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자연이 네게 뭐라고 하니>에서 동화(하성국)와 준희(강소이)의 아버지 오령(권해효)은 함께 뒷산을 올라 산어귀에서 막걸리를 마시며 대화를 나눈다. 이때 두 사람의 주변은 초록색 풀로 둘러싸여 있다. 저 멀리 강이 보이고, 풀이 흔들리고, 이들은 순간 완전한 자연 속으로 이동한 듯하다. 프레임 안쪽을 채우고 있는 풀 이미지는 두 사람이 있는 공간을 일순간 다른 시공간처럼 보이게 만든다. 풀 이미지는 화면에 자연이라는 요소를 불러들이고 시공간을 자연의 힘 속으로 끌어당긴다. 이들은 분명 함께 뒷산을 올랐다. 하나 지금 두 사람은 정녕 어디에 있는 걸까.
시공간을 불확정적으로 주조하는 홍상수의 영화에서 인물의 동선과 장소가 이어지지 않거나 불일치하는 것은 낯선 일이 아니다. 하지만 이 영화에서 자연은 유독 이상한 시공간의 감각을 자아낸다. 오령이 잠시 자리를 비우자 카메라가 줌아웃하면서 반듯하게 정돈해놓은 정원의 조경이 드러난다. 자연은 현실과 외따로 떨어져 있는 것 같지만, 프레임을 조금만 비켜나면 우리는 다시 인접한 현실로 되돌아온다. 동화가 방문을 열면 집 안이 아니라 산속에 있는 컨테이너로 연결되는 것처럼, 이 영화에서 자연은 연속과 불연속, 내부와 외부를 이상한 방식으로 교란한다. 자연은 ‘여기’를 떠나 ‘저기’로 가야 도달할 수 있는 피난처이면서 동시에 뒷산처럼 조악한 현실의 일부이기도 하다. 그 모순 속에서, 우리는 자연과 인간의 관계가 결코 이분법적으로 고정되지 않음을 경험하게 된다.
시공간을 불확정적으로 주조하는 홍상수의 영화에서 인물의 동선과 장소가 이어지지 않거나 불일치하는 것은 낯선 일이 아니다. 하지만 이 영화에서 자연은 유독 이상한 시공간의 감각을 자아낸다. 오령이 잠시 자리를 비우자 카메라가 줌아웃하면서 반듯하게 정돈해놓은 정원의 조경이 드러난다. 자연은 현실과 외따로 떨어져 있는 것 같지만, 프레임을 조금만 비켜나면 우리는 다시 인접한 현실로 되돌아온다. 동화가 방문을 열면 집 안이 아니라 산속에 있는 컨테이너로 연결되는 것처럼, 이 영화에서 자연은 연속과 불연속, 내부와 외부를 이상한 방식으로 교란한다. 자연은 ‘여기’를 떠나 ‘저기’로 가야 도달할 수 있는 피난처이면서 동시에 뒷산처럼 조악한 현실의 일부이기도 하다. 그 모순 속에서, 우리는 자연과 인간의 관계가 결코 이분법적으로 고정되지 않음을 경험하게 된다.
우리는 언제나 자연 속에서 자연과 함께 있지만 그 사실을 쉽사리 알아채지 못한다. 우리의 삶이 이미 자연의 변모하는 장에 놓여 있음을 감각하기 위해서는 식물의 사유가 필요하다. 루스 이리가레와 마이클 마더가 주고받은 서신 교환을 모은 저서 <식물의 사유>는 식물을 중심으로 생명 존재에 대한 인식을 다시 깨닫고 생태학적인 감각을 회복하는 성찰을 제안한다. 이 책에서 마이클 마더는 “식물 세계에서 피난처 찾기”라는 제목의 글로 첫 번째 답신을 쓴다. 유년 시절 이민자로 망명하며 뿌리 뽑힘의 추방을 당했던 그는 이동이 아닌 정체를 존재의 방식으로 갖는 식물 세계에서 난민으로서의 삶에 대한 피난처를 찾는다. 그는 이렇게 덧붙인다. “식물 세계에서 피난처를 찾는 것은 자연 속에서 식물과 함께 있는 것과 같을 뿐 아니라 우리의 삶, 우리의 반복되는 일상, 우리의 심리적 공간을 식물들을 중심으로 재구성하는 것과 같지 않을까요?” 그렇다면 영화는 어떻게 이미지 중심적 사유를 통해 심리적 공간을 만들어내고 이를 식물을 중심으로 재구성할 수 있을까?
