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률 감독의 신작 <루오무의 황혼>에서 상실과 사랑의 형태는 상당히 닮아 있다. 바이(바이 바이허)는 오래 전 헤어진 옛 연인 왕이 '루오무의 황혼'이라 적어 보낸 엽서를 받고 작은 마을 루오무에 도착한다. 정처 없이 마을을 돌며 바이는 왕의 흔적을 발견한다. <야나가와> <백탑지광>에 이어 장률 감독이 중국에서 만든 세번째 영화로 장소와 인물을 엮는 장률 감독의 특성과 전에 없던 새로운 실험 형식을 찾아볼 수 있다.
- 루오무를 배경지로 택한 이유는.
중국의 4대 불교 명산인 어메이산에 가서 쉬려고 했는데, 그 아래에 있는 루오무 마을을 지나다 그곳의 이상한 매력에 끌렸다. 2~3일 정도 마을에 뭐가 있는지 구석구석 따지고 보니 ‘영화 하나 찍어볼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하나, 둘 배우들에게 연락을 돌려 우선 시놉시스 한 장을 보여줬다. 그렇게 루오무에 모인 배우, 제작진들과 함께 영화를 만들었다.
- 바이가 루오무로 향하는 이야기는 시놉시스 단계에서부터 있었나.
루오무에 머물 때 실제로 내가 바이처럼 돌아다녔다. 배우 바이바이 허는 작품에 참여할 수 있는데 황야오는 어렵다고 해서, 그럼 바이가 왕을 찾는 이야기도 가능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마 황야오가 참석했다면 그에 맞춰 내용도 달라졌을 것이다. 황야오는 나중에 목소리 연기만 따로 했다.
- 전작 <백탑지광>의 주연들이 <루오무의 황혼>에도 등장한다. 서로 합이 상당히 좋았나 보다.
그렇지 않았다면 아마 루오무까지 와주지 않았을 것이다. 합이 좋았던 이유 중 하나는 우리가 한 민박집에서 다 같이 지낸 덕일 것이다. 본래 제작사에서 호텔을 따로 구해주기로 했는데 바이 바이허가 갑자기 민박에 들어가고 싶다고 하더라. 그렇게 다 함께 한 숙소에 머물렀고 거의 매일 저녁 바이 바이허가 물만두를 만들어 나눠주곤 했다. 그곳이 바로 영화에 등장하는 민박집이다.
- 바이가 계속 마을을 배회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알코올 중독자로서 취기에 지지 않고 자기를 다스릴 필요가 있었을 것이다. 3년 전 옛 애인도 루오무를 돌아다니지 않았겠나. 사랑하는 사람들 사이에선 무언가 통한다고 생각한다. 바이 혼자 돌아다니는 것처럼 보이지만, 어쩌면 보이지 않는 왕도 그와 함께 마을을 둘러보고 있을 것이란 생각이 들어 중간중간 왕의 목소리를 따로 넣었다. 마을을 떠돌아다니는 알코올 중독자 바이의 신체 상태와 리듬을 유지하는 것, 누가 봐도 그 리듬이 납득되게 하는 것이 가장 중요했다. 사실 대사와 이야기를 다루는 건 그리 어렵지 않다. 영화는 리듬으로 상대에게 충격을 줘야 한다. 루오무에서 우연히 만난 바이, 리우, 황이 지닌 리듬은 각자 다르다. 그렇지만 유사한 리듬을 지녔다면 우연히 만난 사람들끼리도 관계가 깊어질 때가 있다. 게다가 이 배우들은 나의 전작 <백탑지광>을 통해 같은 공간에서 쌓은 공통의 기억이 있다. 그것을 바탕으로 관계를 깊게 다질 수 있는 것이다.
- 알코올 중독자의 리듬이라는 말이 흥미롭다. 알코올 중독자를 주인공으로 세운 계기가 있나.
내가 술을 좋아한다. 그래서 술과 신체의 관계, 리듬이 내겐 익숙하다. (웃음)
- 테크노 리듬으로 편곡된 아리랑에 인물들이 춤추는 신이 화제였다.
혼자 루오무에 머물 때 북한영화 <꽃파는 처녀>의 곡을 바이올린으로 연주하는 노인을 만난 적이 있다. 지금의 젊은 세대는 잘 모르겠지만 한때 중국에서 이 영화가 상당히 유명했다. 그 노인의 연주를 듣다 보니 루오무에서 들려올 만한 음악을 상상하게 됐다. 언어가 잘 통하지 않아도 기저의 감성을 공유할 수 있는 힘이 음악에 있다. 아리랑은 전 세계 사람들이 다 아는 노래나 마찬가지니까 시도해 봐도 좋을 것 같았다. 한국에 있는 누구에게 아리랑을 불러달라고 부탁할까 하다가 내가 아는 영화 제작자인 이준동에게 전화했다. 자기 노래가 영화에 들어갈 수준이 되겠냐길래 괜찮다고 해서 그의 노래를 받았고, 또 다른 동포 가수들의 노래와 함께 넣었다.
