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년 동안 연락 한번 한 적 없던 친구에게서 다짜고짜 연락이 온다면 어떤 기분일까. 심지어 그가 당신에게 조력 사망의 여정을 함께해달라고 부탁한다면. 엄청난 이야기를 꺼낸 당사자는 도리어 무덤덤하고 껄끄러운 제안을 들은 당신만 어안이 벙벙하다면. 다소 당혹스럽고 난처한 상상은 <은중과 상연>의 시작이자 끝이다. 이제 막 신도시가 들어설 무렵 새 아파트에 이사 온 상연(박지현)은 은중(김고은)이 다니는 학교로 전학 온다. 아파트 입주 청소를 하는 엄마를 따라 구경한 아파트는, 그러니까 장엄하고 빛났다. 그런 곳에 사는 아이는 오직 행복하기만 할 거라고, 은중은 생각했다. 둘의 관계는 기이하다. 자주 다퉜고, 어쩌다 오해를 풀었다. 함께하는 시간이 늘어나면서 자연스레 가까워졌다. 서로 단짝이라고 생각해본 적은 없지만 많은 주변인이 이들을 짝꿍처럼 여겼다. 당연하고 일상적인 존재. 언제나 곁에 있을 거라 예상 가능한 사람. 은중과 상연은 거창한 ‘베스트 프렌드’보다는 이쪽에 더 가까웠다. 그러다 둘에게도 갑작스러운 작별이 찾아온다. 두 소녀에게 그늘이 되어주었던 상연의 오빠 상학(김재원)이 뒷산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은 뒤부터다. 갑작스러운 빈자리를 충분히 애도할 자신이 없던 이들은 궁색한 회피 끝에 서먹한 사이를 택한다.
15부작으로 구성된 <은중과 상연>은 널뛰는 사춘기 시절부터 조력 사망 여정을 시작하는 40대까지 복합적 감정을 다루기에 넉넉한 시간을 준다. 최근 6~8부작이 많았던 시리즈 시장의 경향을 생각하면 <은중과 상연>은 구조적으로 섬세하고 촘촘한 감정을 보여주기 적합하다. 특히 완전히 정반대에 선 ‘오해와 이해’라는 키워드가 작품의 중심축이 되는 만큼 시청자가 두 인물의 개별적인 역사에 가까워질 수 있는 근간이 되기도 한다. 따라서 <은중과 상연>은 세상의 속도가 너무 빠르게 느껴졌던 이들에게 선물처럼 다가온다. 메신저보다 편지, 스트리밍 뮤직보다는 손수 고른 MP3 리스트, AI 이미지 생성보다 투박한 펜 드로잉…. 조금 느려도 처음부터 끝까지 모든 과정을 기억할 수 있는 것들. 가을볕을 비추기 시작한 9월이라면 더더욱 그리워지는 것들이다. 한마디로 단언하기 어려운 은중과 상연의 관계는 어떤 우정의 일대기를 그릴까. 이 이야기를 통해 우리는 또 어떤 새로운 삶의 방식을 상상할 수 있게 될까. 두 친구가 간직한 사랑을 알고 있는 이들을 만났다. 김고은과 박지현, 두 배우의 목소리에 긴 시간이 스며 있었다.
*이어지는 글에서 배우 김고은, 박지현과의 인터뷰가 계속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