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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이상하지만 아름다운, 나만의 균형 - <살인자 리포트> 배우 조여정
남선우 사진 백종헌 2025-09-18

- 올여름 <좀비딸>이 550만 관객을 기록한 직후 <살인자 리포트>가 개봉한다. 배우로서 어떤 기분인가.

<히든페이스> 촬영 후 <살인자 리포트>를 찍었고, 그다음 해에 <좀비딸>을 만났다. 매년 영화를 공개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지금의 영화시장에서 귀한 일이다. 더군다나 여배우가 이렇게 주체적인 캐릭터를 맡는 것도, 내 나이에는 쉽지 않다는 걸 안다. 신기하고, 감사히 여기고 있다.

- <좀비딸>의 연화는 극 중반에 등장해 이야기에 긴장과 활력을 불어넣는 존재다. 이 인물을 받아들이면서 그 비중보다 눈여겨본 매력이 있었을 듯하다.

예전부터 이런 가족 이야기, 휴먼드라마를 기다려왔다. 마침 <히든페이스>와 <살인자 리포트>라는 어려운 작품을 연달아 끝낸 상태여서 더 반가웠다. 게다가 내가 좋아하는 배우들이 모였다고 하니 더 즐거운 작업이 될 것만 같았다. (조)정석이랑은 오랜 친구인데, 배우로서도 대단하다고 생각해온 사람이다. 어렸을 때 뮤지컬 <그리스>에서 만났지만 함께하는 장면이 거의 없었다. 그래서 이 배우가 현장에서 어떨지 너무 궁금했다. (이)정은 언니와도 <기생충> 이후 한번 더 작품을 함께하고 싶은 마음이 있었다. 그들과 공연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 내 비중은 전혀 중요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좀비딸>

- 반면 <살인자 리포트>에서 선주는 무대를 거의 떠나지 않는다. 선주는 관객을 쫄깃한 대화의 현장으로 데려가는 화자이자 자기만의 결말을 작성해야 하는 작가이기도 하다. 시나리오의 첫인상은 어땠나.

한국영화에서 잘 본 적 없는 형식이었다. 우선 그 시도 자체가 멋지고 대단했다. 이런 형식을 빌려 복수라는 테마를 풀어가는 방식도 마음에 들었다. 그런데 연기에 구멍이 있으면 큰일 나겠다고 직감했다. 이 영화의 원제가 <인터뷰>였다. 말 그대로 두 시간 가까이 두 사람이 인터뷰를 하는 영화이니 조금이라도 연기가 부족하면 이야기가 효과적으로 전달될 수 없다. 신선한 영화인데, 자신은 없고…. 나에 대한 확신이 없을 때는 선택해준 감독을 믿어보려 한다. 영화는 공동체 작업이고, 수많은 스태프들이 한명의 배우가 하나의 캐릭터로 보일 수 있도록 도와주지 않나. 분장, 의상, 미술의 도움을 얼마나 많이 받는지 모른다. 거기서 나오는 에너지를 아니까 도전해볼 수 있었다.

- 과거 인터뷰에서도 비슷한 대답을 자주 했더라. 나를 믿기보다 나를 믿는 동료들을 믿는다고. 경력과 자기 확신이 비례하지 못하는 상황을 두고 걱정해본 적은 없나.

신기하게도 안 해봤다.

- 불안을 당연히 여기나보다.

그렇다기보다는 계속해서 나를 의심하는 편이 좋다고 생각해온 것 같다. 왜냐하면 이 직업은 연차가 쌓일수록 주변의 믿음과 배려를 받는다. 그런 상황에서 나까지 나를 믿어버리면 새로울 게 없을 것 같다. 나를 의심할 수 있는 건 나밖에 없달까. 나 자신에 대해서는 불신투성이다. 불신덩어리! (웃음)

- 그 마음을 감추지 않는 것 또한 용감해 보인다.

무슨 이야기인지 알 것 같다. 용기라면 용기지. (한참 숨죽이다가) 나의 불완전함에 대해 내 입으로 직접 말하는 것이 부끄럽지 않다. 다행히도.

의심하는 재미

<살인자 리포트>

- 그런 불완전함이 <살인자 리포트>에도 있다. 시공간적으로 많은 것이 한정돼 있고, 그에 따라 배우가 취할 수 있는 의상과 분장도 단일하다. 한계에서 오는 재미와 과제는 무엇이었나.

공간이 하나라 더 집중할 수 있었고, 감정의 밀도를 쌓는 데 도움이 되었다. 다만 영화는 몇 시간 사이에 일어난 일을 보여주지만, 촬영은 두달간 했기에 나노 단위로 섬세하게 작업했다. 예를 들어 오늘 오후 찍은 신의 다음 컷을 내일 아침에 찍는다고 할 때, 내 컨디션에 따라 얼굴 상태가 튀어서는 안된다. 시나리오를 읽을 때부터 각오는 했지만 콘티뉴이티를 위해 컨디션 조절에 힘을 많이 썼다. 그런데 촬영 후 1년 만에 극장에서 영화를 보니 뒷부분은 내가 무슨 정신으로 찍었는지 모르겠더라. (웃음) 뒤로 갈수록 인물이 받는 극도의 스트레스를 표현하기 위해 체중도 줄여가며 예민한 시각으로 작업했기 때문인가 보다.

