 신화를 뒤흔드는 추한 진실과 마주한 순간, 그의 얼굴엔 아름다움과 추함 사이에서 갈등하는 복합적 감정선이 얽히고설킨다. 진실의 칼날을 받아내는 박정민의 얼굴은 새로 판 도장처럼 이의 없이 선명하고 생생하다. 정영희를 연기한 신현빈은 얼굴의 도움조차 받을 수 없다. 영화가 끝날 때까지 얼굴을 보여줄 수 없으므로 목소리만으로 인물의 내면을 전달한다. 목소리의 강약, 높낮이, 파동과 속도 등으로 표정을 만들어내는 과정을 지켜보노라면 말이란 게 얼마나 부정확한 전달 수단인지 한계를 실감하게 된다. 이들의 연기는 영화의 자본이자 특수효과라 말할 만하다. CG나 첨단기술이 아닌, 인간의 얼굴과 목소리가 만들어내는 아우라는 영화의 핵심 동력이다. 특수효과를 걷어낸 자리에 채워진 대체 불가능한 인간효과. 이는 진실과 거짓, 오해와 이해, 아름다움과 추함이라는 난제에 실마리를 제공한다.

얼굴을 클로즈업해 오래 관찰하게 만드는 전략은 관객에게 자신의 얼굴을 떠올리게 한다. 영화를 보는 동안 우리는 어떤 표정을 지었을까. 배우의 얼굴에 나타난 미세한 변화를 따라가다 보면 무심코 자신의 얼굴을 자각하는 순간이 온다. 그러다 영화의 배경이 되는 1970년대와 2025년 현재가 닮았다는 사실에 가닿는다. 임영규가 살았던 시대에 인주를 묻혀 찍으면 임동환의 시대가 찍힌다. 소수의 합의만으로 개인의 삶을 암매장할 수 있는 사회. 오늘은 그때와 다르다고 말할 수 있을까. 우리는 더 교묘하거나 더 노골적인 방식으로 얼굴의 가치를 평가하고 타인의 삶을 매도하는 시대에 산다. 재능보다 외모가 우선하는 문화는 여전히 지배적이며 SNS로 타인의 보정된 삶을 소비하면서 자기 얼굴을 끊임없이 관리해야 하는 압박에 시달린다. 얼굴은 사적 영역으로 보호돼야 하는 동시에, 공적 자산으로 자본시장에 내던져진다. 한편에서는 얼굴 평가가 부당하다면서도, 다른 한편에서는 얼굴을 경쟁과 자산의 지표로 삼는 이중적 규율이 적용된다. 영화는 이 모순의 정곡을 찌른다. 1970년대라는 과거에 머물지 않고 평가와 낙인의 도장을 동시에 찍어대는 오늘을 비춘다. 관객은 스크린에 가득 찬 얼굴을 들여다보며 자신을 투영하고 오해로 시작된 영화의 여정은 결국 자기 자신에 대한 이해라는 불편한 결론으로 우리를 데려간다.

결말에 이르러 영화는 임영규의 목소리를 다시 들려준다. 정영희를 살해한 사실을 아들에게 고백하면서 그가 말한다. “이해하지? 넌 이해해야 해.” 이 말은 화해의 뜻으로 들리지 않는다. 임영규는 자신의 선택을 이해하라는 뜻으로 말했겠지만, 관객에겐 어떤 선택을 해야 옳은지 판단하라고 되묻는 말로 들린다. 얼굴을 정면으로 보고 진실을 외면하지 말라는 명령. 이해란 용서가 아니라, 진실을 똑바로 보는 행동이다. 이 뜻을 이해하지 못한 임동환은 끝내 아버지의 성공 신화를 지키기로 한다. 진실을 또 한번 암매장하는 것이다. 마지막 장면에 공개된 정영희의 사진을 보며 관객은 임동환과 함께 혼란에 빠진다. 러닝타임 내내 우리가 궁금해하고 기대한 얼굴이 무엇인지 비로소 깨달았기 때문이다. 죽은 정영희는 영정 없이 장례식을 치른다. 검은 띠만 두른 빈 액자. 어쩌면 이는 ‘프레임의 죽음’을 희망한다는 연상호의 메시지일지도 모른다. 또는, 정영희들이 너무 많아 사진을 다 넣을 수 없다는 뜻이거나. 오늘도 우리는 누군가의 삶에 성급히 프레임을 씌우고 낙인을 찍는다. 거대 담론이 아닌 몇 마디의 왜곡과 몇개의 댓글, 몇분의 무관심 같은 사소한 행위로. 연상호가 새 전각도를 들고 스크린에 깎아넣은 얼굴이 오늘을 사는 우리를 향해 희박한 안녕을 당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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