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영화계와의 인연은 어떻게 시작되었나.
1996년 서울단편영화제에서 초기작 세편, <샐리의 애교점>, <나의 나이아가라>(1992), <먹이> (1995)가 상영된 것이 시작이었다. 한국 사회에서 이런 작품이 제대로 ‘번역’될 수 있을지조차 확신이 없었는데, 당시 한국 관객들은 교포 감독의 영화를 정말 열린 마음으로 받아들여주었다.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하던 임순례 감독, 뉴욕에서 영화를 공부하고 돌아온 곽경택 감독, 그리고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1996)로 데뷔한 홍상수 감독 등 한국의 젊은 영화인들과 교류를 시작하는 기회이기도 했다. 이후 <서브로사>(2000)가 서울국제여성영화제에 소개되었고, 장편 데뷔작 <우양의 간계>는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상영되었다.
- 최근 정이삭, 셀린 송, 앤서니 심 등 북미의 한국계 영화인들이 할리우드에서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다. 한국계 디아스포라 영화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음을 체감하나.
1996년에 경험했던 한국 관객들의 관심이 지속적이지 못했지만, 지금은 오히려 더 크게 돌아온 것 같다. 저스틴 전, 코고나다, 앤드루 안, 앨버트 신 등 놀라운 재능들이 등장했고, 교포 영화들이 훨씬 더 넓은 관객층에 다가가고 있다. 백인 중심 서사로 돌아가라는 할리우드의 유혹에 빠지지 않고, 교포로서의 목소리를 진정성 있게 이어가길 바란다.
- <먹이>를 통해 배우 샌드라 오의 초기작을 함께했다. 그와의 관계를 궁금해할 독자들이 있을 것 같다.
샌드라는 배우로서 욕구와 목표가 뚜렷한 사람이었다. <먹이> 촬영이 끝나자마자 “더 큰 기회를 위해 LA로 가겠다”고 했고, 캐리어와 붐박스 스피커를 하나씩 챙긴 그를 공항까지 데려다준 사람이 바로 나다. (웃음) <우양의 간계> 각본을 쓰고 있을 때도 가장 먼저 관심을 보여준 샌드라였지만, 당시 <HBO> 드라마 <알리스>(1996~2002) 촬영 때문에 참여하지는 못했다. 최근에도 토론토릴아시안국제영화제에 아시아계 영화인 육성을 위해 기금을 마련하는 등 선배 교포로서 노력을 아끼지 않고 있다.
- 신작 <텐더니스>는 세월호 참사를 직면하고 이태원 참사와의 맥락적 연결성까지 과감하게 탐구한다.
두 참사를 은유와 같은 방식으로 이야기할 수는 없었다. 사건의 진실을 정직하게 다루기 위해 희생자들의 목소리와 뉴스 장면까지 허락을 받아 영화에 담은 이유다. 정부와 사회가 자본주의적 이해관계 속에서 어떻게 공모하였으며, 그 속에서 아프고 다치게 된 세대를 위로하는 일이 중요했다.
- 여성으로서 35년간 감독 커리어를 이어왔다. 국적을 막론하고 결코 쉽지 않은 길이었을 텐데.
한국과 점차 인연을 쌓아가던 시기에 영화적으로는 멈춤이 있었다. 영어를 하지 못하는 한국인 남자와 결혼해 아이들을 키우면서 사이드 트랙을 타게 되었다. 여성 영화인들이 가정 때문에 작업을 중단하는 경우는 너무 흔하고, 한번 동력을 잃으면 다시 주목받기란 어려운 일이다. 비록 영화를 많이 만들지는 못했지만 상업적 목적이 아닌 내가 원하는 방식으로 작품마다 고유한 예술적 진실성을 담고자 했다. 또 한국이나 미국처럼 큰 영화 시스템은 없지만 오히려 그 덕분에 독립영화를 꾸준히 지원하는 캐나다의 예술위원회와 작업을 이어나갈 수 있었던 것도 큰 행운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