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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네코프] 다른 영혼 다른 몸집, 그럼에도 연상호적 영화의 정수, 연상호 감독 신작 <얼굴> 촬영 현장
남선우 사진 백종헌 2025-08-29

2024년 8월의 첫 번째 토요일 아침, 경기도 파주 헤이리의 한 스튜디오는 바깥세상을 따돌린 듯 시원했다. 두꺼운 철제문을 밀고 들어서자 1970년대 피복 공장 일대를 재현한 세트가 에어컨 바람을 맞고 서 있었다. 연상호 감독의 신작 <얼굴> 현장은 그렇게 한 시대를 옮겨놓은 것 같은 디테일을 휘감고 여름을 견뎠다. <부산행> 이래 연상호 감독과 동행한 이목원 미술감독이 “원기옥을 모아왔다”는 조은혜 프로듀서의 감탄에 신현빈 배우가 거들었다. “공장 출퇴근 카드, 칭찬 카드, 휴가 신청서까지 이 안에 다 구현해뒀을 정도다.” 그래서 미술팀은 컷 소리가 날 때마다 부리나케 창문에 붙은 신문지를 매만졌다. 그 옆으로 고개를 돌리자 예스러운 포스터 문구가 눈에 들어왔다. ‘불온삐라를 보면 즉시 신고합시다!’

그날 첫신은 임성재 배우가 분한 공장 사장 백주상의 몫. 그는 시각장애인 전각 명인 영규(박정 민, 권해효)와 공장 노동자 영희(신현빈) 부부 틈에 파고들어 덫을 놓는 인물이기도 하다. 이야기는 영규와 영희의 아들 동환(박정민)이 40년 전 실종된 줄 알았던 어머니의 시신을 발견하면서 시작된다. 연상호 감독이 2018년 펴낸 그래픽노블이 원작이다. 점심시간이 끝난 대낮, 박정민 배우도 스튜디오에 도착했다. <변산>에 출연하면서 친해졌다는 동갑내기 배우들이 반갑게 인사를 나눈 후 촬영이 끝난 신현빈이 먼저 떠났고, 박정민이 배턴을 넘겨받았다. 그가 분장팀이 켜준 스마트폰 플래시의 도움을 받아 렌즈를 끼자 연상호 감독도 모니터 앞으로 향했다.

손이 남는 스태프들이 분주히 밖을 나설 채비를 하더니 백주상 사장의 술상에 올라갈 무알코올 맥주와 마른안주를 구하러 떠났다. 편육은 제작팀이 어젯밤 홍대 편의점 열 군데를 돌며 미리 구해뒀다고. 얼마 지나지 않아 쥐포 굽는 냄새가 났고, 단출한 상차림 주위로 배우들이 둘러앉았다. 백주상이 영규에게 도장을 파라고 주정 부리는 장면을 찍기 위해서였다.

“70년대 이태리 리조트룩”을 입어봤다는 임성재 배우가 실랑이 신을 함께 찍는 신현빈 배우에게 물었다. “대본에 적힌 ‘득달같이’에서 ‘득달’이 무슨 뜻이지?” 누구도 그 어원을 쉽사리 답하지 못하자 연상호 감독이 나섰다. “서로를 탁! 탁! 탁! 밀치는 느낌이 더 나야 할 것 같아요.” 디렉션을 알아들은 배우들이 고성을 주고받은 후 신현빈 배우가 임성재 배우를 걱정스럽게 쳐다봤다. “프로폴리스 스프레이 있는데, 목에 좀뿌릴래?”

<얼굴>에 얼굴을 드러내서는 안되는 영희 역을 맡은 신현빈 배우는 대기 내내 눈썹 가까이 집게 핀을 꽂고 있었다. 촬영 중에는 머리카락을 길게 늘어뜨려야 하니 쉴 때만이라도 머리 넘길 자유를 누리고 싶은 것이 다. “얼굴이 나오지 않으니 분장 시간이 길지 않고, 지저분한 느낌의 가발을 착용하면 된다”는 이점이 있지만 톤다운 메이크업은 빠질 수 없다. 그가 손과 팔까지 짙게 칠했다며 소매를 걷어 올렸다. “어, 오늘 그러데이션이 잘됐네!”

백 사장이 영규에게 술 따르는 컷을 모니터하기 위해 모인 두 배우가 폭소했다. “백 사장 웃음소리가 거의 임꺽정이야!” 임성재 배우가 못내 쑥스러워하자 박정민 배우가 덧붙였다. “백 사장, 술을 너무 많이 마신 거아냐?” 무알코올 맥주와 보리차 음료를 번갈아 마시며 잔을 비운 두 사람은 화장실로 직행했다. 모니터에서 시선을 떼지 못한 연상호 감독이 읊조렸다. “영규에게서 나를 봤어. 너무 슬픈데?”

백 사장이 영규에게 술을 들이붓는 신을 찍기 전, 의상 팀이 여벌을 확인했고, 연상호 감독은 잠든 인물들의 자세를 직접 잡아줬다. 박정민, 임성재 배우도 리허설을 반복했다. 이들이 몸을 적셔가며 완성해야 하는 장면인 만큼 긴장감이 맴돌던 순간이었다. 이날 박정민 배우는 총 5번 머리를 말려가며 오케이 사인을 받아냈 다. 웃던 표정을 일그러뜨리며 신을 마무리하는 박정민 배우에게 연상호 감독이 “권해효 선배를 봤다”며 칭찬했다. 박정민이 젊은 영규를, 권해효가 노인 영규를 연기하기 때문이다.

