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5년 26세의 피렌체 출신 젊은 감독이 연출한 첫 장편 영화 <호주머니 속의 주먹>은 그해 베니스 영화제에 출품을 거부당했다. 가족 제도부터 사회 규범까지 모든 것에 반기를 들었던 이 문제작은 공개 직후 이탈리아 내부에서 격렬한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그로부터 6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50편이 넘는 작품을 만들며 거장의 반열에 오른 마르코 벨로키오는 여전히 역사와 개인의 경계에 선 채 날카로운 시선으로 시대의 폐부를 찌르고 있다. 하지만 자신의 영화 여정을 ‘지그재그’와 같다고 설명했던 그의 말처럼 이 문제적인 거장의 영화 세계를 한 단어로 일축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따라서 마르코 벨로키오라는 이름은 관객이 어떤 작품을 보냐에 따라 다르게 다가올 것이다. <허공으로의 도약>(1980)부터 <달콤한 꿈>(2016)에 이르기까지 불안이란 칼날 위에 서 있는 인간을 해부했던 빼어난 정신분석가이자, <내 어머니의 미소>(2002)와 <잠자는 미녀>(2012)를 통해 종교나 존엄성의 딜레마를 탐구하고자 했던 사색가이며, <중국은 가깝다>(1967)로부터 <익스테리어, 나잇>(2022)까지 이어지는 이탈리아의 정치와 역사를 관찰한 정치학자기도 할 것이다. 하나 명확한 점은 마르코 벨로키오의 영화 속에서 우리는 시대와 개인, 공적인 것과 사적인 것은 결코 안과 밖의 대립처럼 분리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제30회 부산국제영화제는 장편 데뷔 60주년을 맞아 마르코 벨로키오의 영화 세계를 유심히 들여다볼 기회를 마련했다. '마르코 벨로키오: 주먹의 영화'라는 제목으로 구성된 특별기획 프로그램에는 그의 장편 데뷔작 <호주머니 속의 주먹>부터 HBO와 함께 제작한 시리즈 <뽀르또벨로>(2025)에 이르기까지 8편의 영화가 상영됐다. <씨네21>이 특별전을 위해 부산을 찾은 마르코 벨로키오 감독과 만났다. 인간과 세계가 끊임없이 교차하며 투과되는 그의 영화 철학을 전해 들을 수 있던 귀중한 인터뷰였다. 동시에 9월 21일 14시부터 15시 30분까지 진행되었던 마스터 클래스 ‘마르코 벨로키오: 주먹의 영화'에서 그의 연출론을 살펴볼 수 있는 대담의 일부를 세 가지 키워드로 기록하여 옮겼다.
- 부산국제영화제의 인연은 2004년 상영된 <굿모닝, 나잇>까지 20년을 거슬러 올라간다. 지난해까지 총 10편에 달하는 감독님의 영화를 소개해 온 부산에서 60년 간의 필모그래피를 톺아본 이번 회고전을 향한 소회가 남다를 것만 같다.
그간 부산국제영화제에서 내 영화들이 자주 상영되었다. 따라서 부산에서 회고전을 갖는 것은 내게도 매우 의미가 크다. 단 며칠 만에 한국 사회를 전부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지만, 이번 회고전을 통해서 새로운 광경을 바라볼 수 있어서 즐거웠다. 그간 텔레비전과 극장에서 본 한국 영화의 걸작들은 매우 도전적인 작품이었다. 유럽에서는 볼 수 없는 완전히 다르고 새로운 영화의 한 갈래로 다가왔다.
- 이번 특별 프로그램의 제목은 ‘마르코 벨로키오: 주먹의 영화’다. 첫 장편인 <호주머니 속의 주먹>에서 비롯된 이 수식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
보통 주먹을 들어 올린다는 건 정치적 표현의 한 형태를 의미한다, 하지만 이제 나는 주먹을 주머니에서 꺼낸 상태다. 지금 내 나이가 되면 급진적인 정치적 혁명의 가능성에 대해 곱씹게 된다. 세상이 어떻게 바뀔 수 있는지에 대한 명확한 대안이 없기 때문이다. 60년대부터 80년대는 정치적으로 근본적인 변화를 통해 자본주의 체제를 극복하려는 방식의 변화를 모색했던 시기였다. <중국은 가깝다>를 찍었던 6, 70년대 당시 마오이즘 신화가 이탈리아와 유럽 청년들 사이에서 얼마나 유행했는지를 기억한다. 그래서 그때는 모두가 주먹을 쥐었지만, 이제 그 문구는 이전의 시대를 의미한다. 그래서 지금의 나를 대변하는 키워드라고 이야기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웃음)
- 이탈리아의 근현대 역사와 시대를 꾸준히 소환했던 감독님의 영화에는 개인과 역사 사이의 역학이 선명하게 드러난다. 개인의 미시사가 역사의 거시사를 드러내는 동시에 그 역의 명제도 성립하고 있다. 개인에게 역사란, 역사에게 개인이란 어떤 관계인가.
