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미생>에서 박 과장은 회사 돈을 몰래 챙겨 먹는 데 달인이다. 사내 최고의 영업사원인 박 과장은 아무리 열심히 일해도 월급 받는 게 전부인 걸 억울하다고 여기고, 계약이 성사될 때마다 업체로부터 뒷돈을 또박또박 받는다. 그러다가 아예 백마진을 구조적으로 설계한다. 가족이 경영하는 유령회사를 만들어 현지거래처로 위장해 거액을 챙긴다. 오 과장을 중심으로 한 영업 3팀 직원들은 이를 의심했고, 결국 인턴 장그래의 결정적인 신의 한수로 박 과장의 비리는 만천하에 드러난다. 감사팀에 끌려가는 박 과장의 뒤를 보며 오 과장은 읊는다. “보상받는 거라 생각했을 거다.”
베스트셀러 작가 A의 갑질은 업계에 소문이 자자하다. A는 출판사 직원을 매니저처럼 부려먹는다. 자신의 책 소개하는 행사에 필요한 도움을 받는 수준이 아니라, 개인 일정에 대동한다. 그가 출판사를 방문하면 모두가 도열해 90도로 인사한다. 대표는 회사 매출에 절대적 기여를 한 작가가 혹시나 후속작을 다른 출판사와 작업할까 봐 늘 전전긍긍이다. 그래서 갑질을 해도 참는다. 아니, 본인 스스로가 철저히 을의 신분을 지킨다.
막상 억울하다는 쪽은 A다. 자기 때문에 출판사가 먹고사는데, 인세는 고작 10%라면서 불평이다. 한번쯤 하는 푸념이 아니라, 하루에 한번은 내뱉는다. A는 안다. 그럴수록 좋은 대접을 받는다는 것을. 출판사는 A의 휴대폰도 교체해주고 고가의 노트북도 선물한다. 여기에 익숙해지니, A는 도를 넘는 요구를 한다. 부모의 장례식장에도, 자녀의 결혼식장에도 부른다. 작가와 출판사가 이런 일에 서로 관심을 갖는 건 흔한 일이지만, A는 다른 사람에게 돈 주고 시켜야 할 일을 구체적으로 지시한다. 직원들이 작가의 갑질에 진절머리가 난다고 하자 대표는 어쩔 수 없다는 표정으로 말한다. “저 사람은 이게 다 보상이라 생각하거든.”
보상. 현대 한국인을 완벽히 지배하는 단어다. 사람들의 소비 유형을 분석할 때 흔히 등장하는 표현인 보상 심리와는 결이 조금 다르다. 보상 심리는 누군가를 설명하고픈 제3자의 도구적 언어다. 그래서 당사자는 자기 심리가 무엇인지 잘 모르고 관심도 없다. 하지만 요즘 한국 사람들은 보상이란 단어를 직접적으로 사용하며 자신을 드러낸다. 남들만큼 보상을 못 받는다며 자신을 비하하고, 남들보다 보상을 더 받아야겠다며 자신이 괴물이 된 줄도 모르고 질주한다. 조직에 위해를 가하고, 주변을 괴롭힌다. 제일 중요한 것은, 그럼에도 당당하다.
보상, 이는 공동체를 푸석하게 만드는 강한 연료다. 대한민국이 부동산 공화국의 면모를 갖춰가면서 여기저기서 가장 많이 들리는 말이 바로 이 보상이다. 남의 집 가격 오른다고 박탈감을 느끼고 내 집 가격 오른다고 우월감을 느끼는 거, 절대 당연한 거 아니다. 남의 보상이 커 보일 때 위축되고 내 보상이 커 보일 때 우쭐대는 건 어느 정도까지야 인간의 본성이지만 한국인처럼 더 낙담하고, 더 의욕에 넘치는 건 단연코 사회가 그렇게 만든 거다. 사회가 병들었는데, 개인이 어떻게 말짱하겠는가.
그 한국에서 벌어지는 일은 기가 막힌다. 보상이 시원찮다고 여기는 이들의 집단행동은 이런 수준이다. 얼마 가격 이하로 집을 매매하지 못하게 공인중개소를 협박한다. 목동이 아닌데도 목동이 들어가야 한다며 갑작스레 아파트 이름을 바꾸기도 한다. 공공분양아파트 입주자들은 공공의 흔적을 없애기에 여념이 없다. 그러다가 보상을 방해하는 요소가 눈에 보이면 반사회적 행동을 서슴지 않는다. 임대아파트와는 기어코 분리되어야 하고, 주변에 장애인 관련 시설이 들어오는 건 결사반대다. 미안함은 전혀 없다. 그러면 안되는데, 그래도 된다면서 떳떳하다. 내 보상을 스스로 지키는 것이라 생각해서다. 그래서 본인들을 정의롭다고 여긴다. 보상이란 단어의 힘은 이토록 지독하다.
능력주의에 기반한 차별의 역사야 오래되었지만, 보상이란 말이 흔하게 사용되면서 더 노골적으로 진화했다. 사회적 약자를 배려한 입학전형 합격자를 운 좋게 이 학교 다닌다면서 무시하고, 농어촌 특별전형을 도시에서 내신이 불리하니까 꼼수를 쓴 인간들로 묘사한다. 자신보다 노력을 안 한 사람들이 자신과 동급의 보상을 받고 있다고 여겨서다. 그게 싫으니, 어떻게든 밀어낸다. 그러니 비정규직 노동자가 정규직이 되는 건 도둑놈 심보라 생각한다. 남들 공부할 때 편하게 산 인간들이 누려서 안될 보상이니까 말이다. <미생>에서 검정고시 출신 장그래가 여기저기에 치이며 사람대접을 못 받는 이유도 이거였다. 고졸 주제에 이 회사를 다닌다고?
그 보상의 힘에 지배받는 연령대는 점점 낮아지고 있다. KBS <다큐 인사이드> ‘인재전쟁–의대에 미친 한국’에 등장한 학생은 이렇게 말한다. “의사가 되어서 롯데월드가 보이는 곳에서 살고 싶어요.” 아마 그 옆의 높은 롯데월드타워를 말하는 것 같다. 시그니엘 레지던스라 하는데, 최근 매매 실거래가가 94억원이다. 공부하면 보상이 따라온다 정도로 말하던 분위기가, 의사 되어서 부자 되라면서 구체적으로 다그치는 시대가 되었다. 이를 선명하게 보여주는 멋진 표본이었다. 과거에는 그래도 ‘분에 넘치는 보상을 받았다’면서 조금은 겸손할 줄 아는 틈이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모든 게 당연히 받아야 할 정당한 몫이다. 그걸 건드리면? 정의가 파괴되었다면서 격노한다.
엉뚱한 상상을 한다. 보상이란 단어가 사라지면 좋겠다고. 조지 오웰의 소설 <1984>에서처럼 말이다. 빅브라더가 통제하는 세상에서 단어는 제한된다. good이 모든 긍정을 표현한다. ungood이 모든 부정을 담아낸다. 아름답다? 그냥 plus+good이다. 환상적이다? 그냥 doubleplus+good이다. 언어가 납작해지면 인간의 상상력도 납작해지니까 말이다. 그러니까, 나는 아주 못된 생각을 하는 중이다. 사람들이 보상이라면서 늘어놓는 말들을 들을 때마다 고약해진다. 불평등을 옹호하고 차별과 혐오는 별수 없다는 논리를 보상이란 단어로 덮을 때마다, 저 괴상한 생각을 줄일 방법을 찾는다. 그래서 상상한다. 사람들이 보상이란 말을 쓰지 않는 세상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