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은 노무진(정경호). 무탈히 승승장구하던 회사를 때려치우고 자신을 붙잡는 선배의 조언도 아랑곳하지 않은 건 그러니까 비트코인 때문이다. 인생살이가 순탄했던 것만은 아니지만 성실한 부모를 구슬려 원하는 것은 대부분 얻으며 지냈다. 그러나 그가 간과한 것이 있으니 바로 ‘인생사 새옹지마’. 결국 그는 완전히 망해버렸다. 이제 와서 이직을 하기엔 나이와 연차가 애매하고, 사업을 하기엔 시드머니가 없다. 퇴사의 순간 자신을 붙잡았던 선배가 다시 말한다. “그럼 노무사나 따라. 전망도 괜찮고 요새 회사에서 많이 찾거든. 전문직이잖아!” 법학과 전공을 살려 겨우 합격했지만 사무실은 썰렁하고 월세는 다달이 밀리는 중이다. 그때 동료 콘텐츠 크리에이터 견우(차학연)와 미리 입을 맞춰둔 처제(이자 사무실 살림꾼) 희주가 제안한다. 산업안전보건법을 지키지 않은 사업장을 찾아가 협박 조금, 실랑이 적당히, 조율 많이 해서 돈을 받아내자고. 그렇게 떠난 경기도 모처의 공장에서 암행어사 노릇을 하고 있었건만 무진은 불의의 사고를 맞닥뜨린다. 게다가 어느 순간 억울함을 지닌 유령이 보이기까지. 열악한 노동환경과 산업재해, 임금 착취와 사내 괴롭힘 등 일터로부터 뻗어나온 묵직한 이야기를 다루는 <노무사 노무진>은 코믹한 장면과 3인방의 티키타카로 그 무게를 환기시킨다. 그렇다고 소재를 다루는 드라마의 태도가 가벼운 것은 아니다. 웃음이 채 다 가리지 못한 눈물을 현실적으로 직면하며 오늘날 노동 현장이 보완해야 할 지점을 명확하게 가리킨다. 일중독이 만연한 한국 사회에서 노무진은 과연 어떤 시사점을 남길까. 장면 곳곳에 담긴 고민을 들여다보기 위해 임순례 감독을 만났다.
- <노무사 노무진>의 극본은 김보통·유승희 작가가 작업했다. 완고까지 다소 시간이 걸렸다고 들었다.
준비 기간이 예기치 못하게 길어졌다. 원래는 OTT 플랫폼에 편성될 것을 계획하며 6부작으로 진행했다가, 8부작이면 좋겠다는 평에 8부작으로 늘렸다가 MBC로 최종 결정되면서 방송사 드라마 포맷에 맞게 10부작으로 확장했다. 일련의 과정 속에서 많은 변수가 있었지만 기획 자체가 변경된 것은 아니다. 대본부터 무척 재미있었다. 영화감독으로서 그동안 사회적 주제를 많이 다뤄왔지만, 드라마는 현실적으로 어둡고 무거운 이야기로만 꾸리기엔 한계가 있다. 하루 일과를 마치고 집에서 드라마를 보는 시청자들이 힘들어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노무사 노무진>이 그걸 해냈다. 열악한 노동환경이나 산업재해 문제를 건드리면서도 유령을 본다는 코믹 판타지로 풀어내 시청자들이 더 쉽게 받아들일 수 있게끔 했다. 주제를 전달하는 방식이 무척 유쾌하고 부담 없었다. 그 점이 매력적이었다.
- 상대적으로 미디어에 자주 등장하는 변호사·검사가 아닌, 노무사라는 생소한 소재를 활용했다. 대중에게 직업적 설명을 풀어내는 것도 중요한 몫이었을 텐데.
