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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우리들의 인문학 - 거장의 궤적과 DMZ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 전작전에 관해

<복지>

프레더릭 와이즈먼의 167분 길이의 영화 <복지> (1975)는 강렬한 몽타주로 시작한다. 복지 기관의 돌봄이 필요한 하층민, 취약계층 사람들의 ‘얼굴’을 찍은 포토그램 몽타주는 영화에 대한 초기 인상을 세팅한다. 자신의 영화에서 미국 사회와 그 기능을, 국가기관으로 묘사하거나 국가기관에 반영하는 방식으로 조명해온 와이즈먼의 경향을 반복하는 <복지>의 시각 시스템은 <법과 질서>(1969), <영장류>(1974), <내셔널 갤러리>(2014)에서도 동일한 방식으로 확인된다. <법과 질서>의 범죄자들, <영장류>의 과학자들, <내셔널 갤러리>의 그림 조각 몽타주는 준법과 평등, 민주주의, 인권을 위해 이상적으로 설계된 기관의 설립 이념과 그것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의 이미지를 대조하기 위해 기능한다. 인간의 얼굴에 초점을 두었다고는 하나 와이즈먼의 냉정한 카메라는 인물 묘사에 몰두하지 않고 복합적인 시각 시스템을 구성하여 국가기관의 매너리즘을 꿰뚫는다.

<센트럴 파크>(1990), <애스펀>(1991), <벨파스트, 마인>(1999), <잭슨 하이츠에서>(2015), <몬로비아, 인디애나>(2018)로 이어지는 도시 다큐멘터리의 계열은 더 넓은 시야를 제공한다. 와이즈먼의 특징을 고루 갖춘 이 영화들은 공동체가 제도에 어떻게 대처하는지를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그 반대 지점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흥미롭다. 이 영화들에서 와이즈먼의 스타일은 서사의 맥락 안에서만 기능하지 않는다. 도시에 관한 서사는 전통적인 작법에 따라 조직되지 않고, 시적인 감흥을 자아내는 장면 연출과 함께, 모자이크처럼 구성되어 있다. 도시 교향악 장르의 최고 걸작인 <벨파스트, 마인>의 도입부는 뉴잉글랜드 항구도시의 정경을, 세르게이 예이젠시테인의 그것에 필적할 만한 시적인 몽타주를 통해 제시한다. 도시의 이모저모를 꼼꼼하고 성실하게 그러모은 조각들로 엮어가는 모자이크 구성 과정에서 편집은 시간 관계를 확립하는 데 별로 기여하지 못한다. 도시 교향악 다큐멘터리의 전형은 예외 없이 더 큰 건축적 전체로 확장하는 것이지만, 와이즈먼의 경우 ‘전체’라는 개념이 존재하지 않는다. 조각은 그 자체로 독립적일 뿐 아니라, 제도가 더 큰 사회적 맥락과 연관되어 있다는 사실을 명시적으로 드러내지 않는다. 이것은 그가 쌓아올린 45편의 영화 모두에 정확히 적용될 수 있는 말이다. 각각의 영화는 전체 작품 세계로 구성된 모자이크의 한면이지만 전체와 모자이크 조각들이 유기적으로 상호작용하고 있다는 증거를 찾을 수 없다. 전체와 부분의 관계 또는 그들 사이의 이러한 공백은 60년 전 범죄적인 정신병자들을 위한 시설(<티티컷 풍자극>)에 있었던 와이즈먼의 카메라가 프랑스 고급문화의 또 다른 보루인 최고급 레스토랑(<메뉴의 즐거움-트와그로 가족>(2023))의 비밀을 탐험하고 있다는 사실과도 연결할 수 있을 것이다.

프레더릭 와이즈먼 전작전을 펼치며

DMZ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가 기획, 발의하고 전국의 시네마테크, 예술영화관이 참여하는 ‘프레더릭 와이즈먼 전작 순회 회고전’은 미스터리한 와이즈먼의 모자이크를 위한 기초 그림을 제공한다. 취지에 공감하고 함께하기로 한 시네마테크, 예술영화관들 덕분에 위대한 영화감독의 노작들을 여러 차례에 걸쳐 상영할 수 있게 되었다. 358분으로 와이즈먼의 모든 영화 중 가장 긴 호흡을 가진 영화 <임사>(1989)도 세번이나 상영된다. 이보다 앞서 와이즈먼 감독의 영화를 관리하는 지포라필름을 주축으로 하여 미국 의회도서관, 하버드 필름 아카이브, 듀아트 필름 랩, 그리고 골드크레스트 포스트 프로덕션이 공동으로 참여한 복원 프로젝트가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2024년 완결된 이 대장정은 필름 상태로 보존되어온 와이즈먼의 영화 33편을, 와이즈먼 감독의 꼼꼼한 검토, 승인을 거쳐 4K 디지털로 복원해냈다. 전례가 없는 방식으로 견결한 세계를 이룬 작가의 특이점을 탐구할 수 있는 길이 열린 것이다.

