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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경택-유오성의 <챔피언>에 묻고 싶은 여섯 가지 것들(1)
2002-06-21

친구야, 나 이제 지옥의 링에 오른다

우리는 <챔피언>에 대해 궁금한 것이 많았다. 다만 ‘감독 곽경택, 주연 유오성, 링 위에서 사망한 고 김득구 선수의 일대기’라는 너무나 명확한 가이드라인 때문인지 이 영화에 대한 구체적인 질문들은 그간 건네지지 못했다. 감독과 배우의 이름값만으로도 제작진의 의도와 관계없이 <챔피언>은 올해 한국영화 중에서 가장 강력한 대중성을 지닐 작품 가운데 하나로 점쳐져왔다. 6월28일 개봉을 앞두고, 제작진과의 인터뷰를 토대로 <챔피언>에 대한 궁금증을 풀어봤다.-편집자

“<챔피언>만의 액션장면을 만든다”는 곽경택 감독의 약속은 지켜졌나.

영화에서 유오성이 등장하는 장면이 80% 정도 되는데 그중 성한 얼굴을 찾아보기 힘들 정도다. 아무래도 권투선수의 삶을 다룬 영화다보니 많은 양의 경기장면이 펼쳐질 수밖에 없었다. 그때 곽경택 감독은 고민에 빠졌던 것 같다. 그렇다면 이 빈번한 액션신을 어떻게 다르게 찍을 수 있을까? 결국 그는 세계 챔피언 타이틀전을 포함한 크고 작은 경기를 4가지의 다른 컨셉으로 찍어냈다.

초반에 보인 국내 경기들은 스타일리시한 영상에 초점을 맞추었다. 동료들과의 힘겨운 트레이닝 과정과 교차편집되는 13경기는 슈퍼 크레인, 지미집 같은 기존의 장비들을 최대한 활용해서 다양하면서도 부드러운 카메라워크를 뽑아낼 수 있었다. 극부감이나 로프줄을 타고 들어가는 숏 등 짧지만 임팩트가 강한 카메라의 움직임은 “동양챔피언이 되기까지의 과정을 어떻게 압축하느냐”에 대한 효과적인 답이 될 수 있었다.

반면 동양챔피언 김광민전은 드라마에 방점을 찍었다. 링 위에서 처절하게 싸우고 있는 나와 김광민 외에는 시선이 안 뺏기도록 철저하게 관중을 제외시킨 이 신은 꿈속처럼 짙은 스모그를 사방에 깐 상태에 60프레임이 넘는 고속촬영을 통해 탄생하게 되었다. 물론 이 신이 더욱 드라마틱하게 느껴지는 건 유오성이 하룻밤의 일탈 뒤 김현치 관장 앞에서 조용필의 <>을 개사시킨 “권투란 무엇일까∼ 맞는 걸까∼ 때리는 걸까∼ 때릴 땐 꿈속같고…”를 구슬프게 부르는 장면과 이어졌기 때문인것 같다.

<챔피언>의 액션은 크게 4가지 스타일로 나뉜다. 고속촬영 및 다양한 장비로 가장 스타일리시한 경기장면을 뽑아낸 국내 경기장면. 의도적으로 관중을 배제하고 드라마를 살린 김광민전.시점숏을 살린 이상봉과의 스파링.사실적인 다큐멘터리 느낌을 살린 마지막 맨시니전.이 모든 액션 장면은 모션캡처 프로그램을 이용한 `움직이는 콘티`작업의 혜택을 많이 입었다.`모션캡처 프로그램`을 이용한 시뮬레이션으로 액션 장면을 준비했다.

미국으로 떠나기 전, 그러니까 이 ‘개득구’가 올챙잇적 생각 못하고 조금 교만해 있을 무렵 친구 상봉이가 ‘정신차리라’는 의미로 스파링을 청한다. “사실 이게 대한민국 권투장면”이라고 곽 감독이 말하는 스파링신은 시점숏을 이용했다. 카메라 렌즈를 상대방처럼 응시하며 반응하기 때문에 마치 주먹이 관객의 눈앞에 날아드는 느낌이 든다. 이것은 <챔피언>에서 효과적으로 사용된 ‘모션캡처 프로그램’의 도움이 컸다. 배우는 그저 블루매트 위에서 좌표값을 표시할 수 있는 옷을 입고 시합을 한 차례 벌이면 끝이다. 그러면 이 프로그램은 그 측정된 좌표값을 다양한 각도와 다양한 렌즈에 대입하여 매번 새로운 숏을 컴퓨터 화면상에 ‘펩시맨’의 동작으로 보여주게 되는 것이다.

곽 감독 말에 따르면 “현장에서의 시행착오를 줄여서 필요없는 예산을 절감시킬 수 있을 뿐 아니라 그 상황에서 만들어낼 수 있는 가장 최상의 숏을 준비할 수 있다”고 한다. 오프닝 시퀀스에서 경기장으로 카메라가 높이 뜨면서 들어간(크레인 인) 뒤 빠르게 좁혀 들어가며(퀵 줌) 내다꽂는 유려한 움직임 역시 이 모션캡처 시뮬레이션상에서 이미 여러 차례 시험을 거친 뒤에 만들어지게 되었다.

