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하 세계에 머물며 손에 피를 묻히거나, 법의 테두리 안에서 부끄러운 삶을 살면서도 범죄를 추적하는 삶. 모진 풍파와 짙은 어둠이 드리운 남성들은 지난 30년간 줄곧 배우 김뢰하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3년 만에 <주차금지>를 통해 스크린으로 복귀한 그는 이번에도 사소한 주차 문제로 직장인 연희(류현경)와 다투다 악의 수렁에 빠지게 되는 남자 호준을 연기한다. 거칠고 잔혹한 극 중 인물과 달리 스튜디오에 들어선 김뢰하는 누구보다 느긋하고 소탈한 모습으로 촬영에 임했다. 카메라를 날카롭게 노려보던 그의 눈은 금세 환한 미소로 변하기도 했다. 때마침 <씨네21>과 <스톤> 이후 11년 만에 다시 만나게 되었다는 소식을 김뢰하에게 전하자 지난 세월을 반추하며 지어 보인 너털웃음이 그 시간만큼이나 유달리 깊게 다가왔다.
- 시나리오를 읽은 뒤 마주한 호준은 어떤 형상이었나.
처음 마주한 호준은 기존에 많이 다뤘던 사이코패스나 막가파식의 밑도 끝도 없는 악인의 인상이었다. 근데 그렇게 이 인물을 다룬다면 전형적이고 납작해질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 감독님과 의견을 많이 교환했다. 다행히 감독님도 내 의견에 동의해줘서 함께 캐릭터를 구체적으로 그려내는 과정을 거쳤다.
- 확실히 호준은 절대 악과는 다른 궤적을 지닌다. 센 역할을 자주 소화하지만 맡은 배역에 따라 악을 표출하고 접근하는 방식도 달랐을 것 같다.
솔직하게 막연히 나쁜 인물은 잘 못하겠다. 악행에도 이유가 있다고 가정하고 관객에게 납득시키면서 연기하기를 선호한다. 그래서 호준이 품은 단 3%의 진정성에 대해 고민했다. 물론 사이코패스 같은 경우도 있지만 악인이라면 응당 나름의 논리가 있어야 한다. 보통은 ‘이건 아니지 않나?’ 하는 사적인 불만이 커져 악을 형성한다. 일반인은 전혀 생각하지도 못하는 그 3%의 사적인 생각이 나머지 97%를 잠식한다. 결국 악인도 선인도 사람이다. 아무리 하찮더라도 그 사람이 왜 그렇게 사는지 이유를 좇는 과정이 그래서 중요했다.
- 호준의 범행 동기는 무엇이었을까. 그는 버릇처럼 ‘예의’나 ‘잘난 체’라는 단어를 언급한다.
호준은 살인보다 자신을 집어삼킨 그만의 논리가 더 중요하다. 내면에 자리 잡은 절대적인 질서는 일반적인 것과는 전혀 다른 형식이다. 그게 옳다는 게 아니다. 하지만 인물의 행위를 납득시키는 과정에서는 충분히 생각해볼 여지가 있다. 선의로 대하면 선의로 다가와야 하는 것이 맞는 이치다. 하지만 사람이 계속 당하고 살다 보면 분노가 쌓여 선악도 제대로 구분하지 못하는 지경에 이른다. 끓는점을 넘긴 상황이 오는 것이다.
- 그런 상황을 꼽자면 직장인 연희와 주차 문제로 실랑이를 벌이는 장면이다. 사건의 시발점이자 영화 전체에서도 중요한 장면 중 하나다.
