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Story
‘애비없이 자라난’ 강원도 산골소년 김득구는 14살 되던 해 무작정 서울로 상경한다. 갖은 고생을 거쳐 어느덧 청년이 된 김득구는 우연히 본 권투포스터에 이끌려 동아체육관을 찾게 되고 이곳에서 자신의 꿈을 발견한다. 코치 김현치의 강력한 지도 아래 권투선수로 단련되어지는 김득구. 그 사이 이상봉, 박종팔 등 체육관 동료들과의 걸쭉한 우정과 순수한 아가씨 이경미와의 사랑이 싹튼다. 아마추어 활동을 거쳐 한국 라이트급 챔피언, 동양 라이트급 챔피언까지 승승장구하던 김득구는 어느덧 마지막 세계 챔피언 타이틀전을 치르기 위해 미국행 비행기에 몸을 싣는다.
■ Review
부산에서 나고자란 네 친구들의 얄궂은 운명을 그린 <친구>가 곽경택 감독 본인의 먼지쌓인 기억의 복원이라면, 1982년 라스베이거스에서 열린 세계 챔피언 타이틀전에서 운명을 달리한 고 김득구 선수의 일대기를 담은 <챔피언>은 20년간 감독의 뇌리를 떠나지 않았던 한 인간의 처절했던 투쟁에 대한 충실한 보고서다.
실존인물의 일대기란 녹록지 않는 구성을 놓고 크게 연대기적 진행에 몸을 싣긴 하지만 <챔피언>은 스피디한 리듬 속에 과감한 생략과 적절한 재배치의 미덕을 보인다. 영화의 정점인 마지막 링에서 시작되는 <챔피언>의 카메라는 마치 세월을 거슬러올라가듯 빛바랜 김득구의 사진을 차례로 디졸브시키며 강원도 산골 어드메쯤 머문다. 그러나 먼지나는 버스에 몸을 실은 소년 김득구의 고생스러운 어린 시절에 대한 설명은 잠시 미뤄둔 채 시간은 훌쩍 뛰어 가정의례준칙과 관상책을 “단돈 100원에 모시는” 버스 잡상인으로 살아가는 청년 김득구의 모습으로 단시간에 몰핑된다.
팍팍한 생활 속에 “밥달라 그러믄 쪽팔려도 물달라 그러면 안 쪽팔리니까” 수돗물로 배를 채우고, 피뽑아 받은 돈으로 풀빵을 사먹던 그의 시야에 잡힌 권투포스터는 마치 바람에 날아온 전단에 ‘반칙왕’이 되기로 결심했던 송강호의 경우만큼이나 운명적으로 다가온다. “가진 거라고는 몸뚱이 하나밖에 없기 때문”에 시작했지만 “세상에 권투만큼 정직하고 공평한 게 없기 때문”에 포기할 수 없는 복서로서의 삶은 그렇게 시작된다.
주로 70년대 후반부터 시작해 80년대 초반을 아우르는 <챔피언>의 정서는 “라면만 먹고 뛰었어요”하던 임춘애의 ‘헝그리정신’을 촌스러운 어떤 것으로 치부하지 않는다. 오히려 힘들지만 순수했던 ‘그때 그시절’에 대한 따뜻한 시선을 유지한다. “배고플 때면 들깨를 갈아서 참기름 하고 섞어 먹으면 좀 낫다”는 민간요법부터 “빰 빰빠바 빰빠바∼바라바바∼”로 시작되는 권투중계음악, 도끼빗 장발에 미스코리아 파마머리까지, 롤러장과 교복이 주었던 <친구>의 감동이 그러했듯 <챔피언> 역시 향수를 자극하는 소품과 배경을 효과적으로 배치했다.
“스타일의 반복을 피하고 극에 부합하는 액션신을 만들기 위해” 총 4가지 스타일로 찍어냈다는 <챔피언>의 액션은 무게가 느껴지지만 괜한 폼을 잡진 않는다. 오히려 꽹과리소리, 북소리 등의 국악과 경쾌한 가요가 믹스된 god의 주제가와 김득구의 섀도복싱 실루엣이 겹쳐지는 장면은 여타의 권투영화에서 선보이는 장엄한 음악보다 더 큰 울림을 선사한다. 득구와 경미와의 멜로도 소박한 감동과 재미를 준다. ‘이사떡’으로 시작된 어리버리한 첫 만남이 불러오는 훈훈한 웃음과 체육복 등판에 써 있는 ‘김·득·구’라는 이름 석자를 보여주기 위해 버스보다 빨리 뛰어가려는 순정어린 질주, 통닭이 식을까 한시라도 집에 빨리 들여보내고 싶어하는 따뜻한 배려까지, “여자란 인생의 걸림돌”이란 문구를 ‘디딤’돌로 고쳐 적게 만든 온기있는 로맨스는 튀는 핏방울까지 사실적으로 보여주는 액션신과 교차되며 한 복서의 성장드라마에 정서적인 큰 축으로 자리잡는다.