역사와 개인 그 두 조합이 나를 매료시킨다. 역사의 거시사를 인물을 통해 바라보고 그 안에서 내가 표현할 수 있는 개인들에 관한 이야기를 찾아내려 한다. 단순히 한 개인만 아니라 그 주변의 관계마저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어 낼 수 있다. 예를 들어 <익스테리어, 나잇>에서는 앤도 모로(파브리지오 기푸니)가 가족과 함께한 모습과 납치에 얽힌 다른 인물들의 사적인 모습을 통해 이들 모두가 납치와 암살이라는 국가적인 정치 사건 아래에서 어떻게 살아냈는지에 대해 이야기한다. 이 공적 영역과 사적 영역의 결합 혹은 관계가 나를 끌어당기는 공식이다. 물론 역사에 충실해야 하지만 내 상상력은 역사에 대해 불충실하다는 것을 인정하고 싶다. 그것이 스타일의 일부다. 가능할 수 있다면 인물들에 더 가까이 다가가고자 한다. 내가 직접 경험하지 않았기에 역사책에 묘사되지 않은 공백을 채우고 싶다.
- 한편, 시대의 초상 아래에서 감독님의 인물들은 정신적으로 불안정한 상태에 놓인다. <육체의 악마>의 자살 시도하는 광인, <종교의 시간>의 정신병자 형, <보모>(1999)의 산후우울증에 걸린 아내, <달콤한 꿈>의 마시모(발레리오 마스텐드리아)까지 나열하자면 끝이 없다.
광인이야말로 진리를 통달한 자라는 낭만적인 관점이 하나의 신화처럼 존재해 왔다. 가령 예술사에서도 반 고흐와 같은 예시가 있다. 그는 천재지만 정신병으로 인해 자살을 택하지 않았나. 그러나 내게 광기란 곧 불행이며, 고통받는 존재이고, 현실과의 관계를 잃어버린 자다. 나는 내 사적인 삶과 가족의 경험 속에서 정신적 고통을 겪은 이들을 마주해왔다. 그래서 <호주머니 속의 주먹>에서도 이를 바탕으로 비유적인 의미로서 ‘간질’을 인물에 부여했다. 그러므로 내가 정신 질환을 표현하는 방식은 바로 그 병을 인식하고 치유하고자 하는 경향으로 읽을 수 있다. 마시모 파지올리의 세미나를 통해 나는 정신질환의 파괴성을 극복하려는 작업을 모색했다. 이를 치유하고자 하는 지속적인 움직임을 묘사하는 작업이 내게는 중요하다.
- 고통과 광기의 인물만큼이나 그들이 처한 상태에도 눈이 간다. 3번이나 다룬 알도 모로 총리의 납치 사건(기독교민주당과 이탈리아 공산당의 협치를 주도하던 전 총리를 붉은 여단이 납치한 사건 – 편집자)을 비롯해, 감독님의 인물들은 자의 혹은 타의로 감금, 납치, 혼수 상태 등 한정된 공간에 자신을 가둔다.
내게 중요한 것은 언제나 움직임이다. 인물들이 갇혀 있는 상황에서도 움직임을 발견하고 묘사하고자 한다. 이 인물들은 집 안에 칩거하거나, 감옥에 투옥되거나, 정신병원에 입원하거나, 심지어 자기 자신 속에 갇히기도 한다. 하지만 그런 닫힘 속에서도 나는 언제나 외부를 향한 움직임을 그리고자 한다. <굿모닝, 나잇>에서는 테러리스트의 꿈속에 납치된 알도 모로가 거리로 나서는 장면이 나온다. 이는 마치 닫힌 공간을 벗어나 자유를 향해 나아가는 움직임이다. 나에게 있어 이런 운동은 단순한 신체적 행위가 아니라, 억압과 감금 속에서도 자유를 찾아 나가는 내적인 힘을 의미한다. 그렇기에 움직임은 내 작업에서 매우 흥미로운 주제다.
- 올해는 HBO와 손을 잡고 시리즈 <뽀르또벨로>를 공개했다. 3년 전 이탈리아 공영방송 Rai를 통해 제작한 <익스테리어, 나잇>에 이어 세계적인 OTT 플랫폼과 함께 협업에 나서게 됐다. 60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새로운 영화 산업 환경에 발맞춰 창작을 이어 나간 동력이 궁금하다.
언제나 새로운 것에 마음이 끌린다. 내 정신이 깨어있고 활발하게 활동할 수 있는 마지막 순간까지 끊임없이 새로운 것을 시도하고 싶다. <뽀르또벨로>는 HBO라는 국제적인 플랫폼에서 먼저 프로젝트에 대해 훌륭한 제작 제안을 건넸다. 물론 이 이야기는 지극히 이탈리아적인 이야기다. 이탈리아, 이탈리아 사법 제도, 이탈리아 텔레비전을 다루는 이야기지만, 공동 제작사로 참여한 Rai를 통해 HBO 콘텐츠로 방영될 예정이다. 내게도 신선한 도전이었던 만큼 <뽀르또벨로>는 또 하나의 시작점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