현장에서 연기하면서도 너무 사소한 계기로 다투게 된 터라 이걸 영화로 만들 수 있을까 싶었다. 근데 이런 사소함이 누구를 죽고 죽이는 문제로 번지는 게 현실이더라. 이 장면을 연기할 당시 류현경 배우가 어디선가 마주칠 법한 현실감 있는 연기를 한 덕분에 굉장히 편안한 마음으로 임했다. 특히 당돌함을 넘어 빳빳할 정도로 대담하게 나오는 반응에 ‘이것 봐라’ 싶은 오기나 반발심이 생길 정도였다. 연희는 자신이 잘못한 것이 하나도 없다는 식으로 호준에게 응수한다. 평생을 피해의식에 젖어 있는 호준의 입장에서 보면 자신보다 어려 보이는 사람에게 무시당하면 부아가 치밀어 오를 것이다.
- 극의 후반으로 갈수록 호준의 육탄전이 부각된다. 특히 연희와 흙밭을 뒹구는 마지막 난투 장면이 인상 깊다.
다시는 시나리오에 싸우는 장면이 있으면 하지 않겠다는 생각도 했다. (웃음) 이제는 체력적으로 힘들지 않다면 거짓말이다. 하지만 내가 맡는 캐릭터들에겐 이런 장면이 필요하니 어쩔 수 없다. 확실히 흙밭을 뒹굴면서 찍는 장면이 어려웠다. 육탄전이라지만 격렬한 개싸움에 가깝다. 다행히 류현경 배우가 잘 받아줘서 부담감을 덜고 촬영에 임했다.
- 최근에도 시리즈물에서 강렬한 존재감을 드러냈다. <카지노>의 차경덕, <커넥트>의 형사 최도훈, <킹덤: 아신전>의 아버지 타합까지. 기존 이미지는 그대로 가져가되 새로운 도전을 모색한 것 같다.
언급했던 세 인물 모두 서사적으로 깊이와 부피를 지닌 인물이라 좋았다. 특히 과거의 상흔이나 역사의 무게를 짊어진 채 살아가서 더 매력적이었다. <커넥트>의 최도훈은 기대도 많았고 그만큼 애정도 많이 품은 인물이었다. <킹덤: 아신전>의 타합은 계급 사회에 살면서 겪는 억압과 투쟁의 감정을 몸소 느끼면서 연기에 재미를 붙였던 경우다. 이렇게 다면적인 전사를 지닌 인물을 계속해서 만나고 싶다.
- 어느덧 60대에 이르렀다. 11년 전 <씨네21>과의 인터뷰에선 “공간지각능력도 떨어지는 것 같고, 조급한 마음도 생기는 것 같다”라며 50대를 맞은 소회를 밝히기도 했다.
감각은 확실히 늙지만 생각은 늙지 않는 것 같다. 늙으면 더 현명하고 경지에 올라 존경받는 삶을 살 것으로 생각했는데, 나이를 먹는다고 저절로 변하지는 않더라. 더 노력하고, 공부하고, 겸손한 자세로 나아가야 내가 생각했던 건강한 노년에 도달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래도 10년 전에 품었던 조급함은 많이 덜어냈다. 엄청 급하게 쫓기거나 애를 쓰기보다는 조금 더 차분히 내려놓고 세상을 바라보는 것으로 방향이 바뀐 것 같다. 물론 공간지각능력은 그때보다 좀더 떨어진 것 같기도 하다. (웃음)
- 연기 인생도 30년을 넘겼다. 그간 걸어온 길을 되짚을 때 배우 김뢰하는 어느 지점에 도착한 것일까.
여전히 해보고 싶은 것을 다 했다고는 말할 수 없는 지점이다. 아직도 아쉬운 것들투성이다. 이제 그만하면 됐다 하고 만족감을 느낄 시기도 아니다. 20년 전만 해도 빛나는 역할이나 제일 먼저 언급되는 배우가 되길 꿈꾼 적도 있었다. 지금은 내가 만나고 싶은 인물을 연기하고 싶다. 캐릭터에 이입하면서 내가 감동할 수 있는 인물과 이야기를 기다리고 있다. 지금까지 소화했던 인물과 장르라고 해도 성취감과 울림을 주는 작품을 만날 수 있지 않을까, 그런 기대감을 품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