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Skip to contents]
HOME > Magazine > 스페셜 > 스페셜2
불안의 발로, ‘넥스트 시네아스트’ 박세영 감독 인터뷰 ➀
김소미 사진 최성열 2025-06-17

무주 최북미술관에서 열린 넥스트 시네아스트 라운드테이블 두 번째 ‘영화의 뒷면에서, 포스트프로덕션의 시간’. 사진제공 무주영화제.

- 올해 무주산골영화제가 기획한 첫 넥스트 시네아스트 기획전의 주인공으로 선정되어 무주에 다녀왔다. 잠시 환기하는 시간을 가졌는지.

에무시네마에서 영화제측과 첫 공식 미팅을 가졌는데, 권위의 주체로서 감독 한 사람만을 조명하지 않으려는 시각을 느꼈다. 영화 만들기에 관해 감독이 단독자로 나서는 게 아니고 후반 작업자들, 다양한 기술 스태프들과 공동의 논의를 가질 수 있는 라운드 테이블이 있다는 게 특히 기뻤다. 하루에 두어 시간 일정을 소화하고는 할 게 없어서 그냥 가만히 앉아 있었다. 무주로 향할 때 당면한 모든 것을 성실히 해보자는 마음이었다. 대충 버스 타고 졸면서 가지 말고 오토바이로 가보자 해서 6시간 정도 국도를 탔다. 한국의 대륙을 횡단한다는 것에서 오는 느낌, 무슨 의미 같은 게 있을 줄 알았는데 그냥 춥고 배고팠다. 서울로 돌아올 땐 용달을 불러서 오토바이를 싣고 돌아왔다.

- 인터뷰에 앞서 <누가 내 십자가를 훔쳐갔나?>의 가편본을 보여주기에 조금 놀랐다.

무주에서 돌아와서도 계속 편집하고 있다. 편집하고 추출하는 게 일상이라 그렇다. 지난해 11월에 촬영을 시작해서 지금까지 편집하고 있다. 내년 칸영화제 감독주간에 출품하고 싶다.

- 우선 두 번째 장편 <지느러미>가 올해 영화제에서 공개될 것으로 기대하고 있는데.

<다섯 번째 흉추> 이후 비슷한 예산인 2천만~3천만원으로 일주일 안에 찍고 한달 안에 편집하려고 했던 작품이 <지느러미>인데 후반작업에서 초반 계획보다 덩치가 많이 커졌다. 처음엔 시소픽쳐스에 도움을 청했고 이후 해외 공동제작 오피스가 합류하면서 예산이 늘어났다. 2022년 촬영을 시작했는데 지금 약 3년 동안 후반작업을 계속하는 셈이 됐다. 편집권한의 문제도 겪었다. <지느러미> 중 보광동에서 찍은 풀숏에서 오래된 한국 교회의 붉은십자가들이 보였는데, 서양 관객들에게는 혼란스러울 수 있으니 빼달라는 피드백을 받고약 60만원을 추가로 들여서 CG 작업을 하는 식이었다. 한국의 고유한 풍경을 소격한다는데 갑자기 분노가 생겨서 아예 십자가가 중심인 영화를 찍어야겠다고 결심하고는 새 각본을 쓰기 시작했다.

사진제공 무주영화제.

- <지느러미>는 그동안의 작업 중 가장 선명한 장르적 약속을 필요로 하는 세계다. 근미래의 디스토피아를 다루는 SF로 인간 사이에 스며든 괴인의 존재를 다룬다.

처음엔 감각, 냄새, 질감만 있는 슬로 무비를 만들자는 구상이었다. 이상적인 <지느러미>의 형태는 3천만원 정도에서 더 자유로운 선택을 할 수 있는 작품이었다. 갈대밭을 이동하는 장면만 6분 이상, 피아노 치는 장면만 15분 이상 되는 롱테이크 구성으로, 내용보다 감각적 경험을 극대화하려는 시도였다. 해외 투자가 들어오면서 유럽 아트하우스 시장에 구축된 영화제나 마켓을 향한 전략, 오리엔탈리즘적인 기대가 어느 정도 반영됐다고 본다. <지느러미>의 최초 속성이라고 생각했던 민감한 감각적 취미가 어느 정도 소격화된 한편 장르적 명확성은 더 강조됐다. 아쉬움과 괴리를 느끼지만 책임감을 갖고 마무리했다. 가변적으로 외부의 영향을 받는 것 또한 영화 작업의 일부라는 생각에 제작 과정을 더 구체적으로 말하는 것이다.

