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면서도 자신의 눈물이 감정조절장애 때문이라고 생각하는 알코올중독자와, 울고 싶지만 합병증으로 림프샘이 말라붙어 눈물이 나오지 않는 류머티즘 환자가 사랑한다. 두 사람은 어느 재혼 부부가 초대한 웨딩홀에서 신랑 친구와신부 친구로 처음 만났다. 새벽까지 소주를 들이붓다 쓰러진 영경(한예리)을 수환(김설진)이 등에 업어 집까지 데려 다준 뒤로 매일의 동반자가 되었다.
<안녕 주정뱅이>(2016)에 수록된 권여선 작가의 서른쪽 남짓한 소설 <봄밤>은 12년간 함께하다가 같은 요양병원에 입소해 ‘알(코올중독자)류(머티즘 환자) 커플’이라 불리는 두 사람의 마지막 시기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영경의 자매들, 수환의 가족들이 병실을 드나들며 복닥거리고, 몇몇 간병인을 제외하면 환자도 의사도 모두가 늙은 이들뿐인 병 원 사람들은 영경과 수환에 대해 자주 수군거린다. 소설의 첫 문장은 영경을 도무지 이해하기 힘든 그녀의 큰언니가 내뱉는 한탄이다. “산다는 게 참 끔찍하다. 그렇지 않니?”
강미자 감독은 소설이 상대적으로 압축한 두 사람의 첫 연결고리 부근에 좀더 지긋이 머무른다. “수환이. 살아갈 돈이 없지? 병도 있고. 나는 모아둔 돈은 조금 있어. 집도 내 거고.” 영경은 수환을 사랑하겠다는 말을 이렇게 대신한다. 둘의 절박한 이끌림은 언뜻 조건의 문제에서 시작하는 듯하다. 그러나 이는 가진 것을 비교하는 조건의 문제가 아니라 둘 중 누구도 더이상 잃어버릴 것이 없다는 조건의 문제이다. 쇳일을 하다 차린 철공소가 부도난 이후 신용불량자로 전락한 수환은 건강보험이 없어 치료도 받지 못하는 신세이고, 이혼 후 아이를 빼앗기고 술에 빠진 영경은 평판이 나빠져 도망치듯 교사 일을 그만뒀다. 영경은 집을 팔아 수환을 돌보고 수환은 삼킨 술의 양만큼 눈물을 쏟 는 여자를 내내 지극히 애틋해한다. 요양병원 입소 후에도 금단증세를 못 이겨 외박을 감행하는 영경에게 수환이 돌려주는 사랑은 이런 식이다. “당신 참 장해. 오래 버텼어. 다녀와라.”
결정적으로 영화 <봄밤>은, 이질감을 불사하고서라도 두 사람만을 위한 사랑의 성소를 건축하려는 영화다. 결혼식은 나오지 않는 결혼식. 모두가 검은 옷을 입고 잠들어 있는 뒤풀이. 손님 없는 술집. 텅 빈 병원의 복도가 수환과 영경의 무대이다. 영화는 저예산 프로덕션 환경에 의한 미장센의 부재로 환원할 수 없는 철저한 적요함을 성취했고 그것으로 둘을 감싼다. 귀는 먹먹해지고 보이는 것은 눈앞뿐인 주정뱅이가 되어 오직 두 사람만 기대어 살아갈 수 있는 손바닥만 한 세계를 확인하는 체험이다. 오죽하면 병원 입소 후의 장면에서도 둘은 신혼집을 차린 부부처럼 꽃무늬 벽지 아래 한 침대를 쓰면서 잠들고 일어난다. “여기가 우리가 살 방인가?”라는 영경의 첫 대사와 같이, <봄밤>은 요즘 세상이 믿지 않는 사랑의 작은 방이다.
현대 멜로드라마들은 두 사람의 연결이 삶을 상호적으로 개선한다는 아이디어를 바탕으로 구축된다. 즉각적인 기쁨을 안기는 것 외에도 두 인간의 안정적인 결속은 좀더 나은 미래를 꿈꾸게 한다. 사랑은 곧 낙관이다. 그러나 <봄밤>과 같은 영화들은 복잡한 그림을 제시한다. 수환은 영경이 술을 끊도록 도울 수도 있지만 무조건적인 수용을 택했다. 이는 영경도 마찬가지다. 상대방의 처지와 그로 인한 현저한 불안정함을 전적으로 받아들인다. 서로를 개선하는 사랑과 그냥 놓아두는 사랑. 어느 쪽이 더 이타적이거나 이기적일 수 있는가. 내게는 분별하기 어려운 질문이다. 서로의 결함에 대한 무방비한 인정이야말로 한 사람이 다른 한 사람에게 줄 수 있는 가장 자비로운 형태의 사랑일지도 모른다는 희미한 생각만이 스친다.
