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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준희의 클로징] 시사라는 강물위에서

긴 호흡으로 산다는 게 참으로 어려운 세상이 되었구나 싶다. 물론 이런 투덜거림은 적어도 지난 수십년간 수없이 나왔을 테고, 길게는 수백년 이상, 때마다 반복되었을 것 같긴 하다. 적어도 인류 역사가 근대로 진입하던 시점 이후로 우리가 체감하는 시간은 늘 가속화의 경향 속에 있었으니 말이다. 따라서 첫 문장은 조금 수정되는 게 맞다. 기존의 내 호흡보다 훨씬 더 짧은 호흡으로 살아야만 하는 조건에 처한 것 같다. 개인적인 사유로든, 사회 변화적인 이유로든 말이다. 일단은 개인적인 사유가 크다. 나는 일상적 보도 및 시사 문제를 다루는 ‘저널리즘’과 미디어를 관찰하면서 그것을 분석하거나 이론화하는 직업을 갖고 있었다. 현재도 그런 직업으로 분류되는 게 맞기는 한데, 과거형으로 표현하는 이유는 매일 내가 하는 일의 중심이 바뀌었기 때문이다. 예전에는 ‘매일’ 책을 읽었고, 관찰은 그 매일보다는 조금 더 긴 호흡을 주기로 이뤄졌다. 관찰의 결과로 읽어야 할 책이 정해지기는 하였으나, 실은 책이 관찰을 주도했던 면이 크다. 하지만 지금은 매일 그것을 관찰할 뿐 아니라 스스로 매일 무언가를 이야기한다. 저널리즘 미디어 ‘바깥’에서가 아닌 ‘안’에서 함께 움직이면서 주변도 살펴야 하는 셈이다. 시사(時事, current affairs)에 몸을 담그면, 그걸 제대로 굽어볼 수가 없다. 시사는 말 그대로 물결(current)이다. 떠밀려갈 뿐 통제할 수도 없고 가늠하는 것조차 여의치 않다. 도리어 빠져 죽기 십상이다. 그래도 전에는 가끔 뭍에 올라 흘러가는 물을 바라보기도 하고 그 물결의 길을 잡는 강의 윤곽도 살펴보고 했는데, 지금은 그러기가 도무지 어렵다. 물 안에 몸을 담그지는 않고 뗏목이라도 띄워 그 물을 타고 가려 애쓰는 정도이다. 가끔은 억지로 닻을 내리거나 중간에 있는 모래톱 혹은 바위 같은 것에 의지하기도 하지만, 상류에 큰 비라도 내릴라치면 그 자세를 지탱하다가 부서질 것처럼 위태위태하다. 이런 결정을 한 것에는 사회적인 이유가 작동했다. 관찰의 대상이 보여주는 변화가 너무 빨라서 관찰을 책으로부터 시작하는 것이 점점 더 어렵게 됐다. 그렇다고 책까지 덩달아 빨라지는 건 그다지 바람직한 일은 아니다. 솔직히 ‘돈’의 관점에서 보면 강물에 잠시 담갔다 빼낸 만년필로 얼기설기 적어서 시시때때로 책을 찍어내는 게 그나마 합리적이긴 하다. 하지만 그건 강을 책에 담아내는 행동이 아니라, 책을 강에 던져버리는 행동이다. 그럴 바엔 차라리 잠시라도 내 몸을 강에 던져 넣는 게 낫다. 빠져 죽으면 그게 내 한계인 거고, 다행히 죽지 않고 버틸 수 있다면 소중한 경험을 얻게 될 테다. 버티다가 다시 뭍에 오를 수 있을 때, 그 경험으로 책을 써보마 다짐한다. 그래도 빠져 죽지 않고 살아남기 위해선 다행에 기대기보다 의지를 돋워야겠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뭍에서의 기억을 잊지 않아야겠다고. 적어도 지금은 그렇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