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날 한국영화는 어떤 능력을 묘사하며, 어떤 능력을 요구하는가. 영화 속 주인공이 소유한 능력에는 관객의 욕망이 반영되어 있다. 그들이 가진 능력은 오늘날 그 능력이 필요함을, 혹은 그와 같은 능력이 결핍되었음을 드러낸다. 능력에 있어 타고난 것을 노력보다 우위에 두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영화에서 평탄한 삶을 산 천재는 그 주인공이 되지 못한다. 영화는 가진 자는 잃어버리고, 없는 자는 갖게 되는 드라마를 원하기 때문이다. 한편 타고난 것과 노력해서 얻은 것 사이에는 우연이라는 선택지가 존재한다. 상황을 전개하는 과정에서 우연을 남발하는 영화는 개연성이 떨어진다는 비판을 받겠지만, 능력의 관점에서 우연은 가진 것의 행운과 가지지 못한 것의 불운이라는 양자택일을 잠시 벗어나게 만든다.
타고난 과거
과거는 영화에서 중단될 수 없는 소재다. 시대를 실제 경험했는지와 관계없이 과거는 미래보다 더 구체적이며 그럴듯한 시간 여행을 가능하게 한다. 물론 과거를 향수의 대상으로 채색한 뒤 그때가 좋았다고 자위하는 영화들을 기꺼운 눈으로 보기란 힘들다. 그러나 과거를 다룬 영화들이 모두 같은 지향과 성격을 가진다고는 볼 수 없다. 과거로 돌아간 영화가 할 수 있는 가장 긍정적인 환기는 오늘날 잃어버린 가치가 무엇인지를 드러내는 데 있다.
실제 바둑기사인 조훈현과 이창호를 모티브로 한 김형주 감독의 영화 <승부>는 1980년대로 돌아간다. 영화가 과거로 돌아가는 이유는 그 시대를 그리기 위해서라기보다는 그 시기의 인물을 주인공으로 삼았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지만, 영화가 과거의 작동을 통해 이들이 겨루는 승부와 사제 관계를 낭만적으로 바라보고 있음은 분명하다. 조훈현(이병헌)은 자신의 노하우를 이식할 제자로 이창호(김강훈/유아인)를 키우며, 이들의 관계는 이창호가 조훈현을 이길 때까지 지속된다.
실화를 바탕으로 한 <승부>에서 영광과 몰락이라는 극적인 이야기는 존재하지 않는다. 타고난 바둑 천재 이창호의 이야기가 아닌, 제자에게 자신의 자리를 내주게 된 스승이 느낄 법한 아이러니한 감정에 초점을 맞추고 있지만, 이를 특별히 과장하진 않는다. 승리가 주는 쾌감과 패배가 주는 쓰라림 대신 영화에 존재하는 건 누군가는 떠나가고 누군가는 존재하는 자리가 주는 애상감이다.
바둑이라는 스포츠의 독특한 지점은 앉은자리에서 마주 본 두 사람의 겨루기라는 데 있다. 바둑에서 요구되는 능력에는 수를 잘 읽는 비상한 두뇌의 능력뿐만 아니라 오랫동안 자리를 지키고 앉아 있을 수 있는 능력이 필요하다. <승부>에서 바둑은 마주 앉은 두 사람의 끈덕진 싸움인 동시에 서로 다른 시간을 사는 사람들의 차이임을 강조한다. 공평함을 위해 수를 두는 시간을 동일하게 제한하지만, 사람에 따 라 그 시간은 너무 길거나 짧다. 이창호는 누군가가 한수를 두는 동안 열수, 이십수를 둘 수 있는 정도의 능력을 갖추고 있다. 도저히 뛰어넘을 수 없는, 그야말로 신과 인간의 대결처럼 보인다. 조훈현이 이창호를 처음 만났을 때 조훈현이 선 자리에서 이창호를 상대했던 것처럼, 어린 이창호는 기원에서 스무명쯤 되는 성인들을 동시에 상대하며 바둑판을 이리저리 옮겨다니면서 바둑을 둔다.
바둑계의 일인자인 조훈현의 능력은 자리를 비우는 것으로 표현된다. 그는 바둑을 두는 도중 종종 자리를 비우곤 한다. 그의 빈자리는 마주한 상대에게 애를 써도 안 된다는 모욕을 준다. 하지만 조훈현이 이창호에게 패배한 뒤에 등장하는 빈자리는 더는 그의 능력을 증명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회피이자 상심을 드러내는 표식이다. 결국 <승부>는 아무리 신에 대적할 법한 일인자라고 해도 결국은 자신의 때를 기다려야 하는 인간임을 드러낸다. 다시 돌아와야 하는 자에게 복수란 작고 단단한 나무판 바깥을 벗어나서는 존재할 수 없다. 다시 돌아와 좁아진 자리를 받아들이는 힘이 우리에게 필요한 능력이자, 영화가 그리는 낭만의 요체다.