한편 중산층 부부가 번갈아 알코올중독에 빠지며 서로를 궁지에 몰아넣는 <술과 장미의 나날>(1962), 가족을 잃고 중증 알코올중독에 빠진 남자와 성노동자의 관계를 그리는 <라스베가스를 떠나며>(1995) 등 적지 않은 영화가 치명적인 결함 속의 사랑을 탐구하는 소재로서 술 취한 인간들의 자기파괴를 다뤄왔다. 여기에 동반하는 주요 플롯은 (일 정 시기에 급격히 고양되는 유대감에도 불구하고) 통제되지 않는 상대로 인해 관계가 질식하고 마는 파국이다. <봄밤>의 두 사람은 다르다. 타인을 결코 해하지 못하는 부 류의 인간들이 행하는 자기파괴는 너무 서두르지도 혁혁하지도 않은 모양새로 각자의 소멸을 향해간다. 우리의 가장 어둡고 두려운 심연과 누구도 대신 싸워줄 수 없다는 마이클 피기스 감독(<라스베가스를 떠나며>)의 실존적 진술과도 궤를 달리하는 이별이다.
강미자 감독은 원작의 가장 좋아하는 대목으로 마지막 외출을 앞둔 영경이 수환에게 톨스토이의 <부활>을 들려주는 순간을 꼽았다. 촬영까지 마쳤으나 편집에서 끝내 제했다고 한다. 소설에서 영경은 금단증상 때문에 파들거리는 손으로 <부활>의 페이지를 넘긴다. 탁월한 지성의 소유자이나 자만심으로 망해버린 혁명가 노보드보로프의 애석한 사 례를 통해 톨스토이가 도출하기를, 한 사람의 가치를 말할 때 분자에 장점을 놓고 분모에 단점을 놓으면 1을 기준으로 그 값이 나온다. 그러니까 아무리 좋은 면을 가지고 있어도 해결되지 않는 결점이 지나치게 클 때 그 사람은 영영 온전한 1이 될 수 없다. 우리가 1이 될 수 있을까, 영경이 읊조릴 때 수환은 속으로 자신은 0 근처에 수렴 중이라고 생각한다.
<봄밤>엔 둘의 방만큼이나 긴요한 둘의 길도 있다. 병원 초입에 펼쳐진 잡초가 무성한 오솔길에서 수환은 몇번이나 영경을 그냥 놓아준다. 더이상 업어주지 못하기 때문에 놓아주기라도 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영경은 이틀 만에 올 때도 있지만 더 늦을 때가 많다. 드나들기를 반복할 때마다 두 사람의 상태는 걷잡을 수 없이 나빠진다. 어느 날, 길과 길 끝에서 재회한 남녀가 제각기 성치 않은 몸으로 서로를 향해 기어간다. 진흙 위에서 마침내 끌어안은 연인이 꼭 포개진 채 짓물러가는 목련 잎 같다. 그러니까 <봄밤>은 둘이 합쳐도 1이 되기 어려운, 이미 낙화가 된 사람들의 사랑 이야기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다음 감정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 이라고 적고 고쳐쓴다 - 적어도 나는, <봄밤> 같은 사랑을 하고 싶다. 혹시 당신도 그런 생각을 하면서 영경을 따라 김수영의 시를 중얼거리지는 않았는지? <봄밤>을 보고 나서 옆사람에게 묻고 싶어진 이 떨림이 희망인지 절망인지 너무 애태우지 않기로 했다. *애타도록 마음에 서둘지 말라. 강물 위에 떨어진 불빛처럼 혁혁한 업적을 바라지 말라. (…) 아둔하고 가난한 마음은 서둘지 말라! (김수영, <봄밤> 중)
* 제목은 블레이크 에드워즈 감독의 영화 <술과 장미의 나날>(Days of Wine & Roses)에서 변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