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 강혜인이 2018년 뮤지컬 <어쩌면 해피엔딩>에 캐스팅된 과정은 운명적이다. 오디션 서류 심사에서 탈락했지만 이대로 포기할 순 없었다. 절박함을 담아 제작사에 메일을 보냈고 마침 합격자 중 한 자리가 비어 기회가 생겼다. 그렇게 인간을 돕기 위해 제작된 헬퍼 봇-6 클레어 역을 따내며 <오! 당신이 잠든 사이> <문스토리>에 이어 무대 활동을 이어갈 수 있었다. 영화 <어쩌면 해피엔딩>은 그의 올곧은 뮤지컬 여정에 산뜻한 옆걸음이 되어준 작품이다. 옆집에 사는 또 다른 헬퍼 봇 올리버(신주협)를 만나 새로운 감정을 배워가는 클레어처럼 강혜인 역시 낯선 장르에 도전하며 자신만의 지평을 넓혀가고 있다.
- <어쩌면 해피엔딩>이 첫 영화라고.
공식적으로는 그렇다. 비공식적으로는 <우아한 밤>이라는 단편영화가 있다. 대학에서 뮤지컬을 전공했는데 영화 전공 친구들이 뮤지컬영화를 찍고 싶다고 찾아와 참여했었다. 이원회 감독님이 처음 출연을 제안해주셨을 땐 죄송하다고 했다. 영화 연기를 잘할 자신이 없어 두려웠다. 그런데 감독님이 예전에 내가 출연한 <어쩌면 해피엔딩> 공연도 재밌게 보셨다며 거듭 나를 설득하셨다. 들을수록 ‘아니 내가 뭐라고…’라는 생각이 커지면서 감독님을 믿기로 했다.
- 영화 작업을 본격적으로 해보니 어떻던가.
끝까지 어려웠다. 실제 촬영 기간이 2주밖에 안돼 워낙 짧기도 했고 무엇보다 영화는 순서대로 가는 경우가 적지 않나. 여건에 따라 후반부 신을 먼저 찍기도 하고. 전체 감정선을 기억하려 애쓰면서 촬영 방식에 적응하고자 했다. 또 영화는 공연과 달리 한번 더 기회가 있는데 똑같이 해도 어떤 컷은 오케이고 또 아니라는 게 호기심이 든 지점이었다.
- 로봇 캐릭터를 표현할 때 클레어만의 특징을 어떻게 살렸는지 궁금하다.
올리버보다는 좀더 개발된 버전이기 때문에 사람 같은 느낌이어야 했다. 달리 말해 둘이 함께 있을 때 올드 앤드 뉴의 차이가 미세하게 드러나야 했다. 그렇지만 여전히 로봇이기에 로봇다운 특징을 가져갔다. 이를테면 말할 때 사전처럼 딱딱하게 고저를 두지 않고 말했다. 뮤지컬 <어쩌면 해피엔딩>을 2018년, 2020년 두번이나 했기에 그 경험을 바탕으로 두었지만 적용할 수 없는 경우도 많았다. 무대에 섰을 때의 감정으로 노래를 불렀는데 모니터를 확인해보니 감정이 좀 과잉돼 있었고 동작이 프레임 안에서는 어색하게 커 보일 때가 있었다. “영화에선 감정을 눈으로 그려도 충분하다”라는 감독님의 조언을 듣고 움직임도 감정도 원래보다 줄이고 부드러운 느낌을 주려고 노력했다.
- 주인에게 배신당한 경험은 클레어가 인간에 대한 불신을 갖게 된 결정적인 사건이다.
클레어가 느끼는 외로움이 무엇일지를 파악하는 게 공연 때부터 큰 숙제였다. 영화에서는 주인과의 전사가 명확하고 클레어가 충분히 상처받을 만한 일이라 그의 마음을 더 헤아릴 수 있었다. 과거 신을 찍을 때 감독님이 최대한 감정을 배제해달라는 디렉션을 주셨다. 그래서 이때 가장 정석적인 로봇 연기를 했다. 그렇지만 올리버와 함께하는 시간이 쌓일수록 감정이 조금씩 드러난다.
