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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국어 콘텐츠가 한국 관객과 만나는 과정, 자막의 A to Z
이유채 정재현 2025-06-19

Q1. 영화제 번역팀은 어떻게 운영되나요?

현재 한국의 국제영화제 자막 번역 작업은 대부분 영화제 바깥에서 이뤄진다. 영화제는 보통 개최 3개월 전 공식 홈페이지에 자막 운영업체 모집 공고를 올리고 경쟁입찰을 통해 최종업체를 선정한다. 경우에 따라 특정 작품은 감독이나 수입사측에서 개별적으로 번역을 의뢰하기도 하지만 대부분은 영화제 차원에서 자막을 일괄 제작하며 외주 체계를 통해 효율을 도모하는 방식이다. 올해 한 국제영화제 자막 번역을 맡은 A 외주업체의 선정 비결에는 베테랑의 내공이 있었다.

“직원들 대부분이 영화제 자막 업무 경험이 있어서 운영 시스템을 잘 알고 있다. 그래서 사소한 부분도 그냥 넘기지 않고 제안요청서에 꼼꼼히 반영하는데 그게 신뢰를 주는 지점이기도 하다”는 게 팀장 A씨의 설명이다. 오랜 현장 경험에서 비롯된 감각은 제안서 작성부터 실제 작업의 흐름까지 자연스럽게 스며든다고. 최종 합격의 기쁨은 잠시, 계약 이후부터는 극장을 오가는 영화제 시네필처럼 분주하게 움직여야 한다. 우선 작업 대상이 100편을 훌쩍 넘는다. 해외 작품은 영어나 원어 대본, 영상 녹취를 바탕으로 한글 자막을 제작하고 국내 작품은 한글 대본이나 영상 자료를 기반으로 영어 자막을 만든다. 번역이 완료되면 타임코드를 입력하는 ‘스파팅’ 과정을 통해 자막을 영상에 정확히 맞춘다. 이후 상영 시간표에 따라 자막을 영사(오퍼레이팅)하는 일까지 모두 이들의 손을 거친다. 업무는 단순히 스크린에 글자를 띄우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상영 중에 발생할 수 있는 기술적 오류에 대비해 자막 장비를 사전에 점검하고, 현장에서 함께 일할 자막 담당 자원활동가들을 교육하는 일도 맡는다. 관객에게 자막이 자연스럽고 정확하게 전달되기까지 여러 디테일한 조율이 필요한 것이다. 영화제가 끝났다고 이들의 엔딩크레딧이 올라가는 건 아니다. 자막 번역 및 감수 결과물과 마무리 보고서까지 기한 내에 제출해야 비로소 이들의 폐막도 가능해진다. /이유채

Q2. 영어, 일본어, 중국어를 제외한 국가의 영화도 전담 번역가를 고용하나요?

국제영화제는 미국이나 영국, 일본, 중국 국적의 영화만 초청하지 않는다. 하지만 한국의 영화제에서 관객과의 대화나 인터뷰를 진행하다 보면 영어권 감독이나 일본, 중국 출신이 아닌 감독들에게 그들의 모국어가 아닌 영어 통역이 붙는 경우가 많다.

자막 번역 역시 크게 다르지 않다. 각 언어에 능통한 전담 번역가 대신 영어를 전문으로 하는 번역가가 영어 대본을 근거로 중역(重譯)을 하는 경우가 빈번하다. 영어 자막을 주로 번역하는 A씨는 “영어를 제외한 언어 전공자들이 전업 영화 번역가로 살아남기엔 현실이 녹록지 않다”고 지적한다. “영어권, 일본, 중국 영화에 비해 수입되는 작품 수가 충분하지 않아 그들이 전업 번역가로 생활하기 쉽지 않다. 클라이언트 입장에서도 전문가에게 번역을 맡겼을 때 영상 자막의 번역 경험이 적은 전문가들이 많다 보니 막상 결과물을 받아들면 ‘영화 자막’에 요구되는 퀄리티를 보장받지 못한다. 결국 번역가들이 보장된 일거리 안에서 경험을 쌓자니 수입작의 수, 수입사의 고용 확대 등 시장 내 수요가 이를 뒷받침하지 않아 악순환이 지속된다.” (A씨) 근래 흥행한 유럽영화의 중역을 맡은 번역가 B씨 또한 “수입작들이 대개 영어 자막과 함께 한국에 들어오기 때문에 영어 전문 번역가들이 자막을 쓰는 데 문제가 없다”고 밝혔다.