화면을 가득 채운 풀의 이미지에 그 답과 유사한 것이 있을지도 모른다. 이수정 감독의 <풀>에서도 풀의 이미지를 종종 볼 수 있다. 이 영화에서 “풀”은 대마초로 알려져 있는 식물의 다양한 이름들을 포괄하는 고유명사로 등장한다. 영화의 영문 제목은 풀을 grass, green 등으로 번역하지 않고 풀을 그대로 영문 발음으로 표기한 “Pull”이다. 이처럼 제목을 특정한 뜻으로 단정 짓지 않는 것은 대마초가 가진 여러 개의 이름과 정체성을 하나의 명명으로 수렴시키지 않기 위함일 것이다. 대마초는 식물일 뿐 아니라 특정한 병증을 앓고 있는 자들을 위한 대안적인 의학 치료제이며, 기후 위기에 대응하기 위해 재배되는 작물이고, 전형적인 삶의 형태에 속하지 못하고 경계를 떠도는 이들을 위한 공동체의 물적 조건이기도 하다. 영화는 대마초의 여러 정체성과 관계 맺으며 수감될 위험을 무릅쓰고 대마초를 향해 이끌리는(pull) 사람들의 사정을 조명한다. 인터뷰로 등장하는 사람들은 대마초와의 만남이 그들의 감각뿐 아니라 삶 전체를 완전히 바꾸어놓았다고 증언한다. 대마초가 마약이라는 단순한 금기의 주문을 조금만 넘어서면, 우리는 식물이 어떻게 삶과 긴밀하게 얽히며 그 태도와 방식을 생태학적으로 재구성하는지 살펴볼 수 있다.
영화는 대마초와 얽힌 사람들의 증언을 수집할 뿐 아니라 대마초를 직접 재배하고 수확하는 과정을 보여준다. 남북 접경지역에서 대마초를 재배하는 단체는 수익을 내기 위한 작물 농사가 아니라 지역 생태계와 기후 위기를 타파하기 위한 운동으로서 대마초를 전략적으로 기르고 수확한다. 대마와 지구, 그리고 남북 관계의 지역성이라는 문제가 식물을 중심으로 공명하고 있는 셈이다. 공무원의 관리 감독하에 재배된 대마초 이파리는 모두 땅에 묻히고, 단단한 줄기만이 남아 삼이나 베를 짜는 재료로 유통된다. 그런데 이듬해 대마 잎을 묻었던 자리에 다시 대마가 자라난다. 식물의 생명은 인간의 관리와 제도가 구획해놓은 경계를 뚫고 뻗어나온다. 초록색 줄기와 잎사귀를 가진 대마초가 영화의 화면을 채울 때, 그것은 자연이 연출한 풍경인 동시에 대안과 경계 밖에서의 삶을 모색하는 문화적 지형을 상징하는 이미지로서 나타난다. 이때 식물성은 눈앞에 보이는 것을 초과해서 출현한다. 이를 식물성이 이미지 안팎으로 흘러넘치는 순간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이 영화에서 식물의 이미지는 피난처로 기능하는 것을 넘어, 식물과 연계된 인간의 삶이 적극적으로 변형되고, 하나의 이름과 관념으로 굳어져 있던 사실들이 역동적으로 변모하는 과정을 포착하는 다큐멘터리의 역량과 분명 맞닿아 있다.