요즘은 기업마다 노무사들이 있어서 과거보다는 대중에게 친숙해졌다고 들었다. 그래도 변호사·검사 같은 다른 법률 전문가에 비하면 많이 낯설어하는 게 사실이다. 드라마 속 노무진은 산업재해 영역을 부각하여 다루기 때문에 다소 제한된 역할을 수행하지만 실제로 노무사는 직장과 관련된 더 넓고 많은 일을 수행한다. 노무진을 통해 노무사가 하는 일이 무엇인지, 일반인들이 어떤 도움을 구할 수 있는지 알려주는 것도 우리의 목표 중 하나다. 1970년대에 전태일이 분신한 이후 사회 전반적으로 노동환경이 개선되긴 했지만 각 에피소드를 통해 여전히 남아 있는 사각지대를 보여주고자 했다. 이 작품을 다 보고 나면 노무사가 우리 일상과 어떻게 연결돼 있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 법정물은 보편적으로 법을 통한 대리 응징과 처벌로 카타르시스를 높인다. 노무진이 노무사라는 자리에서 구현하는 해소감은 이와 어떻게 같고 다를까.
이 드라마의 중요 컨셉 중 하나는 산업재해로 저승에 가지 못한 유령들의 원한을 풀어주는 것이다. 일반 법적 소송이 피해 사건의 진상을 밝히거나 재정적 보상을 받는 과정으로 카타르시르를 준다면, <노무사 노무진>은 거기에 감정적 해소까지 더한다. 첫 번째 에피소드로 등장하는 고등학교 현장실습생 민욱(박수오)이 어머니 주변을 서성이다가 비로소 가야 할 곳으로 떠날 때 감정적인 고양감을 느끼게 된다. 보다 근본적인 것을 다루고 위로하기 위해서다.
- 작품 초반에 노무진이 노무사가 되는 과정이 비교적 길게 나온다. 이미 노무사가 되어 활약하는 상태에서 출발하지 않고, 노무사가 되는 과정부터 보여준 이유는 무엇인가.
이건 아주 큰 이유가 있는데 아직 말할 수 없다. (웃음) 무진은 코인에 눈이 멀어 투자 실패를 경험하고 선배와 친구의 말에 이끌려 노무사가 된다. 그냥 그 상황에 가장 유리한 것을 선택했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자기도 모르게 그것에 이끌릴 수밖에 없던 무의식이 있다. 노무사로서 보람을 느끼고 노동 현장의 부당함에 저항하며 성장하다가 조금씩 자기 안에 막혀 있는 것을 직면하면서 완전히 이야기가 반전된다. 이 정도까지만 말할 수 있겠다. (웃음)
- 노동문제의 무거움을 중화하기 위해 코미디 형식을 차용했다. 그런데 실제로 지켜야 할 선을 지키면서 코미디가 기능하게 하는 지점이 눈에 띈다. 배우들에게 구체적인 디렉션을 주었나.
나는 평소 디렉션을 따로 주지 않는다. 최근 정경호 배우가 한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한 것을 보았다. “임순례 감독님은 디테일한 디렉션을 주기보다 마음대로 임할 수 있는 자유로운 분위기를 주신다. 그리고 기다려주신다. 감독님이 유일하게 한 말씀은 단 하나, ‘선 넘지 말라’는 것뿐이었다.” 이 말이 딱 내가 추구하는 것이다. 배우들이 선 안에서 편하게 만들어가는 것을 지켜보고 담아내는 것을 무척 좋아한다. 이 선이라는 것은 노무진-나희주(설인아)-고견우(차학연) 삼각형의 균형을 지키는 것을 말한다. 세 인물이 한팀이 되어 다같이 나아가는 것이 중요한 만큼 한쪽으로 기울지 않도록 집중해야 했다. 나 또한 정경호, 설인아, 차학연 배우 모두와 처음 작업해봐서 나름 걱정이 있었다. 세 배우도 이 작품으로 처음 만났고. 그런데 정경호 배우가 촬영장 안팎으로 배우들을 챙기며 자신에게 의지할 수 있도록 힘을 나눠준다. 이를테면 세명이 이야기를 나누는 장면에서 유독 한명의 역할이나 대사가 적으면 일부러 말을 걸거나 자신의 것을 나눠주기도 한다. 세 인물이 동등해질 수 있도록. 이게 정말 쉽지 않은 일이다. 그래서 두 후배 배우도 정경호 배우를 정말 잘 따랐다. 정말 촬영 현장 분위기가 하하호호 좋았다.
