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K 디지털 복원판으로 개봉한 소마이 신지의 <이사>(1993)와 <여름정원>(1994)을 연이어 관람하면서, 원본의 저력에 다시금 감탄하고 말았다. 세상에 나온 지 30여년이 흘렀음에도 여전히 이곳이 가장 싱싱한 원천이며, 그 사실이 쉽게 갱신되지 않으리라는 예감은 좋은 것일까. 감독들에게는 얼마간 좌절을 안길 일이겠지만, 적어도 평자에게는 그 원류로 부담 없이 돌아가 언제든 빠져 놀 수 있으니 즐거운 일이다. 그런 흥분을 새삼 안겨준 몇몇 장면들을 면밀하게 되짚어보고 싶다.
아빠와 어린 딸이 화면을 누비며 친밀하게 몸을 부딪쳐 놀고 있다. 오늘은 아빠가 집을 떠나는 날. 저 멀리 이삿짐이 실린 트럭이 보이자 잘 지내라는 말을 뒤로한 채 아빠가 화면 후경으로 멀어져 차에 오른다. 숏의 말미, 그 모습을 물끄러미 지켜보던 딸이 갑자기 뛰기 시작한다. 다음 장면에서 딸은 마치 도망가는 아빠의 숏을 붙잡으려 맨몸으로 그 숏에 뛰어든 사람처럼 트럭 꽁무니를 쫓아 맹렬히 달리는 중이다. 카메라는 이 가련하고 절박한 동작을 달리는 트럭 위에서 끊김 없이 주시하고, 아이가 뻗은 손이 트럭 뒤 칸에 탄 이의 손에 닿아 차에 오르는 데 성공하는 아슬아슬한 순간을 담아내기 이른다. 아이의 안도하는 표정과 함께 숏이 끝난다. 딸이 감행한 육체적 운동이 두숏 사이에 들어설 심리적이고 물리적인 거리를 단숨에 당겨 부녀를 같은 동선, 한 프레임 안에 다시 위치시키는 것이다. 비록 앞좌석에 앉은 아빠의 얼굴이 보이지 않아도, 딸의 간절한 의지와 바람이 성립시킨 달리기 롱테이크가 이들을 분명 한 프레임 안에 속하게 만들었다고 말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 이어지는 장면에서 딸은 아빠의 새집을 구경하다 옷장 앞에서 말한다. 아빠와 나의 옷장 내부를 잇는 통로가 있다면 좋겠어.
<이사> 도입부에 펼쳐진 이 대목은 딸 렌이 희망하는 연결과 접합의 움직임으로 작동한다. 무심하게 떠나버린 아빠의 트럭에 결국 오르게 하는 렌의 힘찬 달리기, 결합을 향한 운동은 그러나, 이 세계가 아이에게 허락한 단 한번의 환상, 단 한번의 쾌감이었을까. 엄마와 둘이 살게 된 상황을 여전히 받아들이지 못하는 렌이 엄마를 피해 작은 욕실로 들어가 문을 걸어 잠글 때만 해도, 이 장면이 잠재한, 혹은 일으킬 거센 파동을 짐작하기는 어렵다. 익명의 소년들이 야구를 하는 나른한 오후의 풍경이 잠시 삽입된 후, 영화는 욕실 문 앞에 체념하듯 앉은 엄마 나즈야로 돌아와, 그가 사태를 해결하러 온 남편과 지인들에게 내뱉는 말로 이 상황이 2시간 넘게 지속됐음을 일러준다. 이내 욕실 앞 더없이 비좁은 복도는 서로를 탓하며 충돌하는 부부와 이들을 말리는 지인 둘로 험악하게 들썩이지만, 정작 욕실에서는 기척이 나지 않는다. 부모의 매서운 말들을 고스란히 듣고 있을 아이의 얼굴로 영화 또한 고개를 돌리지 않는다. 어른들의 수치심 없는 다툼의 광경을 멈춰 세우는 건 욕실 안에서 불현듯 날카롭게 들려온 렌의 음성이다. “왜 낳았어?” 그 순간, 나즈야의 주먹이 욕실 문 유리를 깨부숴, 렌의 공간으로 불쑥 침투하고, 그제야 화면에는 겁에 질린 렌의 얼굴이 맺힌다.
