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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평] 심리적인 쾌감의 부재 - 이지현 평론가의 <어글리 시스터>

※영화에 대한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몸속에서 무엇인가 꿈틀거렸다. 바로 약국을 찾았고, 소화제 한알을 삼키고서야 안도할 수 있었다. 이상하게도 <어글리 시스터>(2025)를 보고 극장을 나서면서 영화 <기생충>(2019)의 타이틀이 떠올랐다. 알레고리로서가 아니라 문자 그대로 ‘기생충’이라는 세 글자가 머릿속을 떠다녔다. 하얗고 기다란 생명체, 이 물질에 대해 영화는 필요 이상으로 집착하고 있다. 원치 않는 상태에서 관객들의 내부로 그것을 주입시키려는 것 같다. 그 일그러진 형체, 어쩌면 이 물체는 성공 혹은 해피 엔딩을 향한 모티프를 닮았다. 대다수 영화에서 형이상학적으로 드러내는 주제를 이 작품은 몹시 물리적으로 다루고 있다. 누군가는 이 영화를 데이비드 크로넌버그와 닮았다고 말했고, 다른 누군가는 잔혹 동화의 공포 버전이라고 전했다. 모두의 의견에 동의하며 <어글리 시스터>가 전달하는 끔찍함의 강도를 살펴보고자 한다.

도발과 농담의 경계를 오가는 통증

에밀리 블리치펠트의 장편 데뷔작 <어글리 시스터>는 한마디로 정리하면 고전 동화 <신데렐라>의 변형된 이야기다. “아름다워지려면 고통을 겪어야 한다”라는 거대한 명제를 전제로, 영화는 신데렐라의 의붓자매인 엘비라(레아 미렌)의 관점에서 내러티브를 진행한다. 못생긴 엘비라는 스스로의 외모를 재건하는 데 목숨을 건 인물이다. 왕자와 결혼하기 위해서다. 영화는 마치 마법의 이야기처럼 그녀의 희망을 현실화한다. 외적으로 아름답게 변신시킨다. “외면을 내면에 맞춰 바꿔야 해”라는 중매쟁이의 말을 이 영화의 주인공은 실천해 보인다. 그렇지만 그 과정에서 그녀가 소유한 다른 것들이 망가진다. 머리카락이 빠지고, 몸속에서는 이상한 소리가 나고, 피와 체액이 흘러나온다. 피부에는 얼룩이 생긴다. 그토록 노력했건만 최종 목표를 향한 길은 멀기만 하다. 영화는 이 과정을 어중간하게 드러내지 않는다. 희화화되더라도 꾸준히, 주인공은 ‘진짜’ 괴물이 되어간다.

<어글리 시스터>가 지닌 과잉의 전개 과정은 영화가 끝날 때까지 그 리듬을 잃지 않는다. 이 점이 아마도 이 작품의 가장 큰 장점일 것이다. 코 성형을 받는 첫 번째 신체 변형의 과정, 그때부터 리듬이 생성된다. 의사는 거대한 끌을 사용해서 주인공의 코를 높인다. 결심한 듯 그가 손을 치켜드는 순간, 관객들은 몽타주의 전환을 상상한다. 하지만 기대는 엇나간다. 잔혹한 장면을 영화는 예상보다 훨씬 길게 드러내 보인다. 장면전환이 지체되고, 관객들은 눈을 감는다. 이때 주인공 어머니의 웃음소리가 들린다. 수술이 성공적으로 마무리된 것이다. 이후에도 엘비라, 그녀가 행하는 외적인 발전에는 늘 고통이 수반된다. 그 통증의 강도를 영화는 도발과 농담의 경계를 오가면서 극한으로 밀어붙인다.

<어글리 시스터>가 지닌 과잉의 전개 과정은 영화가 끝날 때까지 그 리듬을 잃지 않는다. 이 점이 아마도 이 작품의 가장 큰 장점일 것이다. 코 성형을 받는 첫 번째 신체 변형의 과정, 그때부터 리듬이 생성된다. 의사는 거대한 끌을 사용해서 주인공의 코를 높인다. 결심한 듯 그가 손을 치켜드는 순간, 관객들은 몽타주의 전환을 상상한다. 하지만 기대는 엇나간다. 잔혹한 장면을 영화는 예상보다 훨씬 길게 드러내 보인다. 장면전환이 지체되고, 관객들은 눈을 감는다. 이때 주인공 어머니의 웃음소리가 들린다. 수술이 성공적으로 마무리된 것이다. 이후에도 엘비라, 그녀가 행하는 외적인 발전에는 늘 고통이 수반된다. 그 통증의 강도를 영화는 도발과 농담의 경계를 오가면서 극한으로 밀어붙인다.