이식된 이야기
강형철 감독의 <하이파이브>에서 주인공들이 초능력을 얻게 된 이유는 순전히 우연이다. 한 미지의 인물이 세상을 떠나면서 장기를 기증하는데, 그로부터 장기를 이식받은 사람들이 그 장기의 활동에 따른 초능력을 얻게 된다. 우연이 발생하기 이전에 이들이 초능력을 갖게 된 조건은 각자가 지닌 결핍인 셈이다. 이식이라는 설정이 가리키는 결핍은 서사 내부의 이야기만은 아니다. 히어로물이라는 장르 역시 한국영화에 이식된 존재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초능력을 지닌 슈퍼히어로 서사는 자생적인 이야기이기보다는 할리우드 블록버스터로부터 이식된 이야기에 가깝다. 이를 비롯해 한국 상업영화에서 할리우드 블록버스터의 영향이 분명히 감지되는 경우, 그 사실만으로 오리지널에 해당하는 작품과 비교되거나 비판의 대상이 되는 경우도 있다.
최근의 영화들은 이에 대한 반응으로 ‘한국적인’ 상을 만드는 데 치중했다.지난해에 공개된 <파묘>는 히어로 서사를 오컬트 장르에 얽힌 무속신앙과 일제강점기를 지낸 실제 역사를 바탕으로 한국적인 것을 직조했다. <하이파이브>는 안재홍, 라미란 등 코미디에 정통한 배우들을 활용한다. 영화 속에서 초능력을 지닌 인물들이 색색의 의상으로 변신하는 장면은 등장하지 않지만, 어딘가 전대물을 연상시키는 코믹한 슈퍼히어로영화의 길을 보여준다. 이식이라는 설정을 이식된 이야기임을 드러내는 장치로 받아들일 때, 이를 통해 이식된 이야기라는 사실이 곧 결점이 아니라고 설득하는 것처럼 여겨진다. 능력보다 능력을 갖추게 된 이후가 더 중요한 <하이파이브>의 서사처럼 결국 이식된 이야기나 장르를 어떻게 활용하는가가 중요하기 때문이다.
이식이라는 설정이 드러내듯, 인물들의 능력은 신체 능력에 치중되어 있다. 순간 이동하듯 빠르게 달리는 심장의 능력, 사람이나 사물을 전부 날릴 수 있을 만큼의 엄청난 폐활량, 전기로 이뤄지는 모든 사물을 통제할 수 있는 각막의 능력 등이 그것이다. 이들은 자신의 능력을 때때로 오락거리로 사용하지만 궁극적으로는 누군가를 구하기 위해 자신의 능력을 사용한다. 이들은 사고로 위기에 처한 현장 노동자를 구하고, 동료를 구하며, 사이비종교에 붙들린 사람들을 구한다. 이들이 이식받은 장기가 한 사람의 몸에서 분리되었다는 사실이 드러내듯, 혼자보다는 서로의 힘을 합쳤을 때 더 큰 시너지를 발휘한다. 이러한 흐름에서 예외적인 존재는 췌장을 이식받은 서영춘(신구/박진영)으로, 그는 이식의 결과로 젊어지는 능력을 얻는다. 그의 능력은 젊음과 영생이라는 개인적인 욕망과 관련되며, 그가 끝없는 자기 증식의 파괴적 욕망을 드러내는 것도 이 능력과 관련된다.
이를 통해 초능력은 크게 두축으로 구분된다. 선한 사람의 능력과 악한 사람의 능력이다. 같은 능력이라고 해도 어떤 사람에게 도달하는가에 따라 달라진다는 오래된 진리를 갱신하면서, 초능력 아래에 흐르는 인간의 가치를 재발견하려 한다. 인간됨은 선인과 악인을 가르는 기준이다. 악인의 초능력은 자신을 살리는 데만 쓰이고, 선인의 초능력은 다른 사람을 살리거나 돕는 데 쓰인다. 악인인 서영춘이 사이비 교주라는 설정을 통해 악인의 이미지는 신에 가까운 존재로 그려진다. 여기에서 드러나는 신적인 것과 인간적인 것의 기준은 자신을 위해 누군가를 죽일 수 있는지 여부다. 신의 기준은 자신을 위해 다른 사람을 죽일 수 있다면, 인간의 기준은 자신을 위한 목적이라 해도 다른 사람을 죽일 수는 없다. 누군가를 죽일 수 없는 능력이 초능력 아래에 깔린 인간의 능력이며, 우리에게 희박해진 혹은 적어도 희박해질 위험에 처한 (초)능력이다.