- 브랜드 광고, 뮤직비디오 등 커머셜 작업의 대형 프로덕션에도 발 담그고 있지 않나.

영화가 아닌 영상 프로덕션에서는 완전히 보수적인 체계에 적응해서 한다. 기획과 개발을 엄청나게 세부적으로 길게 하고, 현장에선 뒤에서 마이크 잡고 일하는 규격화된 체계다. 사실 <지느러미>를 하기 전에 전고운 감독이 한동안 거의 선생님처럼 아이템 개발을 도와줬다. <다섯 번째 흉추> 이후에 최소 6개월은 진득이 시간을 들여서 제작사에 보낼 만한 상업 아이템을 만들어보라는 권유였다. 그런데 내가 그걸 못 견디고 몰래 혼자서 <지느러미>를 쓰다가 들켜버렸다. 전고운 감독이 모험하는 심정으로 1천만원 정도 ‘엔젤 투자’를 해줬다(단편 <캐시백>으로 미쟝센단편영화제에 심사위원이었던 전고운 감독과 인연을 맺었고 2021년 루이비통 광고를 함께 찍었다.-편집자). 이런 이야기를 솔직하게 공개하는 이유는 적어도 내 영화의 출발점들이 사비, 개인 투자등으로 시작되었다는 것. 그래서 영화가 이뤄야 할 성취에 대한 외적인 시선이나 검열이 없었다는 점을 말하고 싶기 때문이다. 제대로 된 각본을 읽어보지도 않고 투자에 진입해준 분들이 있었고, 때문에 열악한 환경에서 모든 스태프들이 고생하는 노력에 부응할 정도의 엣지가 있느냐 없느냐에 대한 자가 판단이 곧 영화를 촬영하는 기준이 됐다.

- <누가 내 십자가를 훔쳐갔나?>의 예산은 최초에 어떻게 마련했나.

아는 광고사 대표님한테 바로 전화했다. 5천만원씩 두 편, 총 1억원을 개인 투자해주면 원하는 모든 크레딧과 이후 수익금까지 보장하겠다고.

<지느러미>

- <다섯 번째 흉추> 이후 2024년에 발표한 단편영화만 4개인데 구체적인 동력원이 있었나. <괴인의 정체>는 로카르노영화제에서 단편 경쟁 심사위원 특별 언급을, <땅거미>는 전주국제영화제에서 심사위원특별상을 받았고, <미쉘>은 부산국제영화제 단편 경쟁 초청, <원령공주>는 리움미술관 전시에서 프리미어 상영했다.

<지느러미> 후반작업을 프로덕션 오피스 초청으로 베를린에서 했다. 영화제 시작 전에 가서(2022년 베를린국제영화제 비평가주간에 <다섯 번째 흉추>가 초청됐다) 6개월 동안 매일 편집만 했다. 살이 25kg이 쪘다. 한층이 4~5개 방으로 이루어져 있었는데 고문당하는 소리, 사람 죽이는 소리를 스피커로 틀어 놓고 작업하는 도발적인 팀들과 수용소에 갇힌 기분으로 작업했다. 그때 내 기질에 대해 확실히 알게 됐다. 광고, 외주 작업 혹은 외부의 압력에 의해 작업한다고 느끼면 딱 거기에 들인 에너지의 정도만큼 ‘내 것’을 하고 싶은 반동이 생긴다는 거였다. 컨트롤하기 힘든 환경에서작업할수록 자극 받아서 더 생산하고 싶어진다. 그 시간을 거쳐서 단편 4개를 모두 작업했고 장편까지 찍었다.

- 2024년 발표한 단편들 중 가장 먼저 작업한 것이 <괴인의 정체>인가.

