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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스터데이> 아트디렉터 최영인
2002-06-27

“난 말야, 지하수가 보랏빛이면 좋겠어”

최영인(30)씨는 <예스터데이>를 가리켜 ‘재활용 정신이 장면마다 구현된 영화’라고 했다. 넉넉한 제작비에 무슨 재활용 정신? 재활용이란 모름지기 ‘헝그리’ 제작환경에서 아트디렉터가 마지막으로 뽑아드는 카드지 조커가 아니지 않은가.

최영인씨가 영화의 곳곳에 재활용의 미학을 심을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시간과의 싸움 때문. 3∼4개의 세트를 동시에 디렉팅해야 하는 상황에서 구하는 데 시간이 많이 걸리는 자재는 되도록 피한 것이 주변에서 신속하게 손에 넣을 수 있는 재활용품 사용으로 이어진 것이다. 일례로 영화 초반에 등장하는 경찰청장의 방은, 사방에 우드록으로 가벽을 세운 조립용 세트. 청장의 책상 역시 폐품 수집장에서 구해 온 사무용 책상을 손질한 뒤 유리 대용으로 투명 아크릴판을 깔고 그 사이에 색지를 덧댄 소품이다. 첨단의 미래장비로 무장한 특수수사대(SI)의 대인 탐색용 헬리콥터의 경우, 선명한 ‘SI’ 마크와 함께 도시적인 분위기의 흰색 페인트 데커레이션이 가미돼 있는데, 실은 이것도 특수페인트 대신 접착시트가 사용됐다.

‘재활용의 미학’ 대신 ‘잔머리의 미학’이라고 해도 되겠다는 기자의 농에 최영인씨는 쉽게 얼굴을 펴지 못한다. 급박하게 이뤄진 촬영일정에 그만큼 가슴 졸였다는 증거. “현장에서 제가 뭐라고 불렸는지 아세요? 깡패예요, 깡패. 세트 짓는 아저씨들하고 드잡이하는 일도 있었고, 바쁜 일정에 맞추기 위해 독해질 수밖에 없었죠.” 어쩐지 인터뷰용 사진을 찍는데, 표정이 시종일관 엄숙 그 자체다. “카리스마 있게 나와야 돼요. 그래야 무시 안 당해요.” 현장에서 그만큼 강해졌는데도, 그녀는 아직 모자란 눈치다.

주인공 석이 연쇄살인범 ‘골리앗’을 뒤쫓는 장면, 지하수가 흐르는 배수로를 카메라가 비출 때 언뜻 낯선 색감이 시야에 맺힌다. 드문드문 걸린 벽걸이용 백열등에 드러난 보랏빛 지하수. 충격적이다 싶은 지하수색은 음울한 게토를 비유하는 색깔로 최영인씨의 작품이지만, 정윤수 감독의 발상에서 비롯됐다. “난 말야, 지하수가 분홍색이면 좋겠어.” 술을 먹다 우연히 튀어나온 감독의 말 한마디에 처음엔 웃어넘겼지만, 디자인 컨셉인 ‘낯섦’에 너무도 잘 부합된다 싶어 채도를 조금 낮춘 보랏빛으로 최종 세팅한 것이다. 영화의 주무대로 등장하는 게토지역 내 말라카베이 바(Bar)와 두바이 호텔은, 이름에서 풍기듯 베트남의 지역색을 그대로 간직한 세트. 아시아의 여러 나라 가운데서도 유독 3세계의 이미지가 강한 베트남을 게토 지역 전체의 이미지 플롯으로 차용했다. 바에 걸린 대형 베트남 지도는 미술부 스탭들이 일일이 손으로 그린 것이며, 자잘한 소품들도 미술부의 발품 덕분에 제자리를 찾아 구석구석을 빛낸다.

고된 촬영이 끝난 뒤 한동안 호주로 ‘도피’해 있었다는 최영인씨는, “힘들어 떠났어도 다시 찾게 되는 곳이 영화현장”이라며, “현장에서 만난 좋은 사람들과 다시 뭉칠 날을 기대하겠다. 특히 미술팀 손꼭지씨에게 감사한다”고 다시금 가슴속에 희망을 새기는 중이다.글 심지현 simssisi@dreamx.net·사진 손홍주 lightson@hani.co.kr

프로필

1973년생·<헤어드레서> 기획실 직원으로 영화판 입문 뒤 미술팀으로 활동

<유리> 미술 담당·<예스터데이> 아트디렉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