사진설명
“이거이 어데가는 버스래요?” “어디까지 가는데?” ”끝까징요.” 14살 소년 김득구는 먼지나는 버스에 몸을 싣고 무작정 서울로 향한다. 꿈을 이룰 수 있을 거라는 기대를 품고서.
“원래 복싱선수는 미스코리아보다도 거울을 보는 시간이 많다. 자세도 자세지만 그보다 니가 싸워야 하는 사람이 바로 그 안에 있기 때문이야…. 무슨 말인지 알겠어?” 김현치 코치는 김득구를 떠돌이 싸움꾼이 아닌 진정한 스포츠맨으로 키운다.
득구와 상봉은 승부를 뛰어넘는 우정을 보여준다.
“내가 왜 개득구인 줄 아니?” “독구잖아, 독구 멍멍멍.” 포장마차에서 소주잔을 기울이며 아버지에게 버림받았던 이상봉의 사정을 들은 김득구는 “백극구, 이득구, 김득구, 아버지가 바뀔 때마다 성을 바꿔야했”던 힘들었던 성장과정을 털어놓으며 울먹인다.
“나는 행복합니다… 나는 행복합니다… 나는 행복합니다… 정말 정말 행복합니다.” 동양챔피언 타이틀을 거머쥔 뒤 회환과 기쁨에 터져나온 김득구의 울음은 마치 짐승의 울부짖음처럼 샤워실을 가득 메운다.
“느그가 요게 온 이유는 한마디로 복싱 참피언이 돼서 맨주먹으로 부와 명예를 한꺼번에 쥐고 싶다, 이거 아이가?”며 솔직한 속내를 드러낼 만큼 건강하고, 안타까운 죽음 앞에 누구도 대성통곡하지 않을 만큼 절제력을 보이는 <챔피언>은 스포츠스타를 영웅화하려는 함정이나 신파의 웅덩이를 가볍게 비켜간다. 그러나 망자의 무덤 앞에서 진심어린 송가를 부를 뿐 감히 무덤을 파헤치진 못했다. 자신과의 끊임없는 싸움을 제외하면 뚜렷한 악인도 큰 갈등도 없는 드라마는 긴장감이 다소 떨어지는 편이다. 또 <친구>처럼 ‘남자영화’라는 혐의도 지우기 어렵다. ‘숨은그림 찾기’를 좋아하고 아버지를 “21년 된 남자친구”라고 소개하는 아이 같은 경미의 캐릭터에는 순수함에 대한 강박이 느껴진다. 오로지 남성의 시선 속에서만 등장했던 <친구>의 보경처럼 경미의 캐릭터 역시 남성의 ‘현모양처’ 판타지에 복종한다.
<챔피언>은 한순간도 부족한 적이 없었지만 홀로서기에 대한 우려 역시 적지 않았던 배우 유오성에게는 의심없는 굳히기 한판이다. 김득구의 혼이 내린 유오성에겐 <친구>에서 날선 혹은 징그러우리만큼 유연했던 준석의 모습은 온데간데없다. 대부분의 신에서 어벙하고 순진한 표정에, 무언가에 잔뜩 억눌린 눈빛을 보이다가 링 위에서만큼은 분노나 위협이 아닌 강철 같은 복서의 기운을 뽑아내며 좌중을 압도한다.
“웃고 있다보니 눈물이 나는 영화”를 만들겠다던 곽경택 감독의 의지만큼 <챔피언>은 시종일관 웃음이 터지는 영화지만 김득구가 죽음으로 치닫는 결말을 아는 이상 웃음의 끝엔 늘 아릿한 슬픔이 동반된다. 그러나 영화는 마지막에 다음 세대를 향한 희망적인 판타지를 선사하며 이렇게 속삭인다. 우리 역시 이시간도 조금씩 죽음을 향해 걸어가고 있다고. 그러나 삶은 결과가 아닌 과정 속에서 충분히 가치있는 거라고. 20년 전에 세상을 떠난 비운의 복서를 굳이 스크린까지 불러들인 곽 감독의 진심이 느껴지는 전언이다.백은하 lucie@hani.co.kr▶ 챔피언 / 백은하 기자
▶ <챔피언>의 맛깔나는 조연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