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는 무엇이 그리도 괴롭고 심드렁했었는지. 단순과격한 입시교육 시스템과 이해 못할 가정사 사이에서 때로는 똑똑한 체, 때로는 어리버리하던 18살의 나는, 야간자습 준비하라는 해질 무렵에 교문을 나서서 동네를 싸돌아다니다 밤이 깊어서야 가방을 챙기러 되돌아오곤 했다. 실내화를 신은 채 함께 손을 잡고 시장에 가기도 하고 학교 담벼락 밑이나 구름다리에 쭈그리고 앉거나 그도 여의치 않으면 교실 베란다 청소함 옆에 숨어서 나와 함께 속살거리던 친구의 이름은 혜강이었다. 은혜로운 강이라는 이름을 나는 바다와 강이라는 뜻의 해강이로 바꿔 부르고 적었다. 그렇게 부르면 마음이 시원해졌던 것 같다.
예민한 아웃사이더였지만 지나치게 착했던 내 친구 ‘해강이’는 수녀가 되겠다고 했다. 반면 나의 에너지는 80년대를 휩쓸었던 좌파 운동권에 흡수되었다. 우리 둘의 갈라진 우정은 20대 중반의 친구가 저세상으로 떠나면서 영원한 이별을 고했다. 가끔씩 꿈속에 찾아와 내 찢겨진 영혼을 조용히 바라보거나 껴안아주곤 하던 친구는, 30대가 되어 이런저런 일에 넋이 나가 있는 요즘의 내게는 찾아오지 않는다.
소녀 시절의 이런 짝패는 어디에나 있다. <판타스틱 소녀백서>의 이니드(도라 버치)와 레베카(스칼렛 조핸슨)도 마찬가지 유형이다. 다만 이니드는 레베카를 비롯한 대부분의 소녀들보다 조금 덜 관습적이고, 그래서 방랑의 진폭이 약간 클 뿐이다. 어린 남자애들의 관심을 끄느라 여념이 없는 계집애들, 커피숍에서 해야만 하는 시답잖은 예절들, 인종주의에 사로잡힌 미국사회, 허접한 것과 예술적인 것에 관한 감상적인 수다 등등, 자신을 둘러싼 거의 모든 것들이 삶의 생기를 잃은 유령의 세계로 다가온다(‘Ghost World’는 이 영화의 원제 및 원작 만화의 제목이기도 하다).
이니드는 자신이 뭘 원하는지 알 수가 없다. 졸업? 대학 진학? 남자친구? 결혼? 당장 일주일 뒤에는? 오늘은? 그러니 매사가 시시껄렁할 수밖에. 공식적인 졸업장을 얻기 위해서는 여름 학기에 미술 수업을 마쳐야 하는데, 선생이 가르치는 미술이라니! 머리를 초록빛으로 물들이고 몸에 쫙 붙는 빨간 치마를 입어볼까? 심심해. 지역신문을 보자. 첫눈에 반한 금발 여인을 찾는다고? 이니드의 얼굴에 일순 생기가 돈다. “레베카! 전화해보지 않을래?” 커피숍에 불려와서 두리번거리며 커다란 우유컵을 쪽쪽 빠는 저 남자 좀 봐. “레베카! 우리 쫓아가보자!”
이니드는 아무런 매력이 없어 보이는 시모어(스티브 부세미)에게서 남과 다른 구석을 금세 발견해낸다. 그리고 그 영혼이 자기와 닮았음을 알아차린다. LP 레코드와 만화를 좋아하며 자기만의 보호벽에 갇힌 듯이 말수 적은 시모어의 모습은 테리 지고프 감독을 똑 닮았고 이 인물을 삽입한 것이 원작 만화와 크게 다른 점이라고 <시카고 선타임스>의 평론가 로저 에버트가 적었다. 아무튼 밥맛 없는 맥신이 새엄마로 들어온다지, 아르바이트는 하룻만에 종쳤지, 레베카와 싸웠지, 그 밤에 이니드가 갈 곳은 시모어의 집뿐인 것 같다. 술에 취한 이니드는 맹랑한 방법으로 시모어를 흔들어놓는다.
