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독 ‘박세영’의 탄생
- 목회자 집안에서 태어났다. 유년기를 해외에서 보냈는데.
아버지가 언어학과 바울 신학 공부를 하셔서 가족과 토론토에 살았다. 가난하지만 행복했다. 지금은 대구의 개척교회 목사다. 귀국을 준비할 때 가족들이 내가 일반적인 한국 학교에 다니면 적응하지 못할 거라 고심했다고 한다. 그래서 대안학교에 갔는데 그곳에서도 초반엔 적응이 쉽지 않았다. 아주 힘든 시기를 보냈다. 중학생 때 실질적으로 한국어를 제대로 배웠고, 처음으로 완독한 한국어 소설이 최인훈의 <광장>이었다. 이전까지는 영어가 더 편했고, 소설을 쓰고 싶었다.
- 2024년 발표했지만 촬영 시점으로는 사실상 아버지와 개의 등산을 담은 <땅거미>가 최초로 작업한 영화다.
아버지가 독특한 사람이라는 생각을 늘 해왔다. 길을 걸으면서 혼자 생각하느라 전봇대에 부딪히는 사람이다. 매일 아침 혼자서 기도하려고 뒷산을 오르는데, 닦이지 않은 길로도 혼자 아무렇게나 올라간다. <땅거미>를 찍을 때도 아무 디렉션을 하지 않고 그냥 정상까지 가달라고만 했다. 3~4시간 분량의 영화가 나왔는데 교수님이 이건 영화가 아니라고 하기에 더 장르적인 다른 단편을 찍었다.
- 아버지가 카메라를 전혀 의식하지 않기에 아들이 카메라를 든 풍경이 매우 익숙한 가정이리라 짐작했다.
고향에 내려갈 때마다 모든 걸 다 찍었다. 그런 점에서는 요나스 메카스를 존경한다. 어린 시절부터 노년기까지 늘 삶의 많은 것을 찍어왔지만 촬영 실력이 기술적으로 늘지 않은 게 보인다. 지향점도, 대상을 포착하는 방식도 진정성에 초점이 맞춰 있다. 그것만으로 죽을 때까지 호흡했다. 그 태도가 내게 영감을 준다.
- 영상원에 가겠다는 결심도 자연스럽게 한 건가.
영상원과 파슨스디자인스쿨을 지원했다. 학비의 측면에서 두 학교는 극단적으로 다른데(웃음) 지금 돌아보면 사실 그만큼 절실하지 않았다는 뜻 같다. 10대 시절에 혼자 재봉틀로 옷 만드는 게 가장 큰 즐거움이었던 건 사실이다. 혼자 드레스를 만들었다. 바로 그런 점이, 남성성의 부재로 보여진 지점들이 왕따와 괴롭힘의 이유이기도 했다. 나로선 살아남기 위해서 내 안의 여성성을 은폐하고 사회적인 남성으로서의 역할을 찾으려고 애썼던 것 같고 어쩌면 그래서 패션보다 영화에 집중하게 된 건지도 모른다. 성장의 브루탈리즘 아닐까.
- 영화학교가 당신에게 남긴 것은.
OT날 일찍이 알게 됐다. 어떤 감독을 좋아하냐고 묻는 질문이 비웃음의 대상이 되더라. ‘술이나 마셔’ 같은 분위기가 있었고 ‘영화 하는사람들’이라는 특정한 생태계에 나는 어울리지 않는다는 느낌을 받았다. 이후로 미술원 수업에 몰두했다. 문혜진 평론가의 강의를 6번씩 들었다. 영화 수업의 역사는 1895년부터 시작하지만, 미술 수업은 광학적인 것에서부터 시작해 몇 천 년을 관통한다는 사실도 좋았다.
- 영화학교 문화에 실망하면서도 영화 만들기를 지속할 수 있었던 꿋꿋함의 배경도 궁금하다.
학교 끝나면 혼자 도서관 가서 영화 보고 책읽는 것. 그것이 즐거웠기 때문이다. 그때 차이밍량과 대만 뉴웨이브 감독들의 아시아영화들을 보고 우리와 비슷한 피부색과 표면을 지닌 영화들이 이토록 다양한 감각을 전해준다는것에 힘을 얻었다.
- 영화제, 그리고 지원제도에 대한 입장은 어떤가.
