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워하는 게 아니라 싫어하는 거야, 나는.” “어떻게 다른데?” “싫어하는 건 생각이 안 나서 좋은 거고, 미워하는 건 생각나서 힘든 거야.” <은중과 상연> 속 은중(김고은)이 툭 내뱉은 말이 빨려 들어가듯 귀에 꽂혔다. 미량의 짜증이 섞인 말투 아래 묻어둔 씁쓸함이 빗자루마냥 까슬거리며 흐리멍텅했던 머릿속을 깨끗이 쓸어버린다. 우리가 갈증에 시달리는 듯 소설, 영화, 드라마를 찾아 헤매는 건 드물게 이런 표현들을 마주하기 때문일 것이다. 자신도 정확히 몰랐던 마음의 형태를 타인의 언어로 마주할 때 차오르는 희열. 약간의 과장을 보태 솔메이트를 만나는 기분이라 해도 좋겠다. 그럴 때마다 사막 한가운데 내팽개쳐진 듯한 고독의 밤을 버텨온 게 혼자가 아니라는 위로를 받는다. 고개를 들어 주변을 둘러보니 여기저기 모닥불이 보인다. 싫은 건 많아도 미워하는 건 서투른 편이다. 이제야 이유를 알 것 같다. 미움에는 에너지가 든다. 어쩌면 미움이란 끝내 채우지 못한 결핍의 또 다른 표정일지도 모르겠다. 반면 싫어하는 건 남은 찌꺼기를 비우고 싶은 망각과 닮았다. 잘 까먹는 게 장점인 나는, 그래서 좀처럼 미워하는 마음까지 견디지 못한다. 결괏값이 비슷해 얼핏 가까워 보였던 두 단어가 실은 자석의 N극, S극처럼 다르다는 걸 깨닫고 나니, 미움 주변의 흩어진 단어들이 새삼 달라 보인다. 원하고 원망하는, 그리움이 사무쳐 미움으로 번지는 애틋한 사연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이토록 변화무쌍한 감정에 명료한 이름표를 달아주는 것만으로도 메말라가던 마음에 생기가 돈다. 감정의 다채로운 꼴을, 말로 정확히 조명하기 전까지는 제대로 몰랐다. 알아도 아는 게 아니었다. 언어란 게 참 오묘하다. 주변 사람 중 언어유희와 단어의 조탁에 둘째가라면 서러울 김중혁 작가가 얼마 전 <미묘한 메모의 묘미>라는 책을 냈다. 보자마자 언젠가는 나올 수밖에 없었던 책이 나왔다고 생각했다. 내용도 내용이지만 발음하기 어려운(그래서 함정에 빠진 것처럼 계속 되뇌게 되는) 제목에 이미 홀렸다. 이를테면 말과 글은 떠도는 마음과 흩어질 생각들이 머무는 집이다. 부지런히 메모하며 단어들을 모으다 보면 좀더 크고 넓고 튼튼한 집을 지을 수 있으리란 생각에 부지런히 메모해봤지만 좀처럼 의미로 이어지지 않았다. 그러다 김중혁 작가의 통찰을 거울 삼아 깨닫는다. 메모는 무언가를 향한 과정이나 수단이 아니라 그 자체로 즐거움일 수 있다는 걸. 부산국제영화제에 와서 <어쩔수가없다>를 봤고, 두 가지 의미에서 좌절했다. 하나는 이 영화를 글로 옮기는 작업이 끝내 실패할 걸 이미 알기 때문이다. 말의 힘을 믿지만 동시에 언어 바깥의 무언가에 늘 매료되어왔고, 그럴 때마다 무기력감이 엄습한다. 가능한 건 그 순간의 감정과 각자의 리액션을 메모하는 것 정도리라. 또 하나는 이 영화는 좋은 의미에서 무척 수다스러웠기에 미묘하게 어긋난 단어들의 성찬 앞에서 일종의 벽을 마주한다. 지금 30회 부산국제영화제의 한가운데에서, 방금 <어쩔수가없다>를 보고 와서, 의식의 흐름대로 메모를 끄적거리는 중이다. 영화로부터 건네받은 이 에너지의 덩어리를 어떤 형태로든 쏟아내지 않고는 버틸 도리가 없다. 이번주와 다음주, 그 유일한 만남의 흔적들을 여러분에게 차례로 건넬 것이다. 모두의 것이자 누구의 것도 아닌, 미묘한 단어의 묘미를 음미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