<얼굴> 쓰고 연출한 연상호 감독

“아내와 TV로 <그것이 알고 싶다>를 보고 있었다. 어떤 에피소드였는지 정확히 기억나지는 않지만 아주 영화적인 이야기였다. 제작비가 그리 크지 않은 방송일 텐데 어떻게 이렇게 흥미롭게 만들었을까 궁금했고, 나도 그런 식으로 무언가 해볼 수 있지 않을까 싶었다. 지금까지 OTT 시리즈, 제작비 큰 극장 영화 등 여러 규모의 작업을 해왔다. 이번에는 다른 영혼을 가진 영화를 만들어보고 싶더라. 그런데 다른 영혼을 가지려면 몸집도 달라야 한다. 저예산으로 찍자고 결심한 뒤 만화였던 <얼굴>의 시나리오를 쓰고, 배우들을 모았다. 촬영 일주일째인 지금, 너무 재밌다! 대부분 과거에 호흡을 맞춰본 배우들이라 영화 동아리처럼 영화 생각만 하면서 편하게 찍고 있다. 그래서 해방감이 느껴지는 한편 미안한 마음도 크다. 스태프들도 이 현장에 엄청 공을 들이고 있으니까. 어쩌면 원작을 본 분들은 엔딩을 가장 궁금해하지 않을까? 배우가 가진 얼굴의 틀 안에서 전혀 다른 이미지를 만들어보려고 작업 중이다. 그 결과물이 어떻게 나오느냐에 따라 관객의 감상도 많이 달라질 것 같다.”

임동환, 임영규 역 박정민 배우

“<염력>을 촬영할 때인가, 연상호 감독님에게 <얼굴> 만화책을 선물받았다. 그때 재밌게 읽어서 좋은 인상이 남아 있던 작품이라 출연 제의를 받고는 바로 하겠다고 답했다. 시대적 갈등, 세대간 갈등을 한국 현대사와 엮어서 풀어내는 방식이 굉장히 멋지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만화를 다시 보니 감독님이 처음 제안한 동환이 라는 역할이 할 게 별로 없는 거다. (웃음) 정확히는 이렇게 말했다. ‘이 캐릭터 심폐소생술을 많이 해야 할 것 같은데요?’ 그러니 감독님이 내 뉘앙스를 파악하고 동환, 영규 부자를 1인2역으로 해보는 건 어떻겠느냐고 말씀하셨다. 그게 바로 내가 원한 것이라 덥석 물었다! 피해의식이 강해 성공에 대한 열망이 컸던 영규가 목표를 이뤄냈을 때, 사실 그의 자식 동환은 전혀 그럴 필요 없는 인물이 된다. 그 정반대 위치를 곧 두 인물의 차이로 표현해보고 싶었다. 또한 영규가 시각장애인이지만 개인적 사명감 때문에 택한 역할이라 할 수는 없는 것 같다. 시각장애를 가진 우리 아버지를 포함해 그분들의 고충을 내가 다 알 수는 없어도 그 불편을 조금씩 알아갈 수 있다면 좋겠다는 바람이 있기는 하다. 소품팀, 미술팀, 촬영과 조명 모두 내가 시각장애인처럼 보일 수 있게 도와주고 있기 때문에 정확한 구현에 큰 스트레스는 받지 않으려 하고 있다.”

정영희 역 신현빈 배우

“영희는 ‘좋은 사람’이다. 내성적이지만 정의롭고, 남을 도와주면서도 자기 일에 성실하다. 큰 편견이 없으니 영규와도 결혼했을 테다. 그런데 그 좋은 모습이 타인을 불편하게 만드는 순간들이 있었을 것 같다. 가만히 있으면 되는데 문제를 끄집어내는 것으로 보이지 않았을까. 그 간극을 얼굴을 보여주지 않고도 표현하는 법을 고민했다. 그만큼 소리도 중요했는데, 앞이 보이지 않는 영규가 호감을 느낄 수 있으면서도, 공장 사람들을 피곤하게 만들 수 있는 목소리가 필요했다. 말수가 적어 말하는 박자도 톤도 엇나가곤 하는 사람을 생각하며 연구했는데, 얼굴이 보이지 않는 역할이니 후시녹음도 자유롭게 할 수 있을 것 같다. (웃음) 살아보지 않은 1970년대를 연기하기 위해서는 <미싱타는 여자들> 같은 다큐멘터리도 보고, 어머니와 대화를 많이 나누며 그 시대적 배경을 익히려 했다. 소위 말하는 ‘옛날 글씨체’까지 눈에 담아뒀다. 전단지를 직접 써서 돌리는 장면을 준비하기 위해서였다. 요즘은 자음을 통통하게 쓰는 편인데 오래전엔 모음 자간을 넓게, 궁서체에 가까운 정자의 글씨체로 썼더라. 나도 글씨를 잘 쓴다고 생각하는 편인데 과거 풍으로 바꾸는 건 쉽지 않았다. 다른 배우들도 도전해보다가 나만의 숙제로 집에 가져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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