무성영화 공연 기획을 의뢰받고 아이폰에 써둔 짧은 노트가 있었다. 일회적인 상영에 맞춘 영상으로 끝내고 싶지 않아서 내 나름의 전략에 집중했다. 이틀 만에 현장 촬영은 완료했고 제작비는 30만원이 들었다. 까마귀 모형, 가짜피, 가면 하나 손에 들고 무작정 숲으로 들어가서 아이폰 노트에 적힌 5개 문장을 순서대로 찍기 시작했다. 그때 가평에 살고 있었는데 이곳을 떠나기 전에 한편 정도는 꼭 찍자는 마음도 있었다. 촬영 후 하루 만에 편집했다. 여러모로 심플한 작업이었다.

- 단편 <원령공주>는 장편 <지느러미>의 일부 푸티지를 공유하고 있다.

베를린에서 너무 힘들 때 한국 트로트 발라드, 뽕짝에 심취했다. 특히 신경자 선생님. <지느러미>에 쓰려고 알아보는데, 앨범은 많은데 도무지 저작권 찾기가 어려운 거다. 유명하고 힘있는 분이라면 차라리 법적으로 고소당할 각오를 하고서라도 쓸 텐데 오히려 그렇게 못하겠더라. 고향을 떠나서 베를린에서 신경자 음악의 출처를 찾으려고 애쓰는 상황이 이질적으로 다가왔다. 이를 바탕으로 영화를 찍고 싶은데 베를린 편집실에 갇혀 새로 찍을 수 있는 소스가 없으니까 <지느러미>에서 쓰지 못한 찌꺼기를 완전히 변형하는 방식으로 일단 구성하고, 한국에 돌아온 뒤 대림동을 걷다가 우연히 춤추고 있는 사람들을 발견해서 찍어도 되냐고 묻고 몇 개월 동안 같이 찍은 것을 결합했다. 전국동포총연합회 분들이었고 처음엔 이들 각자의 악몽을 찍고 싶었다. 그들의 악몽을 취재한 다음 그 내용을 무대에서 재현하는 극을 찍어서 넣어볼까 했다가, 이들을 대상화하는 행위라는 생각에 그만뒀다. 결과적으로 리움미술관 전시 커미션 작업으로 완성했고, 픽션의 구성에 국한되지 않아도 될 것 같다는 생각에 흩뿌려져 있는 감각으로 완성했다. 그 가운데 정회린 배우의 목소리가 축을 잡아줬고.

- 괴로움을 호소하지만 역설적으로 자신의 파편을 모아주는 존재들을 찾아나서는 것 같다.

그들이 없으면 내 영화는 별로인 것 같다. 유럽 프로덕션 오피스가 <지느러미>를, 배우 홍경이 <미쉘>을, 정회린이 <원령공주>와 <누가 내 십자가를 훔쳐갔나?>를 지탱해줬다. <미쉘>은 홍경 배우와 나란히 앉아서 썼다. 내가 쓰면 그가 옆에서 곧장 대사를 읽었다. 그의 목소리를 들으면서 썼다. 나는 이제 내가 어떻게 족쇄 채워질 것인가, 내 파편이 어떻게 모일 것인가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했고 아주 조금은 알 것 같다. 강압적이고 불편한 상황들이 괴롭지만 그럼에도 그 속에서 조절해나갈 수 있는 환경으로 계속 다시 들어가려고 한다. 그게 진정한 의미의 협업이기도 하다.

불안의 발로

- <다섯 번째 흉추>에 이어 <지느러미> 역시 보디호러적 관심사를 이어간다. 물리적 미술로 구현된 변형된 신체, 몸 바깥으로 떨어져 나온 신체의 조각이 곧 시점이 되고 주체가 되어 극을 이끄는데, 어디에서 어떻게 태동한 감각일까.

이렇게 답해야 할 것 같다. 그 출발점들이 벌써 4년 전이라 이제는 전혀 관심이 없는 주제라고.

- 자폐적인 소통 방식 속에서의 결렬된 사랑이 지속적인 테마 중 하나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박세영의 멜로드라마는 호러를 동반한다.