`참을 수 없는 18살 존재의 가벼움`
이런 유의 방랑자는 폭력적이고 위해를 가하는 문제아와 구별된다(사실 나의 본심은 문제아란 다양한 종류의 방랑자들이며, 예술가라는 존재 또한 세상에 문제를 일으키러온 사람이라는 생각에 가깝다). 이니드는 이미 설계되어 있는 교육제도나 사회적 관행, 신념 체계 따위가 믿을 만하지 못하다는 것을 직관으로 알아차리는 예민한 소녀다. 그러나 영리한 18살이 할 수 있는 게 무엇이겠는가. 시모어라는 낡은 레코드 수집가이자 현실부적응자인 중년 남자에게 “내가 싫어하는 모든 것들과 거리가 먼 사람이라서 관심이 간다”고 말하는 것은 정확히 이니드답다. <판타스틱 소녀백서>는 그래서 ‘참을 수 없는 18살 존재의 가벼움’이라고 바꿔 불러도 좋겠다.
이런 식으로 세상과 잘 소통하지 못하고 불행해 하다가 끝내 로맨스조차 성공시키지 못하는 캐릭터들은 미국 상업영화 안에 그리 자주 나타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시야를 조금 확대해보면 이니드는 미국문화 전반에 흔히 나타나는 원형적 캐릭터의 한 변주라는 것을 알아차릴 수 있다.
17세기부터 시작된 미국문학의 역사는 19세기 말에 이르러 드디어 미국인의 집단적 꿈과 정체성을 수용할 수 있는 한 영웅적인 인물을 배출하게 된다. <허클베리 핀의 모험>(마크 트웨인, 1884)에 나오는 주인공 소년 허크가 바로 그다. 흑인 소년 짐과 함께 뗏목을 타고 미시시피강을 떠내려가는 허크의 모험담을 기조로 한 이 소설은 미국 서부를 배경으로 자유인의 초상을 창조하면서 기성 질서의 위선과 인습을 풍자했다. 허크의 영향력은 헤밍웨이와 샐린저 등으로 이어지면서 심대하게 지속되었다.
모험과 자유를 의미했던 서부 프론티어가 사라진 20세기에 또 다른 문제적 인물이 나타나 이제는 서부가 아니라 뉴욕 거리를 방황한다. <호밀밭의 파수꾼>(제롬 데이비드 샐린저, 1951)에 나오는 16살의 홀든 콜필드는 이제 막 네 번째 고등학교에서 퇴학을 당하는 참이다. 뉴욕 부르주아 가문 출신에다 키 크고 얼굴에 여드름도 없으니 근심걱정 없을 만한 16살인데, 그의 눈에 포착된 세상이란 어찌 그리 재수없고 위선에 차 있는지. 퇴학 당하는 자신을 시름겨워하는 늙은 선생의 앙상한 가슴팍마저도 견디기 어려워서 실없는 소리만 내뱉다 도망치고 만다. 그는 자신이 통과해야만 하는 성년으로의 길, 주류사회로의 편입을 목전에 두고 끝없이 관찰하고 주절거리고 냉소하고 멈칫거리면서 누군가가 자신을 붙잡아주기를 기다린다.홀든의 꿈은 호밀밭의 절벽 위에 서 있다가 아무 생각없이 내달리는 아이들을 붙잡아주는 것이다. 그는 결국 “뉴욕을 떠나겠다”고 말한다. 홀든에게 뉴욕이란 집, 부모, 기존 질서와 같은 개념이다. 미국인들은 홀든이 떠나간 뉴욕을 기독교적인 순결함과 자본주의의 추악함이 공존하는 미국사회 전체의 축소판으로 받아들였다.
허크의 영향력 밑에서 탄생한 홀든은 “세계 문학 최초의 팝스타”라는 평가를 받을 만큼 또 하나의 신화적 영웅이 되었다. 허크와 홀든은 일상과 문명, 어른의 세계 등 그 ‘빌어먹을’ 허위로부터 이탈해서 자유롭고 꾸밈없는 세계를 꿈꾼다는 점에서 21세기의 청소년들에게도 여전히 영웅이다. “<호밀밭의 파수꾼>이 없었더라면 나는 시시한 소녀로 머물러 있었을 것”이라고 고백한 사람은 위노나 라이더이고, 조니 뎁은 “나는 할리우드로 가서 음악을 하려다가 <호밀밭의 파수꾼>을 읽었다. 그뒤로 모든 것이 달라졌다. 시작이었다”라고 말했다.
