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큐멘터리의 거장으로 알려진 프레더릭 와이즈먼은 개인적으로도 꽤 기이한 이력을 지닌 인물이다. 1950년대에 로스쿨을 졸업한 그는 미 육군 생활을 거쳐, 보스턴대학교의 법의학 교수를 역임했다. 이러한 경력은 그를 첫 장편다큐멘터리인 <티티컷 풍자극>의 장소, 정신병원으로 이끈 계기였다. 이후 60여년간 그는 영화를 만들고 있다. 그의 세계를 조금 더 이해하기 위해서 와이즈먼의 인상적인 말들을 그간의 인터뷰에서 발췌·요약·편집하여 그러모았다. 그가 무척이나 일관된 태도로 영화를 만들고 세상을 대해왔음을 눈치챌 수 있다.
별점 체계를 도입한, 자기만의 편집
“촬영을 마치면 모든 촬영본을 살펴본다. 어쩔 땐 촬영한 순서대로 보고, 때론 기억에 남은 시퀀스부터 보기도 한다. 편집을 시작하면 정맥주사를 맞아야 할 정도로 의자에만 앉아 다른 모든 것은 배제한다. 편집 중엔 작품을 아무에게도 보여주지 않고, 혼자서 판단한다. 촬영본을 모두 검토하며 메모하는 데에 4~6주가 걸린다. 각 시퀀스엔 미슐랭 가이드처럼 별 0개부터 3개까지의 점수를 매긴다. 첫 번째 편집이 끝나면 40~50%의 촬영본이 남고, 그 안에서 사용할 시퀀스를 선택하고 편집하는 데 6개월쯤 걸린다. 전체 편집 과정은 대개 1년쯤 걸린다. 영화의 전반적 구조는 미리 짜여 있지 않다. 시퀀스를 편집하면서 순서를 배열하고 어떤 의미를 창출할지 고민한다. 시퀀스가 어떻게 이어지지, 이를테면 32번째 시퀀스와 4번째 시퀀스가 어떻게 연관되는지까지의 모든 편집적 당위를 스스로 설명하지 못한다면 영화를 완성할 수 없다. 이 편집 과정은 영화뿐 아니라 내 삶의 다른 측면들까지도 새롭게 바라보고, 파괴하도록 만든다.” <THE PARIS REVIEW>(2018), <FilmInt.nu>(2015)
“영화란 결국 연출자의 모든 선택이 집약된 조작의 결과물이다.” <IDA>(1991)
형식미를 정하는 방식과 유연함
“각 작품의 형식은 어느 정도 영화의 주제에 따라 결정된다. <임사>와 <센트럴 파크>의 형식을 다를 수밖에 없다. <센트럴 파크>는 대사에 거의 의존하지 않는 작품이고 여러 숏의 연결을 통해 특정한 이야기를 관객이 수용하도록 암시하는 방식에 가깝다. 반면에 <임사>는 완전히 다른 경험을 제공해야 했다. 3~4 동안 중환자실의 사람들을 뒤쫓는 일은 센트럴파크에 있는 시민들의 모습을 알아가는 것과 다를 수밖에 없으니까. 어느 쪽이 더 좋거나 완벽하다고 말하긴 어려우나 작품마다 분명한 차이는 존재한다. (중략) <임사>가 6시간짜리 영화가 될 줄은 몰랐다. 1~2시간이면 충분할 줄 알았다. 그런데 한 환자의 가족과 시간을 보내며 바라본 결과, 반복되는 수많은 대화들이 여러 채널로 울려 퍼지는 현상을 목격했다. 이를테면 의사가 가족과 치료 중단에 관해 이야기하면 의사는 간호사에게 그것을 설명하고, 가족은 비슷한 상황의 다른 가족에게 논의하고, 그 다른 가족은 다시 가족구성원들과 논의하고…. 간호사 회의에서 이 안건이 등장하면, 의사의 회진에서 다시 똑같은 내용이 반복된다. 편집을 꽤 진행하며 이 사실을 깨우치자 비로소 <임사>가 긴 영화가 되리라 깨달았다. 특정 장소와 커뮤니티에서 일어나는 일을 좇고 채록하는 탐구의 과정은 대개 판단력, 운, 그리고 본능의 조합이다.” <IDA>(1991), <FilmInt.nu>(2015)
추상보단 장소를
“영화를 추상적인 아이디어에서부터 시작하는 경우는 없다. 영화의 소재로 택한 어느 장소에 영화가 존재할 수 있겠다는 마음이 들면 작업이 시작된다. 물론 그곳에서 펼쳐질 주제와 영화의 관점이 무엇일진 미지수다. 특정 장소에서 촬영 허가를 받으면 하루 정도 그곳에 머문 뒤에 바로 촬영을 시작한다. 거기서 일어나는 어떤 일도 놓치고 싶지 않다. 만약 촬영 준비를 해가지 않아서 좋은 장면을 놓쳤다면 화가 나서 안 그래도 없는 머리카락을 쥐어뜯을 거다.” <BROOKLYN RAIL>(2015), <The Paris Review>(2018), <IndieWire>(2025)
“그러니 내 영화를 두고 ‘아, 이 작품엔 5~6가지의 주제가 담겨 있는데 그중 하나는 바로 사람과 권위의 관계입니다’라는 말을 하고 싶진 않다. 물론 국가기관과 개인의 관계를 파고드는 영화를 많이 만들긴 했지만, 저런 추상적이고 관념적인 시선으로 영화를 만들게 되면 나중에 가서 아무것도 남지 않게 된다. (중략) 다큐멘터리는 사람들이 사회를 대하는 수많은 정보처 중 하나일 뿐, 관객의 관념이나 관점을 완전히 바꾸기는 어렵다. 외려 다큐멘터리의 능력은 불확실하고 은밀한 방식으로 작동한다. 영화든 다른 예술 분야든, 한명의 창작자가 모든 사람에게 확정적인 영향을 줄 순 없다.” <IDA>(1991)
오랜 작업의 비결은…
2018년 <씨네21>이 토론토국제영화제에서 프레더릭 와이즈먼을 만났을 때, “디지털 시대가 온 후 한국에도 전보다 많은 젊은 다큐멘터리 감독이 활동하고 있으나 배급은 여전히 어렵다. 그들에게 전할 말이 있나”라는 질문에 감독은 “돈 많은 사람과 결혼해라”라고 답했다. 노장의 이 태도는 꽤 확고한 편이다. 2014년 10월 <뉴욕타임스 매거진>에서 후배 감독들에게 남긴 그의 말은 “부자와 결혼해라” (Marry rich)였고, 2015년 <브루클린 레일>에선 이 답변을 변주하여 “당신과 결혼할 부자를 사랑하도록 하라”라는 말까지 남겼다. 다만 왕성한 활동을 이어온 그의 신작을 볼 수 있을진 불확실하다. “지난 1년 동안 이곳저곳이 아팠고 기력이 없는 상태다. 긴 촬영과 편집에 쓸 힘이 부족하다. 95살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할 것 같다.” <IndieWire>(20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