소마이 신지의 세계에서 롱테이크는 주로 활동성의 측면에서 이야기되곤 하지만, 적어도 이 장면에서 욕실 밖 어른들에게 집요하게 머무는 롱테이크는 이 영화가 함부로 넘어서지 않으려는 어떤 경계를 환기하고 감각하게 한다. 이는 상처 입은 아이의 내밀한 영역을 어른들의 세계에 대한 손쉬운 반응숏으로 만들지 않으며, 인위적으로 두 세계를 밀착해 통합하지 않겠다는 영화의 의지로 다가오기도 한다. 욕실 바깥의 격렬한 싸움을 주시하는 동안, 우리는 보이지 않는 욕실 안의 존재를 상기하는 동시에 둘 사이에 해소될 수 없는, 하지만 결국 수용해야만 하는 간극을 생각하게 된다. 그러니까 인물들의 거침없는 운동성으로 긴장감이 발생한다고 해도, 이 장면의 롱테이크는 그 움직임이 도달할 수 없는 영역, 닿을 수 없는 경계 너머를 응시하고 있다. 그것은 부부의 싸움을 전면화하는 부모의 시간이지만, 문 안쪽에서 이를 침묵하며 견디는 아이의 시간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어른들의 행태로 채워진 이 긴 숏은 그들 중 한명의 손이 처절한 상처를 무릅써야만 비로소 아이의 숏으로 건너갈 수 있다. 부드러운 편집술로 양자를 교차하는 방식은 아이가 혼자 버틴, 영화에 세세히 새겨질 수 없는 120분이 넘는 시간에 대한 예의가 아닐 것이다. 욕실 문을 깨뜨려 피를 뚝뚝 흘리는 나즈야의 손은 이 아이를 바라보며 숏을 구축한 소마이 신지의 손이기도 하다. 아이의 비밀스러운 영토로, 찢긴 마음으로 대가 없이 입장할 수는 없는 일이다.
카메라는 욕실에서 나와 홀로 화장실로 걸어가는 렌의 행로를 천천히 따라가고, 변기에 앉아서야 감정을 표출하는 그의 얼굴로 가만히 다가간다. 이 장면은 온전히 렌에게 주어진다. 카메라가 오직 렌에게 몰두하는 이곳은 렌이 그토록 갈망하던 연결과 접합의 숏이 아니라, 그로부터 분리되어 부모와 뒤섞이지 않는 거리에서, 그 거리를 돌이킬 수 없다고 곱씹으며 고요히 내면을 찾는 숏이다. 모든 소란이 끝난 후, 아빠가 렌의 침실을 향해 계단을 오르는 장면에서도 계단과 침대 사이에 놓인 난간이 화면에 벽을 만들고 부녀는 시선을 마주하지 못한다. 계단에 앉아버려 프레임에서 사라진 아빠에게 렌이 난간 사이로 손을 넣어 낡은 기린 인형을 건넬 때, 아빠는 인형을 잡지 못한다. 영화는 무력하게 허공에 뜬 딸의 손과 아빠의 손 그리고 굴러떨어지는 인형을 어느새 계단 아래에서 올려다보며 이들이 빚어낸 움직임 세부를 느린 속도로 전시한다. 각자의 자리에서 서로 만나지 못하는 부녀의 손, 이들이 놓쳐버린 매개체, 추락하는 어린 날의 추억이 슬로모션으로 담길 때, 영화는 실패와 흩어짐과 사라짐을 되돌릴 수 없는 운동으로 화면에 꾹 눌러 새긴다. 이 장면의 정념은 환상과 희망으로 더이상 덧칠할 수 없는 삶의 명백한 한 시점이 눈앞에 다가왔다는 냉정한 진실을, 몽환적인 리듬과 운동으로 활성화하는 기이한 방식에 기인한다. 이는 소마이 신지의 세계에서 종종 일어나는 마법이기도 하다.
