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만 소설가 천쉐가 서울국제도서전을 위해 한국을 찾았다. 레즈비언 부부의 삶을 담은 에세이 <같이 산 지 십 년>과 글쓰기에 대한 에세이 <오직 쓰기 위하여>가 먼저 출간된 뒤, 본령인 소설들은 올해 <마천대루>와 <악녀서>가 연달아 소개되었다. 드라마로 만들어진 <마천대루>와 출간 당시 ‘18세 이하 열독 금지’ 딱지가 붙은 데뷔작 <악녀서>가 한국 독자들에게 어떻게 읽힐지 궁금해하는 천쉐 작가를 만났다. “내 글쓰기는 마스터베이션 같은 글쓰기, 발광 같은 글쓰기야. 글을 다 쓰고 나면 사정하는 것처럼 하나하나 찢어버리지”(<악녀서>)라고 적었던 때로부터 30년을 훌쩍 넘긴 지금, 천쉐 작가는 어떻게 살고 쓰고 있을까.
- 데뷔작인 소설집 <악녀서>는 1995년 출간 당시 여성간의 성욕 묘사로 인해 ‘18세 이하 열독 금지’ 딱지가 붙는 등 논란을 겪었다.
편집자가 소설을 읽고 나서 출판사 대표한테 이 책 편집 못하겠다고 했다더라. 편집주간이 꼭 내야 한다고 강력하게 얘기해서 출간됐는데, 두 가지 조건이 있었다. 첫째, 유명한 인사가 이 책에 대해서 긍정적인 글을 써줘야 한다. 그래서 대만 인문학자 양자오가 해설을 썼다. 둘째, 래핑하고 스티커를 붙여 판매한다. 나는 그런 결정에 분노했지만 출간하려면 어쩔 수 없었다.
- <악녀서>가 들려주는 목소리가 워낙 생생해서 작가님의 자전적인 이야기로 오해받았을 것 같기도 한데.
읽는 사람들이 내 얘기라고 생각하는 경우가 있었다. 강연을 할 때면 나를 보며 “저 사람이 그 책에 나오는 사람이구나” 하고 추측하기도 하고. 그래서 더 전투적인 태세로 글쓰기에 임했다. 작가는 용감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 독자의 반응이 좋았는데도 책이 오랜 기간 절판 상태였다.
그 책을 긍정적으로 본 편집자가 회사를 떠나는 등 출판사 내부의 이슈가 있었다. 내 운명이기도 할 것이다. 오랜 기간 내가 쓴 여러 책들이 절판됐었다. 책은 잘 팔렸지만 제대로 된 문학 작가가 아니라는 분위기가 있었고, 글쓰기를 시작한 지 10년 정도가 지나서야 문단에서 긍정적인 평가를 받았다. 충격적인 이야기로 독자들을 자극할 뿐이라는 평가가 10년간 지속됐던 셈이다. 그래서 죽어라 계속 썼다.
- 발표한 작품들이 과소평가된 10년여 동안 자신의 글을 믿을 수 있었던 힘은 무엇이었나.
<악녀서>가 1995년에 나오고 10여년간 나는 내가 작가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생계를 위해 배달이나 노점상을 비롯한 여러 일을 했는데, 처음에는 누가 나를 알아보고 맞냐고 물으면 아니라고 답하기도 했다. 그런 시기를 거치면서 나는 글을 쓸 운명이라고, 좋은 작품을 쓸 수 있다고 믿게 되었다. 나는 엄청나게 많은 책들을 읽어왔고, 내가 시대보다 앞서 있다고 믿었다. 때가 오기를 기다리기만 하면 된다는 신념이 있었다. 시대가 변하면서 나 역시 점점 용감해졌다.
- 캐릭터의 목소리가 선명한 <악녀서>와 장르적이고 사건의 스케일이 큰 <마천대루>(2015)를 비교하면 작가로서의 변화를 느끼게 된다.