개인적 경험에 영향을 받는다고 말하고 싶진 않다. 영화 공부할 때 동기가 내게 “너는 죽을 때까지 로맨스는 못하겠다”라고 말했는데 차라리 그 불안의 발로가 아닐까. 로맨스에 집착했다. 최소한의 로맨스의 조건에서 시작해서 영화가 얼마만큼 다른 방향으로 갈 수 있는지 실험해보고 싶은 쪽에 가깝다. <다섯 번째 흉추>가 그렇게 나왔는데 많이 부족했다. 올해 말에 찍으려고 새롭게 준비 중인 영화가 그 연장선에 있다. 뒤늦게 내가 <다섯 번째 흉추>에서 정말 하고 싶었던 것이 무엇인지 깨달았고, 신작 <새틀라이트 오브 러브>에서 제대로 해보려고 한다. 모텔에서 두 남녀가 헤어지는데 여자주인공이 정말 사랑한다면 10년 뒤에 이 모텔에서 다시 만나자고 하고 10년을 기다리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다.

- 연출과 촬영을 병행하는 방식에 대해 실질적으로추구하는 이점은. 종종 동료들의 작품에도 촬영감독, 색보정으로 참여하고 있다. 스스로를 테크니션이라고 정체화하나.

일단 형편없는 촬영감독인 것 같아서 다른 작품에 참여하는 일은 이제 하지 않으려고 한다. 지속 가능한 형태의 작업 생태계를 만들기 위해서라도 앞으로는 직접 촬영하기보다 역량있는 촬영감독들과 협업할 생각이다. <미쉘>을 그렇게 작업했다. 그동안 직접 촬영을 한 이유엔 제작비 여건상 감독이 직접 촬영까지 겸하는 현장의 용이함이 컸고, 스스로는 수행적인 의미가 있었다. 한국예술종합학교 영상원 재학 시절에 처음 영화를 찍으려다가 엎어졌다. 이유는 촬영감독이 떠나서다. 혼자라도 카메라 들고 가서 찍자는 생각으로 시도했다가 내가 카메라를 제대로 켜는 방법조차 모른다는 걸 그때 알게 됐다. 대학교 2학년이었다. 자괴감이 심했다. 외적인 동기에 의해 영화가 엎어질 수는 있다. 그런데 감독을 하겠다는 사람이 카메라를 제대로 다루지도 못해서 영화를 찍지 못한다는 건 수치에 가깝게 느껴졌다. 인력과 기술력이 아무리 부족해도 영화를 만들 수 있어야 한다는 생각으로 그때부터 직접 촬영에 나섰다.

- 과감한 촬영과 편집을 직접 수행하는 작가이기에 확보되는 매체적 실험의 가능성이 분명하다. 촉각을 극대화하는 질감 중심의 화면, 열화된 화면의 노출 등의 스타일에 집중해서 말해 준다면.

피부에 관심이 많았다. 촉각성, 만져지는 느낌. 극단적으로 표현하면 인간 피부가 메탈릭해 보이기도 하고 리넨처럼 완전히 다른 질감으로 바뀌기도 한다. 저예산 영화에서 할 수있는 아주 좋은 탐구라고 생각했다. 내 작업은 배우나 풍경을 예쁘게 보여주어야만 하는 이른바 뷰티숏에 대한 강박이 전혀 없다. 그러니 오히려 극적인 변형을 시도하는 과정에서 감정을 불러일으킬 수 있지 않을까 실험해보는 것이다. 하모니 코린 영화에서도 시도되는 것처럼. 코린의 <줄리앙 동키 보이>(1999)가 아주 인상적인 예다. 연출자의 시선, 대상을 포착하는 방식이 카메라의 사이즈와 운동성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질감 표현에도 있다는 것을 정확히 배웠다.

- 후반작업에서 변형을 통한 재구성을 촉발하는 재료는 주로 어떤 숏들인가.

불완전한 것을 그대로 드러내는 것이 인디펜던트 시네마의 메리트라고 생각한다. <다섯 번째 흉추>와 <지느러미>까지는 현장에 조명기가 거의 없었다. 당연히 거의 모든 숏에서 노이즈가 많이 발생했다. 노이즈 리덕션을 하면 인물 표면이 거의 찰흙처럼 변해버린다. 그걸 은폐하지 말고 그대로 드러내고 싶었다. 열악한 환경에서 찍힌 푸티지들이 후반작업에서 발휘하는 영향을 그대로 흡수해서 바꾸고 또 바꿔나가는 식의 상호작용을 하는 것이다.

관련영화

관련인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