하지만 중역은 원문에 담긴 정서나 사회문화적 맥락이 탈각된 채 전해질 수밖에 없다. A씨는 영화제가 영어, 중국어, 일본어 이외의 영화 전문 번역가를 양성하는 교두보 역할을 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과거엔 영화제가 자막팀의 구성원을 직접 채용해 번역을 맡겼다. 가령 영화제에 초청된 스페인영화의 자막이 훌륭하다면, 스페인 자막 번역가가 누군지 영화제를 통해 금방 알 수 있었다. 그러면 그 번역가에겐 다른 작품이 주어지며 커리어를 쌓을 기회가 보장됐다. 그런데 지금은 영화제가 자막팀의 공채 절차를 가시화하지 않고 특정 회사에 일임해 하청을 준다. 이 경우 회사에 소속되지 않고는 업계에 진출할 길이 주어지지 않는다.” 언어별 전문 번역가가 등장한다면 관객은 보다 정확한 자막을 누릴 수 있다. 동시에 수입의 허브인 영화제나 수입사 또한 자신들의 자산을 보다 정확하게 소개할 수 있다. 공급자와 수요자 모두에게 유용한 번역 환경 조성이 필요해 보인다. /정재현

Q3. 번역가 이외에 자막 관련 직종은 무엇이 있나?

많은 번역가가 감수 업무까지 병행하지만 자막 감수를 전담하는 전문 인력도 별도로 존재한다. 영상 번역 전문 업체나 방송국의 국제방송 부서, 웹툰·웹소설을 다루는 종합 미디어 회사에서는 자막 감수자를 따로 채용한다. 이들은 작품의 분위기와 맥락에 어울리는 문체, 자연스러운 흐름, 현지 문화에 맞는 표현을 점검한다. 단순히 오역을 바로잡는 데 그치지 않고 필요에 따라 문체나 어휘를 다듬는다. 감수자의 스타일에 따라 손대는 범위는 다르지만 공통적으로는 ‘잘 보이는 번역’을 완성하기 위한 마지막 조율자 역할을 맡는다. 비교적 덜 알려진 직종으로는 CG(Character Generator) 디자이너가 있다. 흔히 영화 속 특수효과를 담당하는 CG(Computer Graphics)와 혼동되지만, 이들의 작업 대상은 글자다. 예능프로그램에서 재미를 더하는 리액션 자막, 뉴스 화면의 인물 정보, 다큐멘터리의 설명 자막 등, 화면에 띄워지는 텍스트 대부분이 이들의 손을 거친다. 또 다른 중요한 직무는 자막 오퍼레이터다. 흔히 영화제 상영관 구석에서 노트북을 켜고 조용히 앉아 있는 의문의 1인이 바로 이들이다. 자막 오퍼레이터는 영화 상영 중 자막 싱크를 실시간으로 확인하고 오류나 기술적 문제가 발생하지 않도록 모니터링하는 역할을 한다. 기술적 전문성이 높지 않아도 도전해볼 수 있는 직무다. 영화제에서 사전 교육을 제공하기 때문에 대학생도 참여할 수 있다. 지난해 한 국제영화제에서 자막 오퍼레이터로 활동한 A씨는 “예전에 영화제 자원봉사를 하면서 영화제 자체에 관심은 있었으나 오퍼레이터라는 직무는 잘 몰랐다. 호기심으로 지원했는데 교육만으로도 현장에서 일하는 데 전혀 무리가 없었다. 상영 준비를 하면서 같은 영화를 여러 번 보게 되니까 그 작품에 애정이 깊어졌다. 관객들이 웃을 거라고 예상한 자막 장면에서 실제로 웃음이 터질 때 느끼는 나만의 쾌감이 있다”라고 생생한 후기를 전했다. 극장에서 영화를 가장 가까이 마주하는 자리, 자막 오퍼레이터에 한번쯤 도전해보는 건 어떨까. 관련 공고는 각 영화제 공식 홈페이지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이유채

Q4. OTT가 전담 번역팀을 따로 구성한다고 알려져 있는데 사실인가요?

