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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준희의 클로징] 기후 위기를 보듯 저널리즘을 보다

매년 1학기엔 학부 2학년 과목으로 저널리즘 강의를 한다. 코로나19 대유행 전부터 시작한 강의이니 5년은 훌쩍 넘겼다. 첫해와 올해의 강의록을 비교해봤는데 꽤 많이 바뀌었다. 첫해에는 저널리즘 사상과 각국의 서로 다른 저널리즘 양식에 거의 2/3를 할애했다면, 올해는 전체의 1/3쯤으로 그 내용이 줄어들었다. 그만큼 변화된 저널리즘 환경에 대한 이야기가 늘어났다. 흔히 ‘가짜 뉴스’라고 불리는 허위조작정보에 관련된 내용, 지난 한 세기를 풍미해온 서구식 객관주의 저널리즘의 한계 등이 그 자리를 메웠다. 교수가 나이 들수록 강의록은 안 바뀌게 마련인데 학문과 시류의 변화를 좇아가기 벅차서 그런 것도 있지만, 안 바뀌는 게 좋을 내용을 중심으로 관심이 옮겨가는 것이 자연스럽기도 해서일 테다. 하지만 저널리즘을 비롯한 미디어 관련 과목은 영 그러기가 힘들다. 워낙 세상의 변화 속도가 빠른 와중에 미디어가 그런 변화를 이끄는 동인이자 결과이기도 하다 보니 그렇다. 심지어 사상, 철학, 역사 등 호흡이 길 수밖에 없는 내용을 담더라도 크게 다르지 않다. 일종의 금과옥조처럼 받아들여지던 사상과 철학 역시 매번 달리 생각되어야 하고, 기존 역사에 최근 변화를 살짝 얹는다고 해서 설득력 있는 역사상이 만들어지지 못한다. E. H. 카가 “역사란 과거와 현재의 부단한 대화”라고 했던 바는 지극히 옳다.

저널리즘 역시 빠르게 변화하는 현재의 시각에서 늘 과거를 재구성해보아야 하는 대상이 되고 있다. 내가 지금 학교에서 저널리즘 과목 강의를 시작할 그 시점에 대규모 언론사의 보도를 실질적으로 책임지고 있는 사람을 초청하여 저널리즘 비평 프로그램을 만든 적이 있었다. 그때 그는 이런 말을 했다. “지금 우리 저널리즘은 달리는 기차를 멈추지 못한 채 주요 부속과 엔진을 갈아 끼워야 하는 상황에 처해 있다.” 상당히 정확한 비유라고 생각했다. 좀더 강렬한 비유를 하자면 전기 수요를 감당하기 위해 핵발전소를 계속 가동하면서도 사람이 직접 노심에 들어가 핵연료와 냉각수를 교체하는 한편 아예 발전 방식도 바꿔야 하는 상황일지도 모른다. 기차는 정해진 선로를 따라 (엔진과 부품을 가는 동안은) 잠시 타력으로라도 굴러갈 수 있는 법인데, 특정 언론 기업 하나를 두고는 그렇게 볼 수 있다손 쳐도, 저널리즘 생태계 자체의 변화는 기차 비유 이상의 어려움과 복잡함을 전제하고 또 상상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면 저널리즘은 기후 위기와도 닮은 점이 있다. 일상적 정보 생산을 책임지는 저널리즘이 새로운 미디어와 맞물리면서 엄청난 증폭 효과가 발생했고, 그렇게 해서 폭증한 정보 가운데에는 분노와 혐오를 증가시키는 허위조작정보가 대량 포함되었다.

이는 마치 온실효과와 같은 반향실효과(echochamber effect)를 불러일으켰다. 기온과 수온이 상승하면서 폭우, 산불 등 이상 현상이 증가하듯, 분노와 혐오의 확산은 대립과 갈등, 극단주의의 발호를 가져오고 있다. 기후 위기의 원인이 되는 탄소 배출 감축을 위해선 친환경 에너지로의 전면적 전환이 필요하다면, 정보 위기의 원인이 되는 허위조작정보의 억제를 위해선 일상 정보의 생산과 배포 방식에서 근본적인 전환이 뒤따라야 한다. 그리고 이 모든 과정은 기술, 정부, 기업, 소비자 모두의 각성과 참여를 필요로 한다. 과연 우리는 기후 위기를 극복할 수 있을까? 그리고 정보 위기 역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