영화에 내레이션처럼 등장하는 간자막 텍스트는 대마초를 ‘너’라고 지칭하며 친근하게 말을 건네는 일종의 서간체 형식을 취하고 있다. 앞서 언급한 루스 이리가레와 마이클 마더의 <식물의 사유> 또한 두 사람이 나눈 서신 교환의 형식을 취한다. 그런데 이 책은 두 사람의 편지가 교차하는 형식이 아니라 루스 이리가레의 글을 전반부에, 마이클 마더의 편지를 후반부에 모아놓고 있다. 그러므로 이 글은 물음과 응답의 교차를 통한 즉각적인 몽타주보다는, 서간체를 통해서만 이를 수 있는 사유의 경로를 강조하는 것처럼 보인다. 서간체는 상대방을 전제하지 않고서는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것은 이탤릭체처럼 상대를 향해 기울어지는 언어다. 하지만 동시에 상대에게 말이 완전히 도달할 수 없을 거라는, 도달 불가능성 속에서만 쓰여질 수 있는 비대칭적 언어다. 서간체는 주고받는 상호작용을 통해 완결되지 않는다. 타자의 부재 속에서 성립하는 이 언어는 그러므로 하나의 언어로 완결되는 대신 무한히 지연되는 과정 속에서 열려 있다. 인류학자 팀 잉골드에 의하면 조응(correspondences)은 ‘사이’에서 거래처럼 발생하는 상호작용과 달리, ‘와중’에서 어우러져 흐름 속에서 서로를 변형시키는 일이다. 식물의 세계는 언제나 명확하게 구분되지 않는 와중 속에서 변화하며, 그리하여 식물과 조응한다는 것은 식물의 관점에서 세계를 살아내는 것이다. 도달할 수 없는 수신자를 향해 무한히 열려 있는 서간체는 언어를 단정 짓지 않음으로써 세계와 조응하는 방식 중 하나다.
식물은 내부와 외부가 쉬이 구분되지 않고, 결정될 수 없고, 끊임없이 변한다. 식물적 생명은 비결정성, 진동, 다양성을 가지고 있다. 이처럼 식물이 경계를 넘어 팽창하는 과정을 보여주는 차재민 작가의 <광합성하는 죽음>에도 서간체 형식의 내레이션이 등장한다. 승려들이 시체가 썩는 과정을 관찰하는 수행을 통해 구상도를 그렸던 것처럼, 이 영화에서는 과일과 채소가 부패하는 과정을 기록하는 일종의 새로운 형식의 구상도를 구현하려 한다. 한데 식물의 죽음은 생명의 종결이 아니라 곰팡이가 피고 파리, 곤충들이 날아드는 생태계가 펼쳐지는 또 다른 생의 활력으로 이어진다. 이때 내레이션은 일본의 사찰에서 구상도를 직접 보기 위해 작가와 연구자가 리서치를 주고받으며 서신을 교환한 내용을 낭독한다. 하지만 이 편지는 비대칭적이다. 연구자가 작가에게 보낸 편지만이 낭독되고, 작가가 연구자에게 보내는 답신은 생략되어 있다. 내레이션은 분명 서간체의 형식을 띠고 있지만, 한 사람의 목소리만이 들리는 기묘한 상황이다. 목소리는 대화와 독백 가운데 어디에도 분명히 속하지 않는다. 이 내레이션은 서간체라고 하기도 불완전하고, 독백이라고 하기에는 지나치게 열려 있다. 관객은 승려들이 기억 속에 떠오르는 이미지에 의지해 구상도를 그렸듯이, 생략되어 있는 대화의 빈틈을 스스로 상상해야 한다. 이 영화의 서간체는 발신자와 수신자 사이가 아니라 관객의 참여를 통해 이루어진다. 서간체를 상상 속에서 재구성함으로써, 관객은 생과 죽음의 경계를 흐트러트리며 팽창하는 식물의 사유에 동참하게 된다.