축제 큐레이션의 관점에서 와이즈먼 전작전은 ‘어떤 작가는 그의 모든 작품을 보는 것만이 작가 세계의 온전한 이해에 도달하는 길을 열어준다’라는 믿음에 기초해 있고, 세계 영화사에서 비할 데 없는 작품의 총체를 기념하는 프로그래밍의 실험이다. 와이즈먼의 작품은 미국과 프랑스를 횡단하는 여정이자, 세기를 가로지르는 인간의 인류학이고, 방대한 연대기를 넘어 영화들간의 대화를 이끌어내는 작가성의 증거이다. 독특한 소재 선택으로, 사회적 상호작용의 장소, 그리고 서사의 장소로서 개인에 대한 고정관념에 도전한다는 점에서 와이즈먼의 영화는 시네마베리테의 접근과 동류로 취급되었다. 시각 양식의 차원에서는 고전적 연속성 편집과 유사한 효과를 내는 시각 시스템으로 설명되기도 한다. 그러나 와이즈먼 영화의 구성적 면모는 조작되지 않은 현실에 대한 믿음에 기초한 시네마베리테의 이상과 관련이 없다. 그는 인간적인 돌봄을 제공하려는 곳과 기관 운영의 인간성 부재 사이의 부조화를 공감적으로 관찰하여 그 안에서 인간 행동의 복잡하고 모순되는 본질을 끌어내는 데 집중해왔다. 영화의 전반적 구조는 완결성, 통시적 궤적, 그리고 등장인물의 활동을 통해 퍼즐이나 미스터리를 제기하고 최종적으로 해결하는 전개를 따르지 않는다. 있는 그대로의 삶을 함부로 다루지 않는 신중함을 유지하면서도 중립적이거나 객관적인 스타일에 안주하기보다 그 자신의 감각에 따라 기관의 드라마를 조직한다. 그가 선택한 인물, 만남의 유형, 카메라앵글과 거리, 극단적 클로즈업은 스타일의 레퍼토리 내에서 명백하게 표현적인 지표이다.

프레더릭 와이즈먼의 누적된 영화들에는 아이디어와 스타일을 이상적으로 결합한 장면들이 널려 있다. 복잡한 사회문제를 조명하고 우리가 사는 세상에 대해 의구심을 표하는 염세주의자의 목소리도 있다. 기관과의 접촉은 어떻게 형성되는가? 권위는 어떻게 생겨나고, 어떻게 행사되는가? 시민은 경찰에게 어떻게 행동하는가? 의사나 교사와 어떻게 소통하는가? 마을에서 함께 사는 것은 어떻게 이루어지는가? 미술관과 도서관의 기능은 무엇인가? 따위도 있다. 다시 <복지>의 한 장면으로 돌아가보자. 이 영화를 복지 기관의 작동에 관한 관찰기가 아니라 위대한 시로 만드는 것은 마지막 장면이다. 미치기 직전으로 보이는 깡마른 구직자는 흡사 사뮈엘 베케트의 부조리 연극을 떠올리게 하는 절망적인 톤으로 미국의 붕괴에 대해 독백한다. “고도의 이야기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지? 그는 오지 않았어. 내가 기다리고 있는 건 바로 그거야. 절대 오지 않을 그 무언가.” 그의 읊조림은 광기 속에서도 지혜를 찾아내는 날카로운 관찰의 산물이며 와이즈먼의 영화가 르포보다는 드라마 또는 오페라에 가깝다는 것을 확인시켜주는 증거이다. 이 남자는 와이즈먼의 배우이고, <복지>는 복지 기관에 관한 영화가 아니라, 복지 사무실에 갇힌 사람들의 초상에 관한 것이다. 프롤로그에서 보았던 인간의 얼굴과 연결된 에필로그는 엄격한 일관성의 산물이며 사전에 계획된 것처럼 보이는 차이와 변주의 앙상블이다. 이런 빛나는 순간들이 사회적 신체에 피가 돌게 하는 핏줄의 역할을 하는 공익 기관들을 예술적 감각으로 다룬 냉정한 인류학자의 면모를 그의 모든 영화를 통해 확인해야 하는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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