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세기의 영화는 진정 21세기의 영화일까? <씨네21>이 창간 30주년을 맞아 꾸린 연재 기획 ‘21세기 영화란 무엇인가?’는 이러한 질문으로부터 시작했다. 물음표는 꼬리에 꼬리를 문다. 과연 21세기 영화는 20세기 영화의 그림자에서 얼마나 벗어나 있을까. 20세기를 벗어나 어떤 곳으로 나아갈 수 있을까. 아니면 그럴 수 없을까. 애초에 ‘21세기 영화’라는 게 있기는 한 것일까. 마침 21세기는 이제 막 사반세기를 지나고 있다. 자신을 되돌아볼 때다.
요컨대 ‘21세기 영화란 무엇인가?’ 연재는 20세기 영화의 역사를 검토하되 그것을 재론하려는 자리가 아니다. 20세기의 주류 담론으로 포섭할 수 없는 21세기 영화만의 요소를 찾아내려는 시도에 가깝다. 연재는 총 6개의 대주제로 구성된다. 각 대주제 아래에는 4개의 소주제를 선정한다. 연재 기획의 편집위원은 이도훈, 김병규 평론가와 이우빈 기자다. 동시대 영화 연구, 비평, 저널리즘에 종사하는 이들이 연재의 큰 틀을 닦고자 한다. 이 과정에서 각 대주제에 맞는 다양한 필자를 초빙해 더 구체적으로 주제를 논의한다. 그리고 그 이야기의 편린을 다양한 소주제의 형태로 내보내고자 한다. 격주마다 하나의 글이 공개되고, 1년에 걸쳐 24개 내외의 글이 완성될 계획이다.
차후 연재에선 공간, 얼굴, 움직임, 이야기 등의 대주제를 선보일 예정이다. 이 역시도 20세기를 거치며 쌓인 영화의 이론들을 다른 시선으로 바라보려는 시도다. 이를테면 20세기 영화의 공간이 드러냈던 ‘풍경’을 하룬 파로키의 <평행> 시리즈에 적용할 수 있을지에 대한 호기심, 혹은 21세기의 영화가 20세기의 공간이라 할 수 있는 ‘강제수용소’를 어떻게 다룰지에 대한 의문 같은 것들이다. 영화이론가 루돌프 아른하임은 <예술로서의 영화>(1957)의 ‘움직임’ 챕터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영화는 주로 어떤 사건들을 보여주는 것을 전문적으로 다룬다. 즉 영화는 시간에 따른 변화를 보여주는 것이다”라는 주장이다. 21세기의 관객은 당연히 반문할 수 있다. 예컨대 아바스 키아로스타미는 공간이 시간을 만드는 영화, 내러티브가 사건을 흩뜨리는 영화, 카메라가 연출자를 없애는 영화 <텐>(2002)을 만들었다.
다만 21세기 영화에 대한 논의는 특정한 영화 작품이나 감독, 사조 등 영화예술이라 말해지는 미학적 고민에만 치중될 수 없다. “영화라는 자본주의의 식민지. 일단 영화 안에 들어오면 누구도 방관주의자가 되지 못한다.”(정성일 영화평론가) 영화의 제작·배급·상영 생태, 영화제, 극장, 영화 저널리즘과 아카데미 등 영화 매체를 둘러싼 여러 지대 역시 함께 이야기해야 할 대상이다. 영화가 만들어지고 유통되며 관객에게 가닿는 제도의 변화들은 즉각 영화 내부의 변화로도 이어지기 때문이다. 특히 영화 스튜디오 체계의 변화 양상은 20세기와 21세기의 틈을 가장 가시적으로 드러내는 주제가 될 것이다.
이렇게 시작되는 ‘21세기 영화란 무엇인가?’ 연재의 첫 대주제는 ‘20세기의 기억’이다. 21세기 영화만의 의미를 찾기 위해서는 과거의 유산을 복기하는 일부터 이뤄져야 마땅하기 때문이다. ‘20세기의 기억’의 첫 필자로 나선 이는 한국의 20세기 영화사를 논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이름 중 하나, 정성일 영화평론가다. 그가 통과한 20세기 영화의 궤적을 이도훈 영화평론가, 이민호 영화연구자, 김병규 영화평론가가 뒤따른다. 초기 무성영화의 근대성, 할리우드 속의 모던 시네마, 그리고 모던 시네마의 다큐멘터리성에 대한 각 필자의 서술이 이어질 것이다. 20세기 영화가 무엇을 얻었고 잃었는지에 대한 정성일 평론가의 질문이 ‘21세기 영화’의 정체를 규명하려는 이 물음의 흥미로운 시작점이 되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