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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영향 아래의 작가, <다른 것으로 알려질 뿐이지> 조희영 감독
김소미 사진 최성열 2025-09-04

- 두 번째 장편을 연출하면서 극 중 등장인물 수, 제작 과정에서의 스태프 규모 등 다방면에서 외연을 확장했다.

규모의 확장을 의도했다기보다 이 시나리오가 많은 인원을 필요로 했던 것 같다. 영화진흥위원회 제작 지원을 받으면서 단편 때보다 오래 함께한 정광은 프로듀서와 모색해 공동 제작사를 만난 영향도 컸다. 영화뿐 아니라 드라마, 광고 등 작업의 폭이 넓고 프로페셔널한 프로덕션 서비스를 제공하는 보더리스 필름과 인연이 닿아서 정인석 촬영감독, 그리고 커머셜 작업이나 뮤직비디오 작업에 단련된 크루들과 협업했다. 새로운 동료들과 안정감 있게 촬영하기 위해 콘티 작가를 따로 두고 작업하기도 했다. 창작적인 결정에 있어서 연출자가 원하지 않는 방향으로 흘러간 적이 단 한번도 없었다는 점에서 특히 프로듀서들에게 고맙다.

- 장편 데뷔작 <이어지는 땅> 이전인 2018년에 <다른 것으로 알려질 뿐이지>의 초고를 썼다고. 우선 제목의 출처부터 묻고 싶다.

오래 전 접한 로버트 배리(미국의 개념미술가, 작품과 반응하는 환경 및 관람객 사이의 상호적 인식에 초점을 맞춘 작업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편집자)의 텍스트 작업 중 “It can only be known as something else”(오직 다른 것으로서만 알려질 수 있다)라는 말이 내 안에 아주 강하게 남아 있었다. 오해와 욕망, 외로움에 관한 파편들이 떠오를 때마다 그 문장이 이야기의 바닥에 계속 깔려 있곤 했다. 그러다 본격적으로 <다른 것으로 알려질 뿐이지>의 구조를 구상하던 시기였는데, 머릿속에서 생각을 굴려가다가 이영호 작가의 전시에서 버려진 유리문을 깨뜨려 바닥에 설치한 작품을 마주했다. 그걸 본 순간 ‘어디서 어떻게 살았을지 모르는 문이 깨진 채 파편으로 남아 있는’ 형태와 구조로 곧 영화를 만들 수 있겠다는 결심이 섰다.

<다른 것으로 알려질 뿐이지>

- 특정한 사물의 관념으로부터 착안하거나 회화적 발상에 익숙한 연출자다. <이어지는 땅>에선 버려진 캠코더가 인물들의 여정을 촉발하고 <다른 것으로 알려질 뿐이지>는 그림과 미술가의 작업실이 서사의 통로가 되어준다.

폭우 속에서 산책하다가 길 한가운데 서류 가방이 버려진 걸 보고 멈춰 선 적 있다. 누가 잃어버린 것인지, 일부러 놓고 간 건지 구분하기 힘든 자태로 남겨진 가방을 보면서 문득 단편 <주인들>에서 정회린 배우가 가방을 습득한 이들에게 가방이 자기 거라고 우기는 장면을 떠올렸다. <다른 것으로 알려질 뿐이지>는 유리 조각의 성질이 모든 인물들에게 녹아 있기를 바랐다. 또 깨진 유리 조각들의 위치성이 곧 이 영화의 구조였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일상의 사물들은 내게 중요한 단서인 것 같다. 버스 정류장에 누군가가 떨어트리고 간 열쇠를 보면 한참 동안 집착적으로 생각한다. 무언가를 열 수 있고 어디론가 들어갈 수 있는 사물을 잃어버린 사람에 대해서도. 이런 물건들을 발견하면 꼭 사진을 찍어둔다. 그래서일까. 영화 <몽상가들>에서 매튜(마이클 피트)가 식탁에서 펼친 성냥갑 이론을 들으면서 동질감과 희열을 느꼈었다. 우연한 성냥갑 하나가 자신의 손마디 길이와 정확히 일치하고, 그로부터 식탁보의 길이, 집 벽의 높이, 이자벨(에바 그린)의 키까지 절묘한 우연으로 일치한다는 사실을 짚어주는 장면이다. 대학에서 가장 처음 전공한 분야가 동양화라 기본적으로 평면 회화에 친숙하고 좋아하기도 한다. 오랫동안 미술을 하다 보니 개념적인 현대미술이나 비디오 작업에도 자연스럽게 친숙해져서 아마 이런 영향도 있겠거니 싶다.

- 비선형적 흐름으로 시공간을 재배치하는 실험에서 어떤 가능성을 보는가.