작가로서 나의 변화는 세 단계로 말할 수 있다. <악녀서>를 쓰던 시기부터 2003년까지의 첫 단계에, 나는 스스로 작가임을 인정하지 않고 다양한 일을 하며 살았다. 두 번째 단계는 <다리 위의 아이>(2004)를 시작으로 2009년까지 쓴 네 작품인데, 나와 관련된 이야기를 쓴 시기다. 시골 얘기, 야시장에서 물건 파는 얘기를 비롯해 가난이나 힘겨운 삶에 대한 내용이 많아서 <악녀서>를 좋아한 독자들은 이 시기의 소설을 좋아하지 않았다. 집에서 외롭게 글을 쓰는 단계였다. 있던 독자들이 떠났음에도 글을 써야 한다고 생각했고, 그 과정에서 내가 성장했음을 느낀다. 그러고서는 뭐든지 쓸 수 있다는 자신감이 생겼다. 2010년부터 지금까지가 세 번째 단계인데 살인사건을 다룬 <마천대루>와 대만의 백색테러 시기를 엮어서 쓴 <아버지가 없는 도시>(2019) 등이 이 시기의 작품들이다.
- 근작들에서 장르와 사회 이슈에 대한 관심이 엿보인다.
한국영화 <살인의 추억>(2003)을 보고 큰 영향을 받았다. <살인의 추억>은 한국 사회의 변화와 밀접하게 연관돼 있으면서도 오락성과 예술성을 동시에 갖추고 있다. 그 작품을 계기로 봉준호 감독의 영화를 비롯한 한국영화에 한참 동안 빠져 있었다. 한국영화는 한국 사회의 문제를 적극적으로 다루는데, 그러면서도 장르적인 재미를 놓치지 않는다. 사회적 이슈를 다룰 때 어떻게 하면 좋은지 그런 영화들에서 큰 영향을 받은 셈이다.
- 한국에서 처음 번역된 당신의 책은 ‘레즈비언 부부, 커밍아웃에서 결혼까지’라는 부제가 달린 <같이 산 지 십 년>(2019)이다. 2019년 5월24일 대만에서 동성혼이 법제화되었는데, 그때 이미 10년간 친구들 앞에서 결혼식을 하고 같이 산 배우자 짜오찬런과의 삶을 일상의 눈높이에서 다루었다. 생활의 안정이 글쓰기에 미친 영향은 무엇인가.
내가 글쓰기에 전념하게 해준다. 나를 적극적으로 지지하는 사람이 내 원고를 검토해준다. 짜오찬런은 편집자로도 뛰어난 사람이니까. 소설에 백색테러처럼 사실관계 확인이 필요한 내용을 등장할 때 내가 저지른 실수를 바로잡는 데 크게 도움을 준다. 공동저자로 이름을 올리겠다고 한 적도 있다. 본인이 만류해서 그렇게는 하지 않고 있지만. 나는 젊었을 때 새로운 모색을 위해 슬프고 괴로웠던 적이 많았다. 좋은 반려자를 만나서 훨씬 더 좋은 작가가 되었다.
- 동성혼 법제화와 같은 대만 사회의 진보적인 흐름이 창작자와 독자들에게 미치는 영향은.
자신감 있게 글을 쓸 수 있다. 안정적이고 단단해진 느낌이 든다. <같이 산 지 십 년>은 내가 2011년부터 페이스북에 올린 ‘아내 일기’라는 연재글을 묶은 것인데, 처음에는 수천명이었던 팔로워가 지금은 수만명으로 늘었다. 식사, 고양이 돌보기를 비롯한 동성 부부의 삶을 있는 그대로 볼 수 있도록 썼고, 많은 독자들이 크게 호응했다. 책이 출간되고 배우자와 함께 서점에서 사인회를 가졌는데 독자들이 책을 가져와서 울고 악수하고 그랬다.
- 아직 동성애에 보수적인 한국에서는 많은 퀴어 청소년이 죽음의 충동 속에 힘들게 성장한다. 대만이 큰 변화를 겪는 과정을 지켜본 지금, 10대 시절 당신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 있다면.
(구호를 외치듯 한손을 들어 주먹을 꽉 쥐고) 잘 살아 있어라. 인내심 있게 기다려라. 틀림없이 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