라스베이거스, 실제로는 LA에서 촬영된 맨시니와의 마지막 경기는 다큐멘터리 같은 느낌을 주려고 했다. 마치 파란눈의 사람들 사이사이에 숨어 있는 방송용 카메라가 이 경기를 찍은 것처럼 말이다. 기교없이 사실적으로 찍어낸 이 장면은 어쩌면 20년 전 경기를 보았던 사람들의 기억속에서 잊지 못할 ‘그날’을 불러내려는 의도가 있었던 것 같다. 결국 이런 다양한 스타일의 선택은 이야기 전개 과정과 상응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감독은 권투 자체의 테크니컬한 부분을 깊게 묘사해 독립된 신의 완결성을 높이기보다는 앞뒤로 붙는 드라마들과의 호흡과 조화를 고려하는 게 우선이었던 거다.

잘 볶은 파마머리,

열 포니자동차 안부럽다

도대체 20년 전 풍경과 정서를 어디서 어떻게 만들어냈나.

곽 감독은 “<친구>를 끝내고 가장 안타까웠던 점을 꼽으라면 부족한 예산 때문에 시대상을 반영하는 그림들을 맘놓고 펼치지 못한 점이다”라고 입버릇처럼 말해왔다. 그리고 “이번엔 정말 제대로 했다”는 분위기다. 그건 예산이 그만큼 여유로워졌다는 이유도 있겠지만 지난 경험을 통해서 뭐가 중요한지를 알았기 때문이다. 예전에는 거리 하나를 20년 전으로 되돌리려면 간판에 건물을 교체하기 위해 바로 컴퓨터그래픽 작업을 생각하는데 실제로 찍어보면 등장인물들의 패션이 80% 이상 차지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의상과 메이크업과 헤어가 어떤 식으로 돼 있냐에 따라 똑같은 배경이라고 해도 아주 옛날 느낌이 나기도 하는 식이다. 그래서 군중신이 있는 장면이면 주변 미용실을 3, 4군데 섭외해서 화면 앞쪽에 위치하는 엑스트라부터 저 멀리 배경처럼 걸리는 엑스트라까지 가발과 메이크업 정도를 구분해서 꾸미게 했다. 춘천에서 찍은 80년대 명동거리 재현부터 LA 특설링을 채운 관객을 꾸밀 때도 그런 디테일에 신경썼다. 제대로 된 파마머리 하나가 오히려 포니자동차, 삼양라면, 간판 같은 소품들보다 더 큰 영향을 끼친다.

<챔피언>은 강원도에서 자란 김득구의 정서를 담아내야 했다. 그래서 곽 감독은 김득구가 자란 고성군 거진읍 반암리 근처로 가서 머리 깎고 시나리오를 썼다. 촬영도 그 근처를 벗어나지 않았다. 김득구는 초등학교도 안 나왔고 새아버지는 고기잡이 할 놈은 공부 안 해도 된다고 한 사람이다. 하지만 동해에서 해를 보고 자란 사람들의 꿈은 작을 수가 없다. 그래서 어린 시절 신 중 가장 힘주어 찍었던것이 바로 어린 김득구 어깨 위에 태양이 내려앉는 장면이었다. 이 해의 이미지는 나중에 LA의 강렬한 태양으로 연결된다.

권투선수들의 땀과 눈물이 나뭇결마다 베어있는 동아체육관이나 황량한 라스베이거스의 사막은 "마치 영화를 위해 그곳에 있었던 것처럼" 천연세트의 역할을 충분히 해주었다.김득구의 어머니(김상분 할머니)나 어린시절을 연기한 배우들은 연출진의 오랜 캐스팅의 성과다.

상경해서 김현치 코치나 이상봉을 만난 동아체육관은 처음엔 양수리에 세트로 지었다. 그런데 아무리 비슷하게 꾸미고 만들어도 그곳에는 땀과 세월이 묻어나질 않았다. 샌드백을 치고 줄넘기를 하면서 흘린 땀과 그 마룻바닥마다 떨어졌던 눈물들이 느껴지질 않았던 것이다. 결국 중간에 미술팀이 교체되고 화양리 근처에서 20년도 넘은 ‘숭민체육관’이란 곳을 발견했다. 지금도 건강 때문이라든지 아가씨들 다이어트 때문에 복싱을 배우는 사람들이 있어서 운영되는 그 체육관은 3층에 옥탑처럼 체육관 문을 열면 공간이 확보되는 천연세트다. 약간의 개보수 작업을 거치긴 했지만 모두들 “영화 찍으라고 준비해놓은 것 같다”며 그곳을 마음에 들어했다.▶ 곽경택-유오성의 <챔피언>에 묻고 싶은 여섯 가지 것들(1)

▶ 곽경택-유오성의 <챔피언>에 묻고 싶은 여섯 가지 것들(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