기본적으로 나는 독립영화 생태계에 끼지 못한다고 생각했었다. 지원사업에 수십번을 제출해봤지만 당선된 적이 단 한번도 없다. 그런데 이해가 된다. (웃음) 각본만 봐도 만들어질 형태의 영화가 명확히 보이는 작업이 아니니까, 나도 그걸 받아들이고 통장에 50만원 있으면 있는 대로 찍어왔다. <땅거미>도 그렇게 아버지와 가족을 찍기 시작한 거고. 운 좋게 영화제의 호출을 받긴 했지만 항상 어딘가 간당간당하게 들어갈까 말까 한 느낌. 러닝타임도 겨우 맞추고. 첫 장편 개봉작인 <다섯 번째 흉추>는 첫 편집본이 60분하고 1프레임, 처음 미쟝센단편영화제에 가본 <캐시백>은 29분59초23프레임. 상을 받아도 심사위원 언급 정도다. 최고상 줄 작품은 아니고 약간 이상하게 좋으니까 언급해주는 것 같은. 완전히 변방의 입지라고 생각하고 그냥 받아들이고 작업을 지속하고 있다. 이렇게 찍는 사람이 드물고 그동안의 작업만 놓고 보면 지속 가능한 형태도 아니니까.
- 적어도 제도권의 인정 여부로 절망하지는 않았다는 말로도 들린다.
아닌데… 많이 울었다. 많이.
- 한편 피칭에 강하다는 평가도 있다. 웹사이트 등에 포트폴리오를 전달하는 방식도 매력적이다.비주류적인 작업 형태를 지속하되 시장과 소통하는 창구를 나름대로 개성 있게 구축해가고 있다는 인상도 강하다.
적어도 내 입장에선 낯부끄럽다. 내가 하고 있는 게 품위가 없는 행동인 것 같다. 하지만 계속하는 이유는 내게 가난함보다 더 슬픈 건 없는 것 같아서. 프리랜서로 일하니까 일이 안들어오면 굶는다. 작업도 지속할 수 없다. 그럼으로 끊임없는 자기 팔기, 그러나 너무 영혼을팔아먹지 않는 선을 고민한다.
- 박세영 개인의 생계와 작업자로서의 지속 가능성,재생산을 추구하는 방식은 어떻게 공생할까.
경제적인 제약 속에서 발버둥치는 것 자체가 독립영화를 계속해야 하는 이유 같다. 돈이 없어도 계속 하려고 하는 것, 돈이 있어도 없다고 생각하면서 하는 것이다. ‘나는 돈이 없으니까 하고 싶어도 못해’라는 태도만큼은 경계하려고 한다. 동시에 30대이고 책임져야 할 고양이 두 마리가 있고 더 이상 자기만족으로 작업을 지속할 수는 없다. 이건 생계의 문제이기도 하고 책임감의 문제이기도 하다. 적어도 한편의 영화를 찍었을 때 이 영화로 인해 다음 영화를 찍을 수 있는 정도의 경제성은 고려하는 고민이 필요하다. 50만원으로 영화를 찍는다고 할 때 적어도 이 영화로 다시 50만원을 창출하겠다는 생각 정도는 해야 하지 않냐는 것이다. 그것이 각본과 아웃풋에도 영향을 준다. <누가 내 십자가를 훔쳐갔나?>는 대부분 이전엔 함께해본 적 없는 스태프들과 처음으로 작업한 영화이고, 촬영하면서 결국 내가 이곳으로 향하고 있었다는 느낌을 받았다. 정리하자면 하나의 궁극적인 영화를 향해 가고 있는 게 아니고 계속 다음 영화를 향해 실행하는 것. 시행착오를 겪으면서 실패할 수 있는 장을 경험하는 것. 그러한 기회를 지속적으로 만들어내려고 노력하는 것에서 독립영화의 의미를 찾아야 한다.
<누가 내 십자가를 훔쳐갔나?>(가제)
2026년 공개될 박세영 신작 <누가 내 십자가를 훔쳐갔나?>. 배우 정회린이 믿음을 갈구하며 교인들의 물품을 훔치는 여자를 연기했다. 보디 호러와 크리처물로 대표된 이전 작품들의 표면은 한층 누그러진 형태로, 클로즈업과 지속적인 롱숏 모두 그 초점과 응집력이 정교해진 박세영만의 리얼리티를 보여준다. 정제된 표층에서 광기와 열망, 처절한 외로움을 고스란히 옮기는 건 배우 정회린의 얼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