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4월의 첫 일요일, 4년 만에 돌아오는 영화제의 트레일러를 위해 제21회 미쟝센단편영화제 집행위원들이 모였다. 콜 타임은 아침 7시. 집합 장소는 퀴퀴한 냄새마저 세월의 훈장인 듯한 세운상가 3층 양지전자. 다섯 감독은 단 하루, 단 한편의 짧은 영화를 위해 서로 다른 역할을 부여받았다. 장재현 감독이 제작 전반을 책임진 가운데 엄태화 감독이 메가폰을 잡았고, 이상근 감독이 조감독으로서 뒤를 받쳤다. 의상, 소품을 비롯한 미술은 이옥섭, 윤가은 감독이 담당했다. 이들이 함께 만든 이야기의 주인공은 전자기기 전문 수리점에서 4년 만에 얼굴을 마주한 남녀다. 남자는 망가진 카세트 플레이어를 고치고 싶고, 여자는 그렇게 해줄 수 있다. 영화제가 새동력을 얻은 것처럼 멈춘 줄 알았던 테이프도 다시 돌아가는 엔딩. 그 끝이 제21회 미쟝센단편 영화제의 시작을 알릴 것이다.
배역에 걸맞게 데님 점프슈트를 갖춘 김고은 배우, 몇번의 피팅을 거쳐 엄태화 감독의 오케이를 얻은 크림색 코듀로이 셔츠를 입은 구교환 배우가 공방에 앉자 양청직 촬영감독의 카메라도 설 곳을 찾았다. 그사이 메이킹필름 스태프가 미쟝센을 향한 한마디를 부탁하자 구교환 배우가 개구지게 그의 눈을 맞췄다. “다시 만날 줄 알았다!” 웨딩 스냅을 찍는 커플이 세운상가 한편에서 그들만의 영화를 꿈꾸던 오전 9시, 양지전자를 채운 이들에게도 슛 소리가 들려왔다.
이상근 감독이 첫 번째 신을 위해 “보고 싶었어!”라고 적힌 슬레이트를 쳤다. 데뷔작 <엑시트> 이후 두 번째 영화 <악마가 이사왔다> 공개를 앞둔 그는 이날 현장에서 조감독으로 활약하며 오전 내내 배우들이 자리한 양지전자 내부와 제작진이 정박한 통로 사이를 바삐 오갔다. 그의 팔꿈치 옆으로 보이는 형형색색의 직사각형은 미술팀이 2009년 제8회 미쟝센단편영화제 포스터 이미지를 작게 출력해 붙인 것인데, 당시 대상 수상자는 <남매의 집>의 조성희 감독이었다.
엄태화, 장재현 감독과 이다나 스크립터가 양지전자 바깥 복도를 지키는 동안 두 주연배우도 수시로 모니터 앞에 동행했다. 그러다 그들의 시선이 일제히 한곳으로 쏠렸다. 카메라가 가게 유리창에 반사되면서 화면에 기이한 형체가 떠오른 것. 이 사실이 금세 소문나면서 장내가 술렁였지만 구교환 배우의 해맑은 한마디에 모두가 다시 자기 할 일에 집중할 수 있었다. “귀신 나오면 잘되잖아요!”
데님 점프슈트 차림에 가벼운 화장을 하고 등장한 김고은 배우. 그는 기술자의 풍모를 드러내며 카세트 플레이어 수리 신에 몰입했다. 그런 그를 흑백 화면으로 지켜본 이들이 찬사를 보냈 다. “뒷모습도 연기하고 있어!”(장재현) “승모 표현이 좋아요. 옷깃도 연기하고 있습니다!”(구교환) 두 남자의 장난스러운 환호에 김고은 배우가 콜록거렸다. “연기가 어떻다고요? 전 납땜하느라 연기를 마셨어요.””
“제가 옛날 사람처럼 생겨서요.” 흑백이 잘 어울린다는 말에 구교환 배우가 답했다. 그는 내친김에 모니터 속 자신의 닮은꼴까지 찾아냈다. 바로 홍콩 배우 정이건. 목덜미를 간질이는 머리칼 탓인지 그 발견에 수긍할 수밖에 없었던 찰나, 답답해 보일 것 같다며 머리를 넘겨볼지 고민하는 구교환 배우를 김고은 배우가 만류했다. “그런 머리 길이가 회피형 남자에게 어울리는 스타일 아닐까?”
윤가은 감독이 주요 소품인 카세트테이프의 필름을 팽팽하게 말아넣는 동안 이옥섭 감독은 라스트신을 위해 납땜인두를 쥐고 팻말을 조립했다. 양지전자 사장님에게 속성 과외를 받아 ‘2025 MSFF’를 한땀 한땀 써내린 이옥섭 감독의 손은 트레일러에서 확인할 수 있다. 소중히 보관해달라는 그의 부탁을 받고 <씨네21> 사무실로 가져온 이 팻말은 지금 미쟝센단편영화제 사무국 문 앞에 걸려 있다.
오후 6시 무렵 잠시 자리를 비운 엄태화 감독을 대신해 마지막 컷을 외친 이는 장재현 감독이었다. 종일 제작팀장으로서 관계자들과 인사를 나누고, 현장 통제까지 앞장섰던 그가 그날 처음으로 연출자의 입장으로 무전 기를 쥔 순간이었다. 기판을 매만지는 이옥섭 감독의 손끝 클로즈업을 유심히 지켜보던 그는 한번 더 가보자는 요청을 몇 차례 전하더니 마침내 모든 것이 흡족하다는 듯 소리쳤다. “수고하셨습니다!”
제21회 미쟝센단편영화제 트레일러 쓰고 연출한 엄태화 감독
“처음 감독들이 모여서 떠올린 건 목마른 남자가 큰 댐 앞에서 물을 맞는 장면이었어요. 그런데 짧은 시간에 먼 곳까지 가서 촬영하기도 어렵고, ‘재회’의 느낌이 나지 않아 고민하다가 오랜만에 만나는 커플의 이야기를 써봤습니다. 멈췄다가 다시 시작되는 이야기였으면 해서 카세트테이프가 돌아가는 아이디어도 추가했고요. 덕분에 배경이 다방에서 세운상가로 바뀌었습니다. 캐스팅된 두 배우의 이미 지가 시나리오에도 영향을 줬어요. 구교환 배우는 진지한 대사도 유머러스하고 사랑스럽게 소화해줄 것 같아 억지로 코믹한 대사를 쓰지는 않으려 했고, 김고은 배우는 머리가 짧은 상태라고 들어서 점프 슈트를 입고 납땜질하는 모습이 멋있을 것 같다고 상상했습니다. 언제든 함께하고 싶은 두 배우와 이렇게나마 합을 맞춰볼 수 있어서 너무 좋았습니다. 동료 감독들과 함께하는 현장이 부담스럽지 않았 냐고요? 언제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너무나 잘 아는 분들이라 제겐 최고의 스태프들이었습니다. 트레일러 속 두 남녀가 재회하면서 느끼는 설렘을 미쟝센단편영화제 관객들도 느끼셨으면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