분리는 두렵고 외로운 것이지만, 도망이나 퇴행이 아니다. 그것은 모험으로 향하는 길일 수 있다. 렌이 계획한 여행이 시작하자마자 부부의 마음은 엇갈리고, 호텔 밖으로 뛰쳐나온 렌을 아빠는 쫓아온다. 강둑에서 부녀가 나누는 대화는 한 프레임 안에서 길게 이어지는데, 이 장면의 역동성은 아빠와의 거리를 좁히지 않고 위치를 옮겨가며 말을 지속하는 렌의 움직임과 아빠가 아닌 렌에게 반응하는 카메라의 운동으로 생성된다. 아이가 만들어낸 그 거리의 동력은 감내할 상태가 아니라, 어딘지 선제적 태도로 느껴진다. 내내 아빠에게 곁을 주지 않으며 대화하던 렌이 갑자기 달리며 화면 후경으로 점차 멀어지는 동안, 아빠는 그 자리에서 꼼짝도 하지 않는다. 곧 시작될 분리의 모험은 렌의 힘으로 돌파해야 할 몫이라는 듯 카메라도 렌을 따라가지 않는다. 적어도 이 미지의 여정에서 분리에 초조해하는 존재는 더이상 렌이 아니다. 렌을 찾아 헤매던 엄마는 다리 아래, 불꽃놀이를 구경하는 사람들 틈에서 딸을 겨우 발견하지만 렌은 그런 엄마에게 빨리 어른이 되겠다는 말을 남기고는 숨어버린다. 엄마의 숏은 다리 위 인파 속에 붙박여 딸의 숏을 자신의 자리로 끌어오지도, 그곳으로 직접 건너가지도 못한다. 이어지는 아빠의 숏은 아예 모녀의 흔적이 보이지 않는 곳에 동떨어진 채, 가만히 멈춘 오토바이와 함께 무기력하게 덩그러니 놓인다.
나막신을 신고 어두운 숲속과 인적 없는 계곡, 불길이 일렁이는 들판을 활보하는 렌의 행로는 삶과 죽음의 경계에 걸친 듯 위태로워 보이지만, 신기하게도 아이의 초상은 어느 때보다 편안하고 자유롭다. 이 길은 부모에게 돌아갈 출구를 찾아 헤매는 아이의 불안한 걸음과 얼굴이 아니라, 귀환의 시간을 미루며 모험의 가능성에 몸을 맡겨버리는, 어딘지 본능적이고 저항적이고 해방적인 힘으로 나아간다. 앞서 욕실에 자신을 가두거나 좁은 화장실에 들어가 남몰래 눈물 흘리던 렌의 장면에 영화는 이 여정의 구속 없는 방향성으로 화답하고 보답한다. 이 여정은 해변에 출현한 부모의 환영이 마침내 바닷속으로 잠기고, “혼자 두지 마”라고 애처롭게 울던 ‘나’의 잔상이 사라지고, 이들의 이미지를 데려온 화려한 배가 활활 불타며 부서진 뒤에야, 그 소멸을 마주함으로써 끝날 수 있다. “혼자 두지 마”라고 말하는 ‘나’를 ‘나’는 혼자 바라보는 것이다. 모래사장으로 돌아온 렌은 모닥불을 피우다 자기 뒤로 나타난 엄마를 돌아보고는 다시 고개를 돌려 카메라를 향해 의미를 알 수 없는 웃음을 짓는다. 카메라를 똑바로 응시하는 그 웃음은 혼자 시작한 모험은 혼자 매듭짓는다는 표식인 걸까. 여정이 모두 마무리된 후, 뮤지컬 장면처럼 설계된 에필로그에서 공원에는 렌의 친구들, 부모, 이웃들이 왁자지껄하게 모여 있고, 그들 중 누군가가 렌에게 어디로 가느냐고 묻는다. “미래로요.” 사람들에게 경쾌하게 호응하며 춤추듯 공원의 풍경을 가로지르던 렌이 커다란 나무를 지나 어느새 교복을 입은 10대의 모습으로 바뀌어 화면 전경을 향하는 순간, <이사>의 시간은 멈춘다. 이 에필로그는 렌의 성장을 가볍고 명랑한 기운으로 압축하는 한편으로, 밝음을 가장한 분위기 속에 한 가지 변하지 않을 진실을 묻어둔다. 미래로 향하는 렌은 (여전히) 혼자다. 공원에서 만난 누구도 렌과 동행하지 않는다.