내러티브를 가지되 형식적이거나 표현주의적인 영화를 만들 수 있을지 계속 실험하는 중이다. 결국 내가 하고 싶은 것은 이야기가 있는 영화인데, 그 형태는 다채롭게 떠오른다. 장편을 쓰다보면 내러티브적인 고민을 하는 과정에서 단편적인 아이디어가 떠오른다. 이런 아이디어들을 좀더 실험적인 형식으로 옮긴 것이 내 단편영화였다. 계속해서 다양하게 작업하면서 균형점을 찾다보면 가장 나답게 구사할 수 있는 언어에 더 가까이 다가가지 않을까.

보이지 않는 상호작용을 비추는 눈

- <다른 것으로 알려질 뿐이지> <이어지는 땅> 그리고 단편들에서 관찰되는 일관된 양식 중 하나는 단일한 주인공이 겪는 사건과 내면에 몰두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항상 다중의 시점이 혼재되고, 그들의 경험이나 상념이 교차로를 이루는 지대에서 영화가 흐른다.

종종 배우들에게도 이야기한 것인데, 나는 극 중에서 여러 인물을 상상하고 그들을 만나게 할 때 사실 같은 인물들, 그러니까 모두 하나라고 생각하곤 한다. 뒤집어 말하면 인간은 혼자서는 어떤 영향도 오롯이 낼 수 없다고 믿는다. 그래서 계속해서 관계에 대해서 쓰려고 한다. 인물과 인물 사이뿐만 아니라 인물과 공간, 인물과 사물 사이의 것들이 내게는 중요하다. 이 사이는 눈으로 보이지 않는 것들의 총합이다. 사람(인물)과 그들을 둘러싼 영향을 동등한 레벨로 담아보려고 노력한다.

- 캔버스에서 그림을 분리하는 정호(감동환)의 가만한 손길과 그의 작업실을 기점으로 영화가 접히면서 일종의 2부 구조를 이룬다. 1부에서 보여지지 않은 시공간을 드러내는 2부를 동일한 로케이션에서 연달아 촬영했나.

그렇다. 다만 콘티상의 신 넘버는 멀리 떨어져 있기 때문에 배우들도 어느 정도 의식했을 것이다. 인주(정보람)가 주영(양희진)을 만나 공원에서 대화하는 장면은 2부에서 역숏으로 촬영했다. 그 때문인지 디렉션으로 강조하지 않았는데도 배우들이 분위기를 완전히 바꾸어 소화하더라. 배우들은 자주 1부와 2부가 각각 누구의 시점을 대변하는가를 궁금해했다. 내가 추구한 것은 그런 구분이 아니었고, 배우가 영화에서 최종적으로 보여질 시점의 주인을 의식하지 않고 연기하길 바랐기 때문에 배우들에게 저마다 조금씩 다르게 대답했다. 그런 뒤섞임이 필요했다.

- 대사가 적고 뒷모습과 옆모습이 대부분이라는 점에서 정호는 ‘보이지 않는 영향’을 매개하는 일종의 관념적 존재로도 읽혔다.

그래서 스태프들이 왜 배우의 클로즈업을 찍지 않는지 의아해한 적도 있다. 보이는 게 중요한 영화가 아니라고 말하는 영화가 관습적으로 모든 것을 보여주는 것이 우스꽝스럽다고 느꼈다. 뒷모습이 주는 엄청난 가능성이 이 영화에서 정호 그 자체로 표현되어야 했다. 감동환 배우도 이를 이해하고 지문대로 절제된 표현과 대사를 수행했다. 그러다 딱 한번, 수진(공민정)과 정호가 영훈(김희상)의 생일 파티에서 처음 만나는 과거 장면을 찍을 때였는데, 감동환 배우가 전혀 다른 성격으로 정호를 연기하기에 깜짝 놀랐다. 정호란 사람이 정말로 누군가, 하는 지점이 갑자기 새롭게 보였다. 영화구조를 감안해서 의식적으로 캐릭터디자인을 설계한 것인지 배우에게 물어볼 정도였다. 이후 두 남녀가 건물 밖에서 조금 짓궂은 대화를 하면서 가까워지는 순간이 너무나 내가 그렸던 이상과 일치해서 첫 테이크 만에 기쁜 내색을 감추지 못한 채로 연신 오케이를 외쳤다.

- 덧붙여 유정(정회린)이 우석(류세일)과의 관계에서 과거 정호와의 관계를 겹쳐보는 감정도 다수의 공감을 살 만하다. <다른 것으로 알려질 뿐이지>는 좁혀지지 않는 남녀 관계의 세밀한 성질에 관한 영화라는 점에서 미학적 완성도와 별개로 어른들의 재미있는 연애영화가 아닐까.

다른 분들도 그렇게 봐주었으면 좋겠다. (웃음) 인생에서 연애는 정말 중요하다고, 그리고 아름답다고 믿는다. 친구나 가족과도 할 수 없는 무언가를 만들고는 헤어지면 다시는 보지 않는 남이 되는 역학이라는 게 참 잔인하고도 애틋하다.

영화를 귀하게 여기기에, 자유롭다

<다른 것으로 알려질 뿐이지>

- 미술을 공부하다가 영화작업을 하게 된 경로는.