- 편집감독의 솜씨일 수도 있겠지만, 초반에는 선주가 눈을 깜박이는 모습도 거의 보이지 않는다.

눈을 깜박이지 말아야겠다고 의도하지는 않았는데, 그렇게 될 수밖에 없지 않았을까? 선주 앞에 있는 상대가 보통이 아니니까. 지금까지 연기를 하면서 미간에 그렇게 신경을 곤두세운 적은 없었던 것 같다. (웃음) 촬영 후 숙소에 들어가면 미간 근육이 마치 운동한 것처럼 아팠다. 선주로서는 어쩔 수 없지 않았나 싶다. 남편과 이혼 후 양육 조건을 갖추기 위해 일자리를 잃으면 안되는 와중에 생존이 걸린 상황을 맞닥뜨린 게 아닌가. 경찰인 남자 친구 상우(김태한)가 위험을 대비해두기도 했으니 무리 없이 호텔까지 가긴 했지만.

- 남자 친구의 차를 타고 호텔까지 향하는 첫 장면에서 선주는 살인자와의 대면보다 딸의 가방 안에 든 면도칼을 더 염려한다. 진심이었을까, 강해 보이려는 주문이었을까.

그냥 선주의 일상 아니었을까. 일하러 가는 와중에도 너무나 예쁜 딸 생각을 하는 거지. 그 장면에서는 상우와 선주의 관계도 엿보인다. 선주가 어떻게 사는 인물인지 보여주는 장면이라 생각했다.

- 그 후 줄곧 영훈(정성일)과의 대화가 펼쳐진다. 드라마 <99억의 여자> 이후 오랜만에 정성일 배우와 마주하니 어땠나.

드라마 촬영 당시 만나자마자 아주 밀도 높은 신을 찍어야 했다. (정)성일 오빠가 맡은 캐릭터가 드라마 중간에 나의 이복남매로 투입되었는데, 현장에서 처음 얼굴을 보자마자 애증이 얽힌 신을 찍어야 했던 거다. 배우도 사람인지라 그런 상황이 가혹할 때가 있다. 그런데 호흡이 너무 잘 맞았다. 처음임에도 눈을 바라보는 게 불편하지가 않았다. 그게 좋은 기억으로 남아 있어 <살인자 리포트>도 그의 공력을 믿고 함께했다. 그는 캐릭터 대 캐릭터로 서로를 마주할 수 있는 편안함을 주는 배우다.

- 이 영화에는 선주가 자신과 오래 눈을 맞추는 신도 있다. 복도를 걸어나오는 롱테이크 끝에 거울도 안 달린 엘리베이터 문 표면에 자기 얼굴을 비추어 보는 장면이 마음에 남았다.

나도 그 신을 좋아한다. 감독님과 스태프들이 완전한 거울도 아닌데 얼굴이 비치기는 하는 세트를 제작해가며 공을 많이 들인 신이다. 나중에서야 알았는데 110m짜리 긴 복도였더라. 우선 거기를 걸어나오는 롱테이크부터가 숙제였다. 그때 감정이 잘 올라와준다면 엘리베이터까지 잘 이어지게 할 수 있을 것 같더라. 다행히 집중을 발휘해 몰입할 수 있었고, 감독님이 만족할 만한 결과가 나와 한시름 놓았다. 시나리오를 읽을 때부터 내가 이 장면까지 잘 도달할 수 있을까 정말 무서웠는데, 내가 여기까지 오긴 왔구나 싶었다.

- 촬영은 시나리오 순서대로 이뤄진 편인가.

한 세트에서 쭉 촬영했기에 다행히도 거의 순서대로 찍을 수 있었다. 그래서 극 초반에 관객에게 ‘조여정이 백선주’라는 걸 믿어지게끔 해야 하는 장면들이 오히려 어려웠다. 배우에게는 늘 그렇게 캐릭터가 소개되는 5분, 10분 남짓의 장면들이 가장 어렵다. 그 부분을 잘 잡아놓아야 내가 어디까지 갈 수 있겠다는 감이 온다. 화술이나 딕션 등을 내가 가진 소리의 다른 쪽으로 써가면서, 기자처럼 보일 수 있도록 애썼다.

이상하지만 아름다운, 나만의 균형

<히든페이스>

- 이 영화는 우리가 가까운 사람을 얼마만큼 알고 있는지 확신할 수 없다는 불편한 진실을 건드린다. 그 테마는 약혼자를 시험해보는 수연 역을 맡았던 <히든페이스>에도 녹아 있다. 그외에도 선주와 수연에게는 좁은 공간에서 누군가를 바라봐야 한다는 공통점이 있다.