- 바이가 반복해 듣는 환청 소리가 있다. 특히 기차 소리가 들려올 때마다 바이는 눈에 띄게 괴로워한다.
환청은 때로 그 사람의 깊은 감정과 연관되어 있다. 중국이 워낙 크고 넓지 않나. 과거 중국에선 기차 소리가 누군가가 멀리 떠난다는 사실을 의미하는 소리였다. 기차 소리는 여전히 중국인의 감정을 깊게 건드리는 부분이 있다. 바이 역시 전 애인을 멀리 떠나보냈다. 그에게 들려오는 기차 소리에도 마찬가지로 상실을 비롯한 감정이 담겨있다.
- 바이가 듣는 한 남자의 목소리는 먼저 떠난 왕의 목소리인가.
그걸 알면 내가 영화를 찍지 않을 것이다. 내게 영화를 찍는다는 건 마지막 답을 향해 가는 게 아니라 여러 가능성을 열어두고 가는 것이다. 나는 항상 이런 생각을 한다. 누군가 사라졌을 때, 그걸 진짜 사라졌다고 할 수 있을까. 우리에겐 그 사람의 흔적이 남는다. 흔적으로서 남은 한 존재는 우리의 내면에 큰 영향을 미친다. 왕이 3년간 머문 루오무엔 그의 흔적이 곳곳에 녹아있었을 것이고, 그 흔적을 쫓는 루오무에게도 무언가가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 왕의 집은 완전히 폐허로 변해있고 그 안엔 ‘술을 끊는 법’에 관해 적힌 책이 놓여있다. 여러 상상을 하게 만드는 장면인데.
왕의 집 로케이션을 설정하기 위해 여러 집을 확인했다. 내가 머물 땐 그곳에서 촬영하면 좋겠다고 여길 정도로 아름다운 철교가 있었는데, 그 철교가 떠내려갈 정도로 루오무에 큰 홍수가 났다. 그로 인해 폐허가 된 한 집을 왕의 공간으로 설정했다. 그 책은 물론 내가 갖다 둔 것인데, 영화에도 이런 대사가 있지 않나. 왕도 술을 좋아하지만 바이를 위해 끊었다고. 헤어진 이후로도 술을 끊는 법에 관한 책을 가져왔다는 건 여전히 바이를 사랑한다는 이야기다. 왕은 황혼이 내릴 적에 자주 혼자 그것을 바라봤다고들 한다. 그런데 그 아름다움을 적어 편지를 보냈다는 건 보고 싶다는 의미이지 않겠나. 영화감독의 일은 결국 시간과 공간을 다루는 것이다. 그 공간, 그 풍경, 그 속의 감정과 관계를 다루는 데에 신경을 많이 썼다.
- 관객들 사이에선 결말에 관한 해석이 분분하다.
실은 나도 관객과 같은 입장이다. 바이가 오르고자 한 어메이산은 우리의 인생과 같다. 우리 모두 교차점에서 헤매고 방황한다. 어떤 곳으로 완전히 간다, 완전히 돌아온다는 건 그저 말에 불과하다. 앞으로 가는 것 같아도 결국 다시 돌아오게 되는 경우도 있다. 바이가 마지막에 던지는 대사는 편집하다 불현듯 떠올라 추가한 것이다.
- 주로 장소에서 작품을 시작하는 편인가.
한 번도 인물과 이야기에서 출발한 적이 없다. 정확히는 모르지만 나를 그곳에 있게 만드는 장소를 만났을 때, 그럴 때 보통 나의 영화가 시작된다.
- 한동안 한국에서 작업하다 최근 중국으로 적을 옮겨 활동 중이다. 중국이란 장소가 새로운 영감을 많이 안겨주나.
난 건강에도 별 관심 없고 재미없게 사는 사람이다. 그런데 이상하게, 우연히 그런 공간들이 내게 나타난다. 그럼 카메라를 들 수밖에 없다. 한국에서와 달리 중국에서는 학생들을 가르치지 않고 영화 작업에만 집중하고 있다. 책임감이 훨씬 덜하다. 언젠가 다시 한국에 다시 돌아가 작업을 할 것이다.
Director’s Box
장률 감독의 근작에서 드러나는 특징은 작품에 계속 같은 배우들을 등장시킨다는 것이다. 장소를 중요시하며 “항상 전작의 잔상이 짙게 남는다”는 장률 감독은 같은 시공간을 기반으로 쌓인 경험의 힘을 믿고, 함께 작업해 온 배우 및 제작진들과 새로운 가능성을 실험 중이다. 현재 마지막 사운드 작업 중인 차기작은 <루오무의 황혼>보다 앞서 촬영된 작품이다. “바이가 민박집에 들어와 리우가 입은 옷이 무척 익숙하다고 말하는데, 현재 후반 작업 중인 차기작을 촬영할 때 입은 의상과 동일하기 때문이다.” <루오무의 황혼>과 그가 곧 발표할 차기작을 나란히 놓고 본다면 장률 감독의 또 다른 의도를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