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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20년 만에 다시 본 <티티컷 풍자극> - 하지 않고, 넣지 않고, 쓰지 않는 시네마
이원우 2025-09-19

<티티컷 풍자극>

올해 DMZ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를 시작으로 프레더릭 와이즈먼의 전작을 국내에서 볼 수 있다는 사실은 놀랍고 당연하다. 전작이라는 규모가 놀랍고, ‘프레더릭 와이즈먼’이라는 이름은 당연하다. 이 이름은 다큐멘터리의 역사와 형식을 소개할 때 빠질 수 없는 명제이기 때문이다.

고백하자면 20년 전에 영화를 만드는 것이 나의 정체성이 될 것이라는 일을 상상하지 못하고 ‘다큐멘터리 입문’이라는 수업을 청강했을 때, 그가 만든 다큐멘터리를 처음 봤다. 그의 대표작 중 하나인 <티티컷 풍자극>을 조는 학생들 사이에서 외롭게 보았고, 20년 동안 보지 않았다. 내가 그 수업의 교수님처럼 다큐멘터리를 정성스럽게 가르치는 사람이었다면 매해 다시 봤을 영화인데, 나에게 그런 책임과 행운은 따라주지 않아왔다. 20년의 기억에 의지해 프레더릭 와이즈먼의 영화를 보았고, 기억하고, 안다고 생각하고 살았다. 봉인된 기억을 풀고 다시 <티티컷 풍자극>을 마주했을 때, 당혹스러웠고 짜릿했다. 빈약하고 납작한 기억 너머 생생한 화면에 예상 못한 감정이 휘몰아쳤다. 20여년 동안 지녀온 나의 감상과 기억을 먼저 비평하게 되었다. 내가 취사선택한 기억과 감상이 마땅한지, 어떻게, 어쩌다 그런 맥락을 가졌는지가 흥미로웠다.

유쾌한 영화는 아니다. 희망과 해소, 당연히 나아갈 미래가 존재하지도 않는다. 그렇다고 감정을 증폭해 감정선을 부추기고 건드리지 않는다. 흑백 화면 속 인물들과 화면을 바라보는 이, 모두가 상황을 바꾸지 못하는 무력함을 공유하고 그럼에도 주어진 시간을 견뎌야 하는 동질감을 가지는 영화. 영화를 다시 본 나의 충격은 내가 기억하는 <티티컷 풍자극>에서 유일하게 기억해온 장면이 ‘관급식’이었다는 것이다. 코를 통해 호스 줄이 길게 들어간 걸죽한 수프가 의지와 상관없이 꾸역꾸역 어쩌면 졸졸졸 들어가는 것을 내적 몸부림을 치며 보았던 기억이 생생했다. 그 장면을 보았기에 수면실 분위기의 교실에서 졸 수가 없었다. 그런데 그것만 기억에 남았다. 그리고 다시 본 영화는 꽤 다른 충격과 강한 이미지들의 총체였다.

어렴풋이 다큐멘터리의 배경 장소를 범죄자들의 정신병원이자 교도소 형태로 기억했으나 어떤 형태의 범죄들, 어떤 수준의 정신질환이었는지는 신경 쓰지 않았다. 2005년에 볼 때에도 이것은 너무나 오래된 다큐멘터리였다. 과거를 비판함은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일까? 유물과 유적으로 고정된 과거의 관습과 행태는 불변의 속성으로 묵인하고, 용납하게 된다. 벌어진 일이고, 과거의 사람들에게 당연했을 것이고, 그들의 시대에는 감내할 수밖에 없는 일이라고 공을 넘겨버린다. 비판과 힘은 현재에 집중하는 것이 더 마땅한 것 같기도 하다. 그 편이 심신의 안정을 준다. 내가 존재하지도 않았던 시대의 죄책감까지는 사양하고 싶은 마음이 들 수밖에 없다.

그런데 당신이 그 현장에 있다면, 지금 바로. 당신의 눈앞에서 벌어진다면, 부당하고 비인권적인 일들이 너무나 자연스럽게 생생하게 벌진다면. 이것은 과거의 일인가. ‘과거를 현재로, 먼 곳을 내가 있는 곳으로 만들어주는 마법이 다큐멘터리에서 가능하다’라는 것을 이 오래된 흑백필름에서 다시금 확인했다. 지금은 초소형 경량의 카메라들(심지어 녹음까지 동시에 되는)이 많지만, 당시에 필름으로 촬영하는 카메라의 사이즈는 무엇이 되었든 존재감이 있을 수밖에 없었는데, 화면 속 인물들은 카메라를 의식하지 않는다. 내레이션이 있다면 이것은 누군가가 친절하게 정리한 내용이자 시점이며 목소리이자 창작물이라는 것을 인지할 텐데 아무도 이 시공간에 대한 설명을 해주지 않는다. 나를(관객을) 신경 쓰지 않는 인물들은 살아 있다. 그곳에서 카메라는 사람의 눈으로 곳곳을 보고 가깝게 바짝 붙어 응시한다. 피하거나 의식하지 않고 행동하는 이들 옆에서 무존재로 존재하는 관찰자는 곧 <티티컷 풍자극>을 보는 모두의 역할이 된다. 들어야 하고 보아야 한다. 대부분이 보고 싶거나 궁금하지 않았던 장면일 수도 있고, 이제 보는 것은 견디는 행위가 된다. 정보가 생략된 화면이 강렬한 체험으로 환원되는 것은 시네마의 마법인 것인지 몰입의 순간이 당혹스럽고 의아한데 나는 시공간을 이동해 있다.