연극 <고도를 기다리며>를 통해 사뮈엘 베케트는 인간 존재의 허영심에 대해 다음과 같이 일렀다. 우리는 일어나지 않을 사건을 기대한다. 우리는 조급함을 일상화한다. 그리고 돌이킬 수 없는 죽음에 대해 상상한다. <어글리 시스터>의 후반부 전개에서 관객들은 부조리극의 염세주의를 깨닫는다. 의붓언니 신데렐라의 신발을 한손에 쥐고서, 계모의 딸인 주인공은 자신의 발을 절단한다. 우리는 그녀가 죽게 될 것을 상상한다. 하지만 결말은 오히려 반대에 더 가깝다. 이 이야기에는 해피 엔딩이 있을 수 없다고 관객들은 상상한다. 하지만 인물들은 동의하지 않는다. 어쩌면 로베르 브레송의 여주인공을 물리적인 실험대에 올린 것처럼, 운명적인 상황이 이어진다. “엄마가 재혼하기 어렵다면 내가 결혼하면 되지요.” 엘비라는 자신의 역할에 순응하는 자이다.

통제된 육체의 감옥, 생각해보면 이 영화가 드러내는 성형의 과정은 남녀 관계의 미장센과 상반되어 표시된다. <어글리 시스터>의 모든 성형은 끔찍하게 ‘이입’되는 형태를 보이지만, 이 영화가 지닌 연인 관계의 형태에는 훔쳐보기의 즐거움이 ‘배제’된다. 간혹 줌인을 통해 감정의 질식감이 강조되지만, 대다수 농담처럼 들린다. 이미 모두가 알고 있는 이야기를 자율적으로 던진 후, 영화는 최대한 스스로의 외설성을 해체하겠다고 선언한다. 의도치 않은 경험에의 생성, 행동에 대한 본질적인 집중, 배경의 추상적인 성질마저 이 드라마의 중심이 되지 못한다. 어쩌면 영화가 목표하는 질감은 관객이 느끼는 ‘심리적인 쾌감의 부재’ 그 자체에 집중된 것인지 모 른다.

직설적인 결말을 향해 움직이다

다시 한번 기생충을 떠올린다. 하얗고 투명한 작은 생명체가 엘비라의 몸속에 잠입한다. 그것은 엘비라가 먹는 음식을 대신 섭취한다. 그리고 엘비라가 움직일 때마다 에너지를 빼앗는다. 이후에 그것은 그녀의 내장이 되어서 함께 숨 쉰다. 왕자와의 만남, 30초 정도로 묘사되는 그 짧은 순간에 엘비라가 내쉰 심호흡의 소리를 우리는 기억한다. 클로즈업으로 촬영된 그녀의 얼굴 아래로 무언가 꿈틀거린다. “제발 그 소리를 내지 마, 움직이지 마.” 그녀가 춤출 때마다 마음속으로 간절히 부탁하게 된다. 돌이켜보면 <어글리 시스터>의 전개에서 가장 힘들었던 순간은 바로 그때였다. 주인공의 궁극적인 목표 역시 그 지점을 향해 있었다. 그녀는 존재했고, 그 안에 욕망이 숨 쉬고 있었다. 그 정신의 메타포가 하얗고 긴 생명체가 되어서 움직였다. “그르릉, 그르릉.” 특정 신체의 부위에서 배타적인 사운드가 발산된다. 그녀와 그녀 자신의 육체가 분리된다. 어떤 신체에도 귀속되지 못한 욕망의 덩어리가 유령 같은 긴 심호흡을 내쉰다. 자막이 올라가고 극장을 나서는 바로 그 순간까지도 말이다.

비견컨대 무성영화 시대의 <더 빅 스왈로우>(1901)가 인물의 입속으로 카메라를 옮겼다면, 이제 <어글리 시스터>의 화면은 주인공의 내장을 꺼내서 비추고 있다. 주인공 혼자였다면 결코 해내지 못했을 엔딩을 위해, 이제 영화의 결말부에서 그녀의 여동생이 본격적으로 움직인다. 소녀는 엘비라의 도피를 돕는다. 약을 먹이고 손으로 집어 당겨서, 언니의 몸속을 가득 메운 그것을 끄집어낸다. 엘비라는 자유의 몸이 된다. 일상적인 미디어의 진부함에서 폭력을 추출하기 위해, 이 영화가 선택한 결말은 몹시 직설적이다. 공포영화의 불균형을 흉내내며 스스로의 육체를 절단한 후 주인공은 힘겹게 계단을 내려가며 체중을 이동한다. 흥미로운 점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끝이 어둡지 않다는 사실이다. 그녀들은 탈출한다. 견딜 수 없는 것, 참을 수 없는 것, 지루함과 고통, 그리고 도발의 한계를 벗어나서 말을 타고 최대한 멀리 현실로부터 도피한다. 진짜 동화는 이제 시작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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