최근에서야 의식한 공통점이다. 한정된 공간이 주는 밀도 높은 긴장감에 끌리는 편인 것 같다. 배우로서 고도의 집중력을 필요로 하는 작업이라 어렵고 무섭지만, 잘해낸다면 관객이 보기에 매력적인 영화가 나올 수 있다. 나도 관객으로서 이런 영화에 매력을 느끼니 마음이 계속 가지 않았을까. 그것도 연달아서! 내 취향에 가까우니 더 잘하고 싶었다.

- <기생충> 이후 찍은 세 영화가 모두 근 1년 사이 개봉했다. 물론 여러 편의 드라마에 출연했지만, 조여정을 스크린에서 다시 만나기까지 5년이 걸린 셈이다. 극장가에 코로나19 팬데믹과 같은 난관도 물론 있었지만, 혹시 <기생충>이라는 큰 경험 후 영화를 고르는 일에 더 섬세해진 건 아닐까 궁금했다.

그건 아니다. 이럴 때일수록 연기를 쉬면 안된다는 생각이 더 컸다. 그래서 2년간 4편을 했을 정도로 드라마를 쉬지 않았는데, 영화는 좋은 제안을 받지 못했다. 그러다 <히든페이스>가 내게 온 것이다. 내가 고르고 고르느라 시간이 걸렸던 게 결코 아니다. 그 후 <살인자 리포트>와 <좀비딸>까지 만났으니 결국 배우와 영화가 만나는 모든 과정이 다 운이고 복인 것 같다. 작품과 나 사이의 ‘연’이라는 게 있는 거지.

<좀비딸>

- 그런데 혹시 알고 있나. 그동안 연기한 캐릭터들의 이름에도 ‘연’이라는 글자가 굉장히 많이 들어간다. <기생충>의 연교, <히든페이스>의 수연, <좀비딸>의 연화, 드라마 <99억의 여자>의 서연까지….

헉, 소름! 영화 <후궁: 제왕의 첩>에서는 화연이었다. 신화연!

- 연이라는 글자가 여자 이름에 자주 쓰이는 것도 있지만, 부드럽게 시작해 결연히 맺어지는 발음이 배우의 이미지와도 잘 어울린다.

어감이 그렇다. (웃음)

- 큰 성취 후 하는 작업에 따를 수 있는 과한 평가에 대한 두려움을 고백한 적도 있다. 이 두려움은 유효한가.

있는 그대로 평가받고 싶은 마음이다. 타인이 기대하는 바를 신경 쓰기보다는 내가 할 수 있는 딱 그만큼의 실력으로 보이고 싶다.

- 동료나 관객에게 그렇게 평가받고 싶다는 이야기일 텐데, 스스로를 바라보는 시선은 어떤 편인가.

이 나이쯤 되니 스스로 진단을 많이 해보지 않았겠나. 배우는 자신을 잘 알아야 하는 직업이기도 해서 쉴 때마다 나는 어떤 인간인지 고심했다. 그러면서 알게 됐다. 다른 사람에게 관대한 만큼 나 자신에게 박하다는 걸. 참 이상한 균형이다. 다소 불균형하게 보일 수도 있는데, 나 아닌 누군가에게 박하게 구는 건 좀 내키지 않는 모양이다.

- 결국 나에게 박하게 구는 수밖에 없다?

‘그럼 너는 얼마나 잘하는데? 일단 너부터 잘해!’ 하고 나를 바라본다. (웃음) 영원히 타인에게 뭐라 할 자격은 없을 것 같다. 나 자신에게도 용기낸 것, 도전한 것에 대한 칭찬 정도는 해준다. <살인자 리포트> 같은 작품을 택한 것을 잘했다고 말해줄 수 있는 거지. 다만 연기에 대한 칭찬은 해주기 어렵다. 열심히 하는 건 기본이고, 잘해야 하는 건 당연하다. 누구도 충족해줄 수 없는 나만의 기준이 있으니 어쩔 수 없다.

- 스스로에게 너그럽지 않아 지치는 순간을 여러 번 겪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럼에도 계속 연기하게 만드는 힘은 어디에서 나오나.

나를 더 나은 배우, 더 좋은 인간이 되고 싶게 만드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을 만나 작업하다보면 박한 나의 태도도 그리 퍽퍽하게 느껴지지만은 않는다. 세상에 이렇게 멋진 사람들이 많으니 그들에게 배우면서 내 부족함을 채워야겠다고 다짐한다. 사람이든, 책이든, 영화든, 나를 계속 건드려주는 것들로부터 힘을 얻는다. 그게 계속 세상에 있어주는 한, 나는 괜찮다.

영화 필모그래피

2025 <좀비딸>

2025 <살인자 리포트>

2024 <히든페이스>

2019 <기생충>

2015 <워킹걸>

2014 <표적>

2014 <인간중독>

2012 <후궁: 제왕의 첩>

2010 <방자전>

2006 <흡혈형사 나도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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