취재 결과 넷플릭스, 디즈니+ 등 OTT 플랫폼 내에는 자막 번역을 전담하는 고정 팀이 존재하지 않는다. 작품마다 적합한 번역가와 감수자를 섭외해 프로젝트 단위로 협업하는 방식이다. 대신 넷플릭스는 내부에 자막 서비스를 담당하는 부서를 두고 있다. 이른바 “자막의 현지화”를 전담하는 팀이다. 여기서 말하는 ‘현지화’(localization)란 각 문화권의 시청자가 이야기의 감정과 맥락을 자연스럽게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도록 표현을 정교하게 조율하는 작업이다. 예컨대 한국어 대사의 유머나 정서를 영어 자막으로 옮길 때 문화적 어색함 없이 전달되는지를 점검한다. 이 때문에 원작과 대상 언어권, 양쪽 문화를 깊이 이해하는 이중 문화권 전문가를 투입한다. 이러한 접근법은 K콘텐츠의 글로벌 성공에 있어 핵심적인 역할을 하고 있다. 단순히 대사를 다른 언어로 옮기는 것을 넘어 각국 시청자들이 한국 문화의 고유한 정서와 맥락을 온전히 느낄 수 있도록 하는 ‘문화적 번역’이야말로 진정한 의미의 글로벌 소통이라 할 수 있다. 넷플릭스는 이러한 기준을 바탕으로 “현재 30개 이상의 언어로 콘텐츠를 현지화”하고 있다고 밝혔다. 검수 단계에서도 같은 기준을 적용한다. “현지 언어와 문화, 자막 프로세스 전반에 대한 이해도가 높은 검수자가 결과물을 점검한다. 창작 의도를 정확히 전달하는지, 언어적·문화적으로 적절한지, 최적의 시청 경험을 제공하는지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한다”는 게 넷플릭스의 설명이다. 번역 인력 확보를 위한 장기적인 인재 양성도 병행 중이다. 지난해 넷플릭스는 한국문학번역원과 파트너십을 맺고 문학·웹소설 분야에서 활동해온 번역가들을 대상으로 영상 자막 번역 교육을 실시했다. 수료자 중 일부는 <트렁크> <중증외상센터> 등 넷플릭스 작품에 한영 자막 번역가로 참여했다. /이유채

Q5. 자막의 감수 과정은 어떻게 이루어지나요?

출판 전 교열과 편집을 통해 원고를 매만지듯, 자막 역시 상영본(DCP)에 삽입되기 전 감수 과정을 거친다. OTT 회사와 상시 협업하는 번역가 A씨에 따르면 영화 자막은 “현지 언어와 문화, 그리고 자막에 대한 이해도가 높은 전문 감수자가 교차로 점검”한다. 자막 감수는 “창작 의도가 명확히 전달되는지, 언어적·문화적으로 적합한 문장이 쓰였는지, 이상적인 자막 시청 경험을 제공하는지 등을” 종합적으로 확인하는 과정이다. 영화제 자막을 주로 제작하는 B씨는 감수 과정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해주었다. “① 번역 후 자막가가 싱크를 수정하며 오류를 찾는다. ② 자막가의 의견을 포함하여 클라이언트 내부의 감수자가 작품 전반을 검토한다. ③ 번역가가 최종 시사 단계에서 재확인한다.”