그리고 여기 <환타스틱 소녀백서>라는 길 떠나는 십대의 성장영화 속에서 이니드로 나타났다. 이니드 역의 도라 버치가 <아메리칸 뷰티>(샘 멘데스, 1999)에서 맡았던 역할 역시 아버지에게 냉소적인 십대 소녀라는 점에서 통하는 구석이 있다. 이니드는 남부 캘리포니아에 있는 정체 모를 도시의 거리를 끝없이 걸어다님으로써, 자신이 문명의 변방을 헤매던 문제적 인물들의 후예라는 사실을 계속 상기시킨다. 다만 주인공이 여성으로 바뀌었고, 여성간의 강력한 유대관계를 표방한다는 점에서 21세기 버전답다.
늙은 ‘비트’와 중늙은이 ‘펑크’
허크와 홀든, 이니드처럼 중심과 주류를 부정하고 스스로를 소외시킴으로써 문명의 핵심에 문제를 제기하려는 태도는 사실 미국의 상업영화 안에서 강력한 전통을 이루고 있다. 이른바 무법자형 영웅(outlaw hero)이 그것이다. 어린아이 같은 순진한 심성을 유지하면서 성인사회와 문명으로의 진입을 회피하고 모험과 자유, 그에 따르는 위험과 고독을 감수하는 캐릭터는 서부영화 총잡이의 기본 설정이다.
이런 인물들 속에서 미국인들은 자본주의사회와 문명에 대한 자신들의 혼란을 표출하는 것 같다. 좌파적인 상상력이 취약한 미국사회에서 홀든이나 이니드처럼 순수한 시선으로 자기가 속한 곳을 직시하다가 그 사회를 등지고 떠나는 방랑자들은 다분히 진보적인 색채를 띤다. 문제제기형 인물들이기 때문이다. 이런 인물들은 끊임없이 미국인들 사이에서 숭배된다. <호밀밭의 파수꾼>이 아직도 매년 30만부씩 팔려나간다거나, 사이먼과 가펑클의 팝음악 혹은 우디 앨런의 영화 속에 나오는 뉴요커들이 홀든적 세계의 다양한 변형이라는 사실이 그 예다. 미국인들도 자기 사회에 대한 이데올로기적 불안을 느끼나보다.
그러나 홀든이나 이니드의 세계 안에는 정치적이고 사회적인 이슈란 없다. 모든 것은 개인적인 동기로 변환되며 더구나 성인이 되고 나면 미국사회가 조정 가능한 가치체계 안으로 흡수되어버린다. 이 점에 관한 한 미국영화는 이데올로기의 조정자로서의 역할을 매우 유능하게 수행해왔다.
<판타스틱 소녀백서> 안에 나타나는 두명의 인물들은 흥미로운 시사를 던져준다. 하나는 “운행 안 됨”(Not in service)이라는 낙서가 쓰여 있는 버스정류장 벤치에서 비가 오나 해가 뜨나 자리를 지키고 앉아 있는 노인이고, 다른 하나는 78회전 하는 LP 레코드에 강박적으로 집착하는 시모어다. 영화의 맥락상 이들은 1950년대의 비트 세대와 1970년대의 펑크 룩을 상기시킨다. 이니드가 호감을 느끼는 존재들은 바로 이들 세대인데, 늙은 ‘비트’와 중늙은이 ‘펑크’는 버스정류장과 골방을 지킬 뿐이다. 그들이 형상화하는 진보의 지평은 한계가 있어 보인다.
어쨌거나, 빨간 원피스를 입고 동그란 가방을 들고 입술을 빨갛게 칠한 채 버스에 올라탄 이니드의 앞날에 축복을! 그리고 나의 십대와 지금 십대로 살고 있는 이들에게 사랑을!김소희/ 영화평론가 cwgod@hanmail.net▶ 미국문화사의 맥락에서 본 <판타스틱 소녀백서>
▶ 원작만화와 비교해서 본 <판타스틱 소녀백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