- 충전기가 고장난 상태에서 배터리가 떨어져가 수명이 얼마 남지 않은 상황도 클레어를 이루는 중요한 요소다.
최종적으로 영화에선 빠졌지만 <끝까지 끝은 아니야>라는 클레어의 솔로 곡 장면이 있는데, 여기서 그의 삶에 대한 태도가 드러난다. 가사가 이렇다. ‘정말 마지막 순간 그 순간이 찾아오면 조용히 눈감겠지. 그때까지 내가 할 수 있는 건 오직 일분 일초 매 순간 나답게 살아가는 것.’ 얘기한 대로 클레어는 자신의 결말을 알고 있다. 그렇지만 마지막을 생각지 않고 살아 있는 지금 이 순간에 최선을 다하는 게 클레어다. 비록 과거의 아픔이 그를 차갑게 했지만 소중한 존재가 곁에 다시 생겼으니 예전만큼 힘을 내게 된다.
- <생각보다, 생각만큼> 신은 클레어가 올리버에 대한 사랑을 처음 자각하는 중요한 대목이다. 옆에 앉은 올리버를 바라보며 새로운 감정을 거듭 발견하는 클레어의 얼굴에서 강혜인 배우의 섬세한 연기가 빛을 발한다.
중요한 만큼 촬영 전에는 오래 걸릴 거라고 생각했는데 실제로는 굉장히 빨리 끝났다. 목이 심하게 잠겨 걱정도 컸는데 혼자보다 둘이 더 좋다는, 함께인 게 좀 이상하다는 대사에 깊이 빠졌다. 노래방 기계가 있고 위에선 미러볼이 도는 허름한 공간이 주는 묘한 분위기에 취했던 것 같기도 하다. (웃음)
- 무대에 있지 않은 강혜인 배우는 상상이 안 간다. 일상을 어떻게 보내나.
여유 있을 때 하는 나만의 루틴이 있다. 우선 게임장에서 가서 사격하고 밥을 먹는다. 그리고 카페에 가서 일기를 쓰거나 책을 읽은 뒤 한번 더 게임장에 가 총을 쏘고 집에 간다. 게임을 좋아하는 건지 계획적인 건지 잘 모르겠지만 오늘 할 일에 적어둔 것들을 실행한 뒤 체크하면 그 일이 사라지는 게임 같은 앱이 있는데 그게 재미있어서 애용한다. 오늘 아침에도 이 앱에 ‘<씨네21> 촬영’이라고 적어두었다. 인터뷰 끝나면 체크할 거다. (웃음)
- 차분한 모습과 달리 반전적인 면이 있다. 좋아하는 영화 리스트도 꽤나 색다를 것 같다.
그 얘기는 좀 길다. 20대 초반까지만 해도 고어물에 빠져 있었다. 그런데 <마터스: 천국을 보는 눈>이라는 끝판왕 격의 영화를 보고 충격받아 완전히 끊었다. 이후로 새롭게 파고든 장르는 SF다. 우주 배경의 영화를 찾아보다가 요즘은 로맨틱코미디로 노선을 바꿨다. 최근 4DX로 <극장판 진격의 거인 완결편 더 라스트 어택>을 봤는데 그 체험이 정말 재밌었다. (말이 빨라지며) 특히 좋아하는 캐릭터인 조사병단이 입체기동기를 타고 날아다닐 때 나도 그걸 탄 것 같은 느낌이 들면서…. 아, 또 보고 싶다.
- 상반기를 뮤지컬 <천 개의 파랑> <너의 결혼식>을 연달아 하며 꽉 채웠고 지금 하고 있는 <마리퀴리>가 10월까지 이어진다.
올해가 가기 전에 뮤지컬을 한편 더 할 예정이다. 기회가 된다면 영화 작업을 또 해보고 싶다. 이번 작품으로 영화에 대한 경험이 생겼으니 뮤지컬 장르가 아니더라도 용기를 낼 수 있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