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명의 인물들이 공원과 거리, 각자의 일터와 작업실에서 스치거나 만난다. 사건으로서 수렴하고자 하면 약 나흘의 시간을 담는 <다른 것으로 알려질 뿐이지>에서 확실한 것은 이것뿐이다. 전시를 준비 중인 미술가 인주(정보람)는 간간이 정호(감동환)의 작업실을 찾는다. 작업실을 정리 중인 정호에겐 애인 수진(공민정)이 있는데, 수진은 정호 몰래 글 쓰는 훈성(유의태)과 만나고 있다. 배우인 유정(정회린)은 오디션을 보러 다니는 동안 연인 우석(류세일)과 자주 다툰다. 인주는 정호를 향한 자신의 감정이 상황보다 뒤늦게 도착하도록 유예하는 데 익숙하고, 정호에게 죄의식을 품은 수진은 거울을 보는 것처럼 훈성의 기만에 민감하게 반응한다. 한 사람이 다른 한 사람을 돌보고 감내하는 쪽으로 기울어 보이는 유정과 우석의 관계에서, 유정은 과거의 연애에 빚진 순간을 떠올린다. 오래전 유정과 정호는 함께했는데 유정은 어쩐지 이번 연애에서 자신이 과거의 정호에 가깝다고 느낀다. 이렇게 놓고 볼 때 <다른 것으로 알려질 뿐이지>는 쓰고, 그리고, 연기하는 이들의 서로 다른 언어가 사랑의 감정과 길항하는 영화이면서, 크고 작은 인간관계의 행로를 냉정한 자태로 관찰하는 영화도 된다.
관계의 상호작용을 포착한다고 단정히 바꾸어 말할 수도 있겠으나 조희영 감독은 그보다 넓은 함의에서 비범한 면목을 비로소 드러낸다. 세명의 주요 여성 인물들이 경유하는 존재인 정호는 <다른 것으로 알려질 뿐이지>에서 가장 말이 없고 언제나 뒷모습 또는 옆모습으로 남는다. 그가 작업실에서 캔버스의 그림을 떼어내는 모습이 담긴 숏은 영화에서 유일하게 반복을 이루는 숏이다. 담담한 손짓과 사각거리는 소리를 기점으로 영화는 시공간을 한차례 접는다. 1부에서 통과한 약 나흘의 시간은 2부에서 미세하게 조정된 시간축상의 한 지점으로 변주되고 다른 시야(카메라의 프레이밍)로 보여진다. 이 무렵 과거의 플래시백도 환등기가 비춘 기억처럼 불현듯 틈입해 관계망을 밝힌다. 비선형적 구조 안에서도 일관된 정서적 결속력을 지니는 1부와 2부는 서로간의 차이를 내보인 뒤 그럼에도 변함없는 것에 가닿는다. 요컨대 우리가 놓치거나 오해한 것은 없는지 대조해보게 된다는 맥락이 윤리적 해석이라면, 어느 쪽도 절대적인 것은 없으며 둘 모두 ‘가능’하여 그저 다르게 알려질 뿐이라는 입장은 존재론적 해석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흥미로운 쪽은 후자다.
이쯤에서 조희영의 거의 모든 영화에 산책자들이 있다고 이야기해보고 싶다. 공원과 숲, 벤치가 등장하고 인물들은 그곳 주변을 배회하다가 예외적 만남을 가진다. 공공성 혹은 익명성으로 열린 공간, 개인이 특정한 정체성으로 소급되지 않는 비(非)장소에서 인물들은 곧잘 뒤섞인다. 숲길 벤치에 버려진 가방을 놓고 낯선 이들이 서늘한 만담을 펼치는 단편 <주인들>, 런던 거리에 버려진 캠코더 속 사랑의 기억을 여러 주체와 시점으로 지도화하는 <이어지는 땅>에 이어 조희영 감독의 두 번째 장편영화에서도 발견되는 움직임은 이러하다. 길 위에서 검은 떠돌이 개가 불시에 여러 인물을 관통하고, 서로의 연관을 알 길이 없는 사람들의 그림자가 겹침을 이룬다. 단일한 주인공이 부재하는 조희영 감독의 영화에서 다중시점을 넘어 시점 자체를 흐리는 복수의 주체들, 그들의 집산을 다룬 대위법적 구조는 형식적 시도 이상의 감흥을 준다. <다른 것으로 알려질 뿐이지>에 이르러 조희영 감독은 우리가 ‘나’라는 폐쇄적 관념으로서는 온전히 존재할 수 없다는 인식을 관계의 일상적 층위를 따라 유려히 연주한다. 큰 수술을 앞둔 인주는 공원에서 목줄을 푼 개의 주인을 자신으로 오해한 중년의 행인(기주봉)이 고함치자 그보다 더 큰 위악으로 일갈한다. 수진은 훈성이 자신과의 연애를 무용담처럼 말하는 것을 전해 들은 뒤 말을 전한 상대를 다그치는데, 그녀의 마음이 연약하게 풀어헤쳐지는 곳은 인주를 거칠게 대했던 남자가 운영하는 시계방이다.
자신이 시한부일지도 모른다는 불확실한 미래를 의식하는 인주는 <다른 것으로 알려질 뿐이지>에서 가장 단서가 적고 감정의 진의가 뒤늦게 밝혀지는 인물이며 그래서 가장 모호한 여운을 남긴다. 그림의 주인인 인주를 두고 조희영 감독은 관계망의 구심점인 정호와 가장 닮은 사람이라고 말한다. 공교롭게도 두명의 작업자들은 말이 없다. 두 초상은 꽉 짜인 채 닫혀 있는 ‘캐릭터’가 아니라, 여러 인물과 영향이 통과하는 통로이자 매개의 인간이다. 이들이 존재함으로써, 우리 안에 기쁨과 생채기를 내는 사소한 행각들, 방랑하는 검은 개, 서로 다른 해석을 불러일으키는 깨진 그림은 세계의 한 선상 위에 잠잠히 놓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