화면을 채운 풀의 이미지의 매혹으로부터 출발했지만, 위의 사례들이 보여주는 것은 식물성은 화면에 식물의 이미지가 출현하는 것을 넘어 타자 그리고 세계와 조응하는 언어의 방식을 탐구하는 영화적 시도들로 얼마든지 확장될 수 있다는 사실이다. 한국독립영화협회에서 발간하는 <독립영화> 제47호에 수록된 글 <기억하는 식물>에서 차한비 평론가는 <개의 역사>(2017)와 <누에치던 방>(2016)을 연결 지으며 두 영화에 나타나는 “적극적 수동성”을 일종의 식물적 태도라고 말한다. 두 영화는 각각 다큐멘터리와 극영화로 분류되지만 기승전결이 없거나 완결되지 않는 태도를 공유하고 있다. 글에 의하면 두 영화에서 카메라는 “기억하는 식물”로서, 화면의 슬픔에 적극적으로 개입하는 대신 기억하고 저장하는 태도를 견지한 사물로서 존재한다. 이 글에서는 식물성 대신 ‘식물적’이라는 비유를 채택하고 있기는 하지만 영화가 픽션과 다큐멘터리라는 형식으로 분류되기 이전에 식물적이라는 태도를 통해 연결될 수 있다는 점은 특기할 만하다. 물론 식물성을 주류적인 것의 대안이나 종을 횡단하는 속성에 대한 손쉬운 비유로 여기자고 말하려는 것은 아니다. 다만 거대 담론이나 학제적 언어에 기대지 않으면서 영화의 실천을 응시하려는 작은 시도들을 통해 독립영화라는 제도적 언어로 포착되지 않는 관습 바깥의 시도들을 말할 수 있지 않을까. 식물의 사유는 습관처럼 반복되는 위기의 진단을 넘어, 지표로 환원되지 않는 요소들을 사유하는 연습을 제안한다.
지금 이 글이 쓰인 시점에서 곧 개봉을 앞둔 <다른 것으로 알려질 뿐이지>의 조희영 감독의 첫 장편 <이어지는 땅>은 제도의 안쪽이 아니라 바깥에서 건져 올린 언어로 이야기되어야 하는 영화다. 어쩌면 이 영화는 형식과 이야기의 새로움을 성취의 척도로 여기는 관점에서는 다소 느슨하고 상투적인 영화처럼 보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 영화의 리듬과 연결 방식은 조금 다른 차원에서 파악될 필요가 있다. 인물들을 걷고, 말하고, 움직이게 하는 방식의 기저에 식물이 전제되어 있기 때문이다. 각각 런던과 밀라노를 배경으로 낯선 땅에 도착한 인물들의 모습은 식물이 새로운 토양에 뿌리를 내리는 과정을 연상시킨다. 그리고 영화는 노골적으로 식물에 대한 비유를 드러낸다. 주인공 이원(공민정)의 직업은 조경사다. 그러나 공원에서 땅에 떨어진 씨앗을 줍는 장면을 제외하면 그녀와 식물이 직접 접촉하는 순간은 거의 없다. 식물은 이미지로서의 자연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인물들의 관계와 시간의 흐름 속에서 은밀히 드러난다. 극 중에서 이원은 거리에서 우연히 만난 남자에게 동일한 조경을 서로 다른 토양에서 가꾸는 실험에 대해 이야기한다. 예상과 달리 두 조경은 크게 다르지 않게 자라난다. 인간의 관점에서 보자면 이는 식물이 개체로서 가진 특성이 강하기 때문이지만, 식물의 관점에서 이를 설명하자면 모든 땅이 이어지기 때문이다.
팀 잉골드는 사물들이 서로에게 근본적으로 열려 있으며, 나뉘지 않는 단일한 생성의 세계에 함께하고 있다고 말한다. 마찬가지로 이 영화에서 인물들간의 만남이 이루어지는 방식은 본래 연결되어 있던 것들이 잠시 접촉하여 서로 이어져 있음을 확인하고 다시 흩어지는 일이라고 설명할 수 있다. 이 만남의 방식은 꽤 서간체적이다. 영향을 긴밀하게 주고받지는 않지만, 상대를 전제하지 않고서는 나라는 개체를 유지할 수 없다는 깨달음이 관계의 조건이 되기 때문이다. 호림과 이원이 처음 만나는 순간은 호림이 길에서 우연히 주운 캠코더 속이다. 화면 안에서 잠에서 깬 이원이 카메라를 바라보며 “언제부터 보고 있었어?”라고 묻자, 호림은 놀라서 캠코더를 닫는다. 이 반응의 연쇄 속에서 이원의 시선은 호림에게 닿는다. 두 사람은 물리적으로 접촉하지 않았지만 분명히 연결되어 있다. 동일한 상실의 아픔을 공유하는 두 사람은, 그 사실만으로도 서로를 지탱한다. 이 사실이 주는 위안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나는 아직 알지 못하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