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천성 심장질환으로 아버지(오정세)의 걱정 어린 잔소리를 들으며 살아온 중학생 완서(이재인)는 심장이식 수술 후 기적처럼 건강을 되찾는다. 일반적인 후유증이나 적응 기간도 없이 말끔히 정상으로 돌아온 그는, 자신에게 폭발적인 힘과 번개처럼 빠른 속도가 생겼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그런 완서의 변화를 가장 먼저 알아본 이는 지성(안재홍). 폐이식 이후 강풍을 일으키는 능력을 얻게 된 그는 이 특별한 변화에 ‘초능력’이라는 이름을 붙인다. 두 사람은 손목에 생겨난 문신과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는 신체 능력이라는 공통점을 단서 삼아, 같은 기증자의 장기를 이식받은 이들을 찾아 나선다. 그렇게 신장의 선녀(라미란), 각막의 기동(유아인), 간의 약손(김희원)이 하나둘 모여드는 가운데, 여섯 장기의 마지막 조각인 췌장을 이식받은 사이비종교 교주 영춘(신구/박진영)은 불멸의 욕망을 품고 이들을 위협하기 시작한다.
7년 만에 돌아온 강형철 감독의 신작 <하이파이브>는 필모그래피 최초의 판타지 드라마다. 쟁쟁한 배우들이 이룬 ‘하이파이브’의 중심엔 배우 이재인이 있다. <과속스캔들>(2008)의 박보영, <써니>(2011)의 심은경, <스윙키즈>(2018)의 도경수에 이어, 장편영화 주연 경험이 없는 젊은 배우를 전면에 내세운 감독의 선택은 가능성에 대한 일관된 신념이자 연출자의 인장이라 할 만하다. 이재인은 베테랑 배우들과의 다층적인 호흡 속에서 중심을 잡으며 멀티캐스팅의 리더 역할을 무리 없이 수행한다. 중학생 소녀가 이끄는 이 초능력자 집단은 능력의 영웅적 쓰임처를 찾으려 하기보다는, 질병으로 고통받았던 과거의 자신을 회복하고 삶의 균형을 되찾기 위해 그 힘을 간직하려는 것에 가깝다. “초능력자라고 해서 모두 히어로가 되는 것은 아니”라는 작가 지망생 지성의 말처럼, 이들의 힘은 점차 자신에게서 타인을 향한 개입으로 나아가며 사소해 보이는 초능력의 공적 쓰임을 꿈꾸기 시작한다.
2010년대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가 극장가를 석권했을 무렵, 한국적 대안으로서의 ‘초능력물’이라는 장르 실험은 <염력>(2017) 같은 작품으로 이어진 바 있다. 이후 <경이로운 소문>(2023), <무빙>(2023) 등 초능력 캐릭터와 멀티캐스팅을 내세운 드라마 시리즈들이 TV와 OTT 플랫폼에 안착했고, 이 장르는 더이상 ‘한국형’이라는 수식이 필요 없는 자체적인 소구력을 지닌 컨셉으로 자리 잡았다. 바로 이 시점에 개봉한 <하이파이브>는 높아진 관객의 기대에 부응하기 어려운 결과물로 남을 듯하다. 스스로를 한국형 초능력물이라 칭하는 작품들이 강박적으로 그려온 소시민적 정서가 이번에도 반복되며, 등장인물의 외모를 코미디 소재로 활용하는 구태도 발견된다. 사이비종교 집단으로 형상화된 악의 세계와 주인공들이 딛고 있는 현실 세계 사이의 이질감 또한 몰입을 방해하는 요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작품이 지닌 상상력의 단편들은 주목할 만하다. 악당을 제압하는 장면이든, 서로 엉키고 부딪치는 해프닝이든, 초능력 액션 시퀀스 속에 녹아든 아이같이 천진한 상상력만큼은 흥행 감독의 여전한 유효타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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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써니>(2011)를 통해 전 국민이 강형철 감독의 음악 취향, 특히 올드팝에 대한 애정을 확인한 바 있다. 이번엔 또 어떤 플레이리스트를 자랑할까 궁금하던 차에 초능력 액션 장면에서 익숙한 전주가 흐른다. 릭 애스틀리의 <Never Gonna Give You Up>이다. 1987년 발표된 이 브릿팝은 40년 넘게 사랑받아온 명곡이자, 지금은 인터넷 밈과 리믹스의 단골 트랙으로 자리 잡고 있다. 슈퍼파워보다 강력한 릭롤링의 마법에 빠져드는 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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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력>은 초능력물과 사회구조에 대한 비판적 성찰을 결합하며 한국형 히어로물의 방향성을 제시한 작품이다. 주인공 석헌(류승룡)이 염력을 이용해 재개발 지역에서 폭력을 일삼는 용역 인원들에 맞서는 한편, <하이파이브>의 약손(김희원)은 산업재해가 만연한 작업장에서 치유 능력을 이용해 동료들의 생명을 구한다. 두 작품 모두 판타지 세계관 속에서도 현실의 대한민국에서 발생한 참사들을 환기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