실험의 사랑
강이관 감독의 SF영화 <바이러스>는 감염되면 사랑에 빠진 사람이 느낄 법한 호르몬을 분비하다가 죽는 바이러스가 창궐한 세상을 그린다. <바이러스>가 다루는 사랑이라는 소재는 영화에서 사랑이 처해온 위기를 환기한다. <바이러스>는 사랑을 그린 영화가 아니라 사랑이라는 대상을 다루는 영화다. 바이러스라는 제목은 영화가 코로나 팬데믹 이전에 기획된 작품임에도 결과적으로는 코로나 팬데믹을 뒤늦게 따라잡는 영화처럼 여겨지게 했다. 바이러스라는 제목은 실은 ‘러브’라는 수식어가 생략된 것으로, ‘바이러스’를 내세웠을 때의 손실보다 ‘러브’를 내세우는 것이 위험부담이 높음을 드러내는 결과처럼 보인다.
나는 <정말 먼 곳>에 관해 쓴 비평에서 한국영화에서 이성애 멜로가 사라진 상황을 진단한 바 있다(<씨네21> 1298호 ‘프런트 라인’, ‘<정말 먼 곳>의 거리두기가 의미하는 것’). 사랑을 주제로 삼은 작품만이 아니라, 서사구조에서 사랑을 주요 장치로 활용한 사례들이 비판의 대상이 되었다. 사랑으로 더는 새로운 이야기가 나오기 힘든 상황에서 퀴어영화의 대중화가 하나의 대안으로 떠오르는 듯 보였다. 그로부터 4년이 지난 오늘날 한국영화는 단지 사랑이라는 주제에서만이 아니라 전반적으로 위기에 처한 것처럼 보인다. 다른 한편으로는 사랑과 영화의 위기가 분리될 수 없는 현상이라는 생각도 든다.
<바이러스>에서 그리는 사랑은 첫눈에 사랑에 빠지는 열정이나 두 사람의 관계에서 오는 무르익은 감정이 아니라, 단지 호르몬의 변화로 묘사된다. 연애 세포가 소멸하기 직전인 택선(배두나)은 사랑에 빠지는 대신 바이러스에 감염된 병증으로 인식된다. 이는 사랑이 일종의 실험 대상이 된 상황을 반영한다. 영화 바깥의 영상물로 시선을 돌리면 <나는 SOLO> <하트시그널> 등 사랑을 주제로 삼은 매칭 실험 콘텐츠는 넘쳐난다. 이들은 대개 일정 기간, 정해진 장소에서 컨설팅에 의해 매칭된 소수의 사람을 모아두고, 그 안에서 자유롭게 관계를 맺고 끊는 행태를 관찰하고 중계하는 형태를 보인다. 그 안에서도 서로 엇갈린 오해가 불러오는 도파민 터지는 이야기가 스포트라이트를 받는다.
바야흐로 모든 것을 중계하는 시대에 관한 이야기는 단지 국내의 영상물에만 한정되지 않는다. 최근 개봉한 셀린 송의 <머티리얼리스트>는 결혼정보회사의 중개인으로 일하는 여성을 주인공으로 삼는다. 그에게 사람을 판단하는 중요한 기준 중 하나는 결혼정보회사의 인간 피라미드에서 이 사람이 몇 단계에 속할지에 있다. 루시(다코타 존슨)는 결혼이 성사된 고객의 결혼식에서 새로운 남자 해리(페드로 파스칼)와 전 애인 존(크리스 에반스)을 동시에 만나게 된다. 둘과의 관계와 소통을 이어가는 데 있어 결혼정보회사의 상담사라는 직업은 관계를 바라보는 과도한 낭만을 벗어버리는 역할을 한다. 이처럼 사랑이 희박해진 상황에서 주인공은 사랑의 실행자가 되기보다 사랑의 중계자가 된다.
<바이러스>에서 사랑은 바이러스에 감염되어야만 가능해진 상태로 축소된다. 바이러스에 감염되면 죽는다는 설정은 사랑이 금기시되는 상황을 은유한 것이자, 영상물 속에서 사랑이 묘사되어온 극단성을 상기시킨다. 사랑은 불치병이나 이뤄질 수 없는 관계와 함께 묘사되며 평범한 사랑이 묘사되기 힘들었다. 조금 더 현실적인 디스토피아의 측면에서 사랑은 곧 임신, 출산이라는 통과의례와 함께 병원과 뗄 수 없는 것이 되어버린다. 사랑이 이런 방식으로라도 살아남은 것이 사랑의 질긴 생명력이라고 보아야 할까, 사랑의 위기라고 말해야 할까. 어느 쪽이든 이상적인 사랑이 결핍된 상태라는 사실만은 분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