- 화기애애한 현장이 작품에도 그대로 드러난다. 실제로 애드리브로 채워진 장면이 있다면.
견우가 생각보다 뭔가를 잘해내자 무진이 “너 원래는 똑똑한데 일부러 나사 빠진 척하는 거 아니지?” 하니까 견우가 조용히 “그런가? 나 똑똑한가?” 하는 장면이 있다. 정말 세명이 각자 자신의 캐릭터 안에서 티키타카가 잘 맞았다. 대본에 없는 것들도 즉흥적으로 만들어내면서 합이 좋았다.
- 특히 이번 드라마는 차학연 배우의 재발견에 가깝다. 코미디를 자유자재로 가지고 노는 듯한 인상이다.
보통 배우들은 헤어, 메이크업, 스타일리스트 등 스태프를 자기 팀으로 꾸린다. 그런데 이번에 차학연 배우가 자기 팀이 아닌, <노무사 노무진> 분장팀의 손길을 받고 싶다고 하더라. 그 이유 또한 너무 명확했다. 늘 자신을 가장 멋진 모습으로 꾸며주는 스태프들에게 고맙지만, 그렇게 되면 코믹함이 중요한 견우의 모습으로 변화하기 어려울 것 같다는 것이다. 아이돌 출신이라 비주얼 면에서 멋지게 나오고 싶은 마음이 클 텐데도 그 캐릭터를 체화하는 것을 더 우선하는 모습이었다. 상대적으로 배우 차학연에 대한 이해보다는 고견우에 대한 이해가 더 큰 분장팀이 세팅을 해줬고, 지금의 안성맞춤 견우가 탄생했다. 자기 모습을 너무 마음에 들어 하던 학연씨의 모습을 잊을 수 없다.
- 지금까지 보기 어려웠던 건 노무사 설정뿐만이 아니다. 사무실을 운영하는 처제-형부 관계도 그렇다. 더구나 언니와 이혼 직전인 형부와 함께.
설인아 배우의 나희주 역할이 사실은 아주 어려울 수 있는 캐릭터다. 견우는 콘텐츠 크리에이터로서 엉뚱발랄한 면이 확실히 드러나는데 희주는 대본상에도 구체적으로 드러난 게 많지 않아서 배우 스스로 채워가야 하는 것들이 많았다. 그런데 그걸 너무 성실하고 자연스럽게 임해주었다. 배우로서 연기적 센스가 뛰어난 사람이다. 특히 두 남자가 에너지가 불처럼 타오르는 적극적인 스타일은 아닌데, 그 둘을 딱 붙잡고 앞으로 돌진할 수 있게 해주는 인물 이다.
- 산업재해 에피소드를 보다보면 현실에서 벌어진 실제 여러 사건이 연상되기도 한다. 다만 사고 과정을 구체적으로 묘사하지 않은 지점이 돋보인다.
현실에서 무수한 산업재해가 벌어지다 보니 실제 사건이 떠오를 수밖에 없을 듯하다. 그런데 이 죽음을 너무 구체적으로 보여주면 피해자와 유족에게 2차 가해가 될 수 있고, 공중파 방송에도 맞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일부러 수위를 조정했다. 다만 각 에피소드에 일상성을 가미하고자 했다. 보통 산업재해라고 하면 중장비를 사용하거나 생산직에서만 벌어지는 일이라고 생각하지만 편의점, 병원, 미화 노동 등 우리의 평범한 생활이 이어지는 곳에서도 여전히 벌어지고 있다. 우리 사회에 중요한 변화를 촉구했던 실제 사건들을 반영해 에피소드를 이어간 만큼, 특정 집단이나 계층에서만 벌어지는 일이 아니고 우리 모두의 일이라는 것을 꼭 알려주고 싶었다. 나의 이야기이자 나의 가족의 이야기, 내 친구들의 이야기, 내 이웃의 이야기로 이해의 동심원이 조금씩 넓어질 수 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