렌의 여정과 결말에는 소마이 신지의 초기작인 <세일러복과 기관총>(1981)의 한 장면을 떠올리게 하는 구석이 있다. 주인공 이즈미의 아빠가 갑작스레 죽은 뒤, 학교로 야쿠자들이 찾아온다. 교문을 막고 늘어선 검은색 양복의 야쿠자들과 마침 하교하려던 학생들, 이들을 막아선 선생들이 거리를 두고 대치하는 중이다. 뒷문으로 나가라는 선생들의 말에 이즈미는 그럴 수 없다며, 겁먹은 친구들의 만류에도 무리를 빠져나와 야쿠자들을 향해 작은 체구로 돌진한다. 카메라는 처음에는 야쿠자쪽으로 다가가는 이즈미의 담대한 정면을, 이후에는 고독한, 어쩌면 겁먹은 뒷모습을 담는다. 이 장면이 발산하는 울림은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은 걸음으로, 무법의 세상 속으로 혼자서 전진하는 소녀의 얼굴과 움직임, 황량한 운동장에 마치 운명처럼 각인된 그 이미지에서 비롯된다. ‘혼자서 전진하는 아이.’ 그렇게 살아낸다. <이사>가 품고 귀 기울이고 키워낸 아이는 그런 아이다.
한 시절을 살아낸다는 건 그 시간과 이별하는 일이기도 할 것이다. 소마이 신지가 <이사> 다음해에 내놓은 <여름정원>은 <이사>보다 한결 온화한 세계지만, 결말에서 그 인상은 놀랍게 전복된다. 할아버지의 갑작스러운 죽음과 장례식이 지나간 뒤, 세 친구는 다시 그의 집 마당에 모인다. 이들이 여름내 최선을 다해 가꾼 집 마당에는 그 결실인 코스모스가 무성하게 폈고, 할아버지가 죽은 나비들을 던져두던 우물에서는 갑자기 나비들이 부활한 듯 빛을 퍼뜨리며 떼로 날아오른다. 아이들은 이 기적 같은 날갯짓이 할아버지의 영혼이 건네는 마지막 인사라고 여긴다. 우물 안을 들여다보던 아이들이 이제는 울지 않고 할아버지에게 작별 인사를 한 후, 우물 뚜껑을 덮고 꽃 한 송이를 올려둔다. 내내 가까이서 아이들을 사랑스럽게 바라보던 카메라는 세 친구가 서로에게 손을 흔들며 집을 떠나는 광경을 그들과의 동행을 이제는 마치겠다는 듯 아주 멀리서 찍는다. 다정한 애도의 결말을 예상하던 찰나, 갑자기 주인 잃은 집과 꽃밭만 남겨진 풍경 위로 이상한 사운드 파편들이 출몰해 부유하기 시작한다. 무언가 철거되며 내는 굉음, 할아버지와 아이들이 나눴던 말들, 이들이 깔깔대던 소리가 뒤섞이는 동안, 이 장소에 덮친 시간을 흡수한 풍경이 쇠락한 이미지들로 나열된다. 불길하게 금이 간 우물에서는 물이 새어 나오고, 집은 먼지를 뿜으며 부서지고, 꽃은 시들어 마른다. 지붕에서 기와 한장이 툭 떨어지는 순간, 가을에는 꽃씨를 심자던 할아버지의 말, 이제는 아무런 가능성도 피우지 못할 박제된 소망의 음성이 흐른다.
<여름정원>의 결말이 찬란함에서 아련함으로, 아련함에서 오싹함과 공허함으로 이행하는 속도는 너무 빠르다. 이 모든 감흥이 뒤엉킨 엔딩은 빛나던 현재를 순식간에 싸늘하게 식은 과거로 만들어버린다. 아이들과 할아버지가 집을 수리하고 땅을 일구는 과정을 그토록 공들여 지켜보던 영화는 그 노동과 마음이 무색하게 이곳을 단숨에 폐허로, 유령들의 놀이터로 변모시킨다. 뜨거운 우정과 돌봄의 유토피아가 종결되었음을 정작 아이들은 알지 못한 채 여느 날과 같은 평범한 인사로 헤어지는데, 우리만이 가혹하게도 텅 빈 장소에 남아 그 사실을 속수무책으로 목도한다. 한 시절은 나도 모르는 새 그렇게 가차 없이, 주저 없이 떠나고 만다는 것일까. 혼자 꿋꿋이 전진하던 소마이 신지의 아이들은 뒤늦은 깨달음으로, 어느 날 문득, 이제는 무엇도 살지 않을 지나간 시간의 거처를 돌아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