짧지 않은 기간 동안 촬영한 필름 푸티지 중 와이즈먼은 어떤 기준으로 자르고 붙였을까. 영화에 대한 열정과 들뜬 호기심이 가득했던 20년 전에는 감독의 편집 기준까지는 궁금하지 않았다. 분명 많은 대화를 촬영했을 텐데, 왜 그는 저 인터뷰를 선택했을까. ‘인터뷰’는 다큐멘터리에서 매우 중요하고 유효한 방법이다. 와이즈먼은 인터뷰를 하지 않았다. 하지만 환자와 의사가 나누는 대화는 완벽한 다큐멘터리의 ‘인터뷰’ 역할을 한다. 심지어 적나라한 위계가 정해져 있고, 서사가 있는 인터뷰. 그 내용은 너무나 충격적이다. 11살 여아를 강간한 이는 본인의 딸도 성폭행했다고 말한다. 그가 이 시설에 온 배경일 것이다. 의사는 담배를 피우며 “동성애 경험이 있냐?”라고 질문한다. 환자는 자신이 당한 성적 학대를 설명하지만, 의사는 그의 피해 사실을 동성애로 퉁쳐버린다. 대화를 주고받는 모두가 끔찍한 인물들이다. 찍힌 인터뷰에 기대어 그 시설에 있는 환자이자 수감자들이 동류의 강력범죄 가해자들로 인식된다. 아동 대상 성범죄자. 친족 성범죄자들을 나는 같은 인간으로 대하고 바라보고 연민을 가질 수 있는가. 나는 20년 동안 어떻게 이 충격적이고 자극적인 정보를 기억에서 누락할 수 있었는지 혼돈이 밀려왔다.

인권이란 보편적이고 모두에게 마땅한 권리이다. 누구나 살아가기 위한 최소의 조건이 있고 이에 맞게 삶의 질이 개선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극악한 범죄를 저지른 이에게는 그에게 줄 수 있는 가장 강력한 형벌을 상상한다. 그러지 못함에 아쉽고 때로는 화가 난다. 교도소를 연상할 때, 그곳은 벌을 받는 곳이고, 수감자의 불편한 환경은 자업자득이라는 논리에 다다른다. 권선징악은 인류의 가장 오랜 서사의 골격이자 주제이다. 범죄자가 쾌적한 곳에서 두발 뻗고 편안히 자는 것, 안락하고 안전하게 지내는 것을 보고 싶지는 않다. 그럼에도 매사추세츠 브리지워터교정기관의 여러 조건과 환경은 그 열악함을 알아갈수록, 감상의 시간이 오래될수록, 수감자의 환경이 부당하고 가혹하게 느껴진다. 내레이션과 직접적 인터뷰 없이, 특정한 주인공 없이 가능하다. 발가벗은 사내들의 굴욕이 전혀 통쾌하지 않다. 그들이 한때 꿈이 있었다거나 그들을 기다리는 가족이 있다거나 하는 감상적 장치가 전혀 없음에도, 저렇게 취급하는 것은 징악도 아니고 형벌도 아니다, 저 상황은 마땅한 상황이 아니다라는 생각이 든다. 이것은 감독의 의도일까?

특정 인물을 향한 비판, 비리의 폭로, 피해자의 증언, 가해자의 고백 없이 <티티컷 풍자극>은 관찰의 기록만으로 미국 전체 교정시설, 정신병원 운영에 실질적인 영향을 미쳤다. 보여줌으로써 혹은 보여주지 못함으로써(초상권, 촬영 동의 등의 문제 제기로 미국 내 상영이 오랫동안 불허되었다) 많은 변화를 일으켰다. 그리고 다큐멘터리를 만드는 이들에게도 그의 작품은 영향을 미쳤다. 영리하고 무모한 이 영화는 ‘다이렉트 시네마’, 거장 다큐멘터리스트 프레더릭 와이즈먼을 소개하는 입문작이 되었고, 20년 만에 다시 본 나에게도 유효한 힘을 느끼게 해주었다.

오래된 것이 낡은 것은 아니다. 흑백필름의 생략된 색과 디테일을 압도하는 응시하는 카메라의 존재가 동시에 대상이 인식하지 않아 무존재가 되는 것. 대상을 향해 갖게 되는 감정을 도울 수 있었지만 생략된 설명. 여전히 영화마다 고통받으며 고민하는 모든 창작자에게도 추천하고 싶다. 보았던 분이라도. 아마 여러 이유로 질투가 날지도 모른다. 질투의 힘이라도 빌려 더 다양하고 새로운 다큐멘터리들을 보고 싶은 관객으로의 욕망으로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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