한국에서 대학교 다닐 때 영화 전공생들과의 협업으로 독립영화의 미술 작업을 맡아서 했다. 그렇게 물꼬를 터서 다른 학교 학생들과도 작업하게 됐다. 처음엔 영화가 하고 싶으니 내가 해온 미술로라도 참여하면 되겠지 싶었는데 그걸로는 해소되지 않는 무언가가 있더라. 내 영화를 만들고 싶은 마음은 아무에게도 제대로 말하지 못했다. 그러다 크게 힘든 일을 겪고 아무도 없는 곳에서 살지 않으면 안되겠다는 심정에 자퇴 후 프랑스로 도망치듯 떠났다. 아무것도 정해진 게 없었다. 프랑스로 가는 비행기에서 친구가 건넨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의 책 <봉인된 시간>(개정판 <시간의 각인>)을 읽었던 기억이 난다. “영화는 삶을 건드리고 있다”는 문장을 품고, 진심을 다해서 삶을 건드리는 글을 쓰는 것으로 내 영화에 다가가자고 마음먹었다.

- 해외 생활을 하면서 혼자 영화작업에 뛰어들기 쉽지 않았을 텐데.

안타깝게도 바로 영화를 하지는 못했다. 프랑스에 있다가 영국으로 건너가서 미술이 아닌 여성복 디자인을 공부했다. 졸업 작품으로 만들었던 옷이 <기억하는 옷>이다. 천 안에 알루미늄을 넣어서 온도가 유지되고, 옷을 벗으면 입었던 사람의 형체가 그대로 남아 있는 옷을 만들었다. 돌아보면 재미있는 것이 어렸을 때부터 그렸던 그림과 여성복, 그리고 지금 만든 영화가 다 닮아 있다. 영화를 하겠다고 마음먹었을 땐 내가 비전공자이기에 오히려 자유로움이 있겠다는 기대도 했다. 전공하지 않고 미술을 하는 이들의 작품에서만 묻어나는 것들을 반추하려 애썼다. 스스로 끊임없이 공부는 하되 기관에 속해 소속감을 느끼면서 정해진 답에 익숙해지는 환경에는 노출되지 않고 싶었다.

- 긴 시간 영화를 향해 왔고 지금은 자신의 언어를 찾아가는 과정 중에, 영화감독을 직업으로 여길 만한 생계와 지속 가능성의 문제는 어떠한지 묻고 싶다.

단적으로 말하자면 영화감독을 직업이라고 생각하기 어렵다. 생계유지가 어려워서다. 지난해까지만 해도 편집이나 의상쪽으로 아르바이트 일이라도 들어왔는데 올해는 모두 끊겼다. 줄어가는 통장 잔고를 보면서 한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제대로 기능할 수 없다는 생각이 자주 들곤 한다. 한국에선 영화진흥위원회 제작 지원을 받지 않으면 사비 외에 영화를 찍을 방법은 거의 없어 보인다. 그렇다고 투자받기 위해 작업의 본질을 포기하고 싶지는 않다. 직업적 불안정성에도 불구하고 자유로워지려고 한다. 내 작업으로서 영화를 하기 위해 너무나 긴 시간 염원해왔기 때문에, 그리고 내 안에서 영화가 아직은 너무나 귀하기 때문에. 영화를 하겠다고 버틸 때 나보다 오래 일한 경력자들이 “너, 집에 돈 많아?”라고 물으며 사기를 꺾곤 했고 그게 정말이지 싫었다. 그런데 이제는 그게 진심 어린 걱정이었음을 알겠다. (웃음) 다만 내가 그런 말을 돌림노래처럼 이어받지는 않고 싶다. 정주리 감독님이 <도라>로 해외 공동제작의 활로를 개척한 사례에서 힘을 얻었다. 나 역시 꾸준히 새로운 방법을 찾아보려고 노력하고 있다. 다음 세대 감독들이 좀더 양질의 환경을 꿈꿀 수 있는 데 미약하게나마 보탬이 되면 좋겠다. 관련해 제도적인 보완이 필요한 부분도 언급하고 싶은데, 영화진흥위원회 제작 지원의 경우 집행 증빙 기간이 짧아 캐스팅 과정상의 촉박함은 물론이고 해외 피칭을 통해 조금이라도 더 제작비를 확보할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하기에 시간이 절대적으로 부족하다. 1년 안에 영화를 만들어야 해서 창작적 가능성이 협소해지는 상황은 거의 모든 감독님들이 겪고 있는 문제일 것이다. 꼭 개선되었으면 한다.

- 준비 중인 신작이 올해 부산국제영화제 아시아프로젝트마켓(APM)을 찾는다.

전체 분량의 70~80%가 일본 로케이션이라 APM을 통해 일본 제작사 등 해외 공동제작의 가능성을 찾고 싶다. 가까운 오정민, 이제한 감독 등과 가끔씩 대화하다보면 우리의 바람은 너무도 선명하고도 단출하게 모인다. 계속해서 자신의 영화를 찍고 싶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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