자막 감수는 오역 발생의 가능성을 줄이는 동시에 자막의 질을 드높이는 과정일 것이다. 취재에 응한 다수의 번역가는 “결국 번역에 대한 최종 책임은 번역가에게 있다”고 전제하면서도 감수 과정에 대해 각기 다른 제언을 남겼다. 프리랜서 번역가 C씨는 자막의 퀄리티 상승을 위해 감수 단계에 관여하는 실무진 또한 언어와 번역에 능통한 이들로 꾸려지길 희망한다. “자막 감수는 회사 내부의 마케팅팀원, 배급팀원이 도맡는 경우가 많다. 이 경우 언어 전문가가 참여하는 것이 아니다 보니 퀄리티 컨트롤에 문제가 생길 수 있다. 그간의 작업물 중 가장 질적으로 우수하다고 생각하는 번역 작품이 있다. 번역을 마친 후 신뢰하는 다른 번역가에게 감수를 청탁한 뒤 그분의 피드백을 회사에 전한 다음 퇴고를 마쳤던 작품이다. 모두가 알듯 스타 플레이어로만 팀을 꾸린 사회생활은 이상에 불과하다. 번역 업계 또한 여느 협업처럼 각자의 위치에서 조금씩 양보하며 완성되는 일이지만 보다 좋은 자막이 탄생할 여지는 곳곳에 있다.” 직배사의 블록버스터영화를 주로 전담하는 D씨 또한 “만약 감수 과정에 전문가의 개입 등 절차가 추가로 늘어난다면 또 다른 고민이 뒤따를 수밖에 없다. 그럴 바에야 내부에서 소화하는 게 편하다고 보지 않을까. 결국 번역가가 개인의 역량을 키우는 수밖에 없다는 결론으로 귀결된다”라고 첨언했다. 자막 수급, 배급, 마케팅 등 개봉에 따르는 전 과정이 다단한 감수 과정을 보장할 만큼 여유 있지 않은 현실도 고려할 문제다. /정재현

Q6. 인공지능은 번역가의 미래를 위협하나요?

챗GPT, 딥엘(DeepL), 클로드(Claude), 제미나이(Gemini)…. 번역에 도움을 준다고 알려져 있는 생성형 AI다. 유튜브나 구글 비디오 플레이어로 영상을 재생하면 플랫폼이 영상 속 언어를 인식해 클로즈드 캡셔닝(Closed Captioning)으로 자막을 자동 생성하는 시대다. 지난해 <가디언>은 다수의 번역가로 구성된 영국 최대의 작가노동조합 SoA(The Society of Authors)의 조합원 중 36%가 생성형 AI로 인해 실직했고, 43%는 생성형 AI로 인해 소득이 줄었다고 보도했다. 인공지능은 정말 번역가의 미래를 위협할까?

번역가들은 인공지능의 쓰임이 생계에 지장을 줄 정도는 아니라고 답했다. 영화제 자막을 전문으로 운영하는 번역가 A씨는 “번역가나 업체마다 의견이 다를 것”이라고 운을 떼며 “영상 번역은 텍스트뿐 아니라 영상에서 얻을 수 있는 정보들이 많다. 영상의 정보와 텍스트, 맥락을 종합적으로 판단하는 데에는 AI가 아직 아주 미흡하다”라는 의견을 제시했다. 출판 번역과 영상 번역을 오가는 번역가 B씨는 “글자 수, 대상 연령 및 성별 등 극장 자막이라는 점에서 고려해야 할 여러 제약”으로 인해 인공지능이 영상 번역에서는 큰 효용이 없다고 밝혔다. “대명사 ‘You’ 하나를 놓고도 우리말로 옮길 때 수많은 가짓수를 고민하는 일이 영상 번역이다. 이를 단순히 인공지능이 작업한 후 인간이 감수하는 절차로 일단락하기엔 여러 리스크가 따른다.”(B씨) 한편 올해 초 황석희 번역가가 <전지적 참견 시점>에서 인공지능에게 번역의 정합성을 묻는 장면이 전파를 탔다. A씨 또한 인공지능과의 협력 가능성이 다양함을 시사했다. “인공지능을 통해 우리가 잘 모르는 문화권의 정보를 확인할 수 있고 친숙하지 않은 언어의 원문을 확인할 수 있다는 점은 유용하다. 이외에도 관용어구나 전문어의 용례를 확인하고 점검하는 등 오역의 위험성을 감소시키는 도구로서는 탁월하다.” 인공지능을 활용해 작업의 효율성과 능률이 리서치의 정확성까지 담보할 수 있다면, 번역 업계 역시 인공지능과 공조하는 방향으로 활로를 찾아 나설 것이다. /정재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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