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대본의 스토리 흡인력이 돋보인다. 처음 대본을 어떻게 읽었나. 작품에 합류하게 된 과정도 함께 듣고 싶다.
박형식 이상하게도 이런 작품을 오랫동안 기다려왔던 것만 같다. 언젠가 특정 나이대가 되면 강하고 묵직한 싸움을 보여주는 작품을 하고 싶었다. 그동안 기회가 마땅치 않아서 막연히 마음속으로만 품어오다 <보물섬>을 만났다. <보물섬>은 대기업, 정치 같은 다소 무거운 키워드를 다루지만 결국엔 사람의 이야기다. 인간 본연의 모습을 깊이 있게 보여준다. 살면서 우리가 무엇을 욕망하며 목표로 삼는지, 또 그것을 이루는 과정에 방해하는 사람 혹은 빼앗는 사람이 존재할 때 우리는 얼마나 비열하고 악랄해질 수 있는지 그려낸다. 그렇기에 동주는 욕망, 야망 같은 단어가 중요한 인물이다. 욕심도 많고 야망도 넘친다. 그런데 그 욕심으로 실패하고 배신도 당한다. 다양한 모습이 동주에게 담겨 있다.
허준호 내가 <보물섬>을 하게 된 건… 말해도 되나? 우정 때문이다. (웃음) 어느 날 누가 날 부른다고 해서 사무실에 나갔는데 추억의 친구들이 있었다. <올인>의 두 제작자, 김동준, 김광일 제작자였다. 지금까지 네편 정도를 함께해온 깊은 인연을 맺은 이들이다. 그들의 얼굴을 보는 순간 작품의 어떤 요소도 따지지 않고 그냥 함께하고 싶었다. 나를 찾아 매니지먼트 사무실로 직접 와준 게 얼마나 고마운 일인가. 시간이 지나서 대본을 열었는데 염장선과 서동주의 관계를 보자마자 알아차렸다. 아, 내가 이 친구를 정말 불쌍하게 만들면 되겠구나. 어떻게 불쌍하게 만들면 좋을까. (웃음)
조화로운 호흡으로
- 첫 대본 리딩날 허준호 배우는 쑥스러워하며 이런 말을 남겼다. “이번 작품에서는 말을 너무 많이 하지 않겠습니다. 오해하지 말아주세요.”
허준호 우리 형식이랑 (이)해영이(허일도 역)를 도와줘야 하니까. 배우들이 현장에 집중할 수 있도록 분위기를 꾸려주고 싶었다. 그런데 뒤통수를 세게 맞았다. 완전히 해머로! (웃음) 정말 쉽지 않은 대본이라 <보물섬>을 하는 내내 숙면을 못 취했다. 새벽에 서너번은 깬다. 첫 대본 리딩날 저렇게 말해놓고 현장에서는 나만 수다쟁이었다. 약속을 하나도 못 지켰다. 너무 불안하니까 가만히는 못 있겠고 나 혼자 따따따 말하고 돌아다닌다. 우리 집 식구들도 안 믿는다. 집에서나 좀 떠들라고. (웃음)
- 동주와 장선의 정면 충돌이 <보물섬>의 중심축을 이룬다. 적수로서 상대 역할이 정해졌다는 것을 알았을 때, 어떤 기대감을 느꼈나.
허준호 나는 너무 좋았다. 형식이를 이전에 바다 건너서 본 적 있다. LA에서 지낼 때 우연히 3개월 정도 라디오 DJ를 한 적 있는데 그 짧은 3개월 사이에 제국의 아이들이 온 거다. 거짓말 아니고 그때 형식이가 제일 기억에 남았다. 사람에게 에너지란 게 있지 않나. 그게 눈에 띄었다.
박형식 어떻게 인연이 이렇지? 정말 너무 신기하다. 나는 당연히 기억 못하실 줄 알고 먼저 말씀드리지 않았다. 멤버들이 9명이나 되는데 나를 기억할 리 없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먼저 말씀해주셔서 너무 감동받았다.
허준호 멤버 중에서 가장 먼저 다시 만난 건 <불한당: 나쁜놈들의 세상>을 촬영할 때 현장에서 마주친 임시완 배우다. 그래도 나는 형식이 네가 더 눈에 보였어, 그때….
박형식 (고개를 뒤로 젖히며) 으하하!- 염장선 역을 허준호 배우가 맡는다는 소식을 전해 들은 날이 기억나나.
박형식 허준호 선배님과 함께할 수 있는 기회가 생각보다 일찍 찾아왔다고 생각했다. 언젠가 나도 선배님과 꼭 함께하기를 바라고 바랐다. 염장선을 이보다 더 잘 소화할 수 있는 배우가 있을까. 지금 <보물섬>에 출연하는 모든 선배들이 그렇다. 다들 너무 좋다.
- 그 부분을 꼭 짚고 넘어가고 싶다. 이번 작품은 허준호 배우를 포함해 이해영, 우현, 김정난 배우 등 베테랑 중장년층 배우들과 함께한다. 이야기를 긴장감 있게 조성하려면 이들과 맞설 때 지지 않는 게 중요할 텐데, 이 과정이 긴장되진 않았나.
박형식 다른 생각은 없었다. 그냥 나를 쏟아부어야 한다는 마음밖에 생기지 않았다. 선배님들이 워낙 유연하고 강렬한 연기로 나를 도와주셨기 때문에 그것들을 느끼다 보면 외부 요소에 흔들리지 않고 모든 것을 쏟아내고 싶은 마음이 차오른다. 그런 마음으로 촬영장에 간다. 또래 배우가 많았던 환경과는 차이가 있다. 대사를 묵직하게 던져주시는 게 짜릿할 때가 있다. 텍스트로만 읽다가 선배님들의 목소리로 생명력을 얻는 그 순간은 정말 다르다.
허준호 이 말을 덧붙이고 싶다. 현장에서 누구에게 이기고 지는 것은 사실 중요하지 않다. 이미 누가 이길지, 누가 질지는 대본에 다 써 있다. 연기로 기싸움을 하거나 상대방을 누르는 게 아닌, 대본을 통해 앙상블을 만드는 과정이 중요하다. 그런데 잘못 배운 연기자들을 보면 현장에서 대뜸 분위기부터 압도하려 한다. 완벽한 앙상블이 있어야만 섬세한 건축물이 나오지 않나. 그런 것과 같다. 대본을 바탕으로 각자의 자리에서 조화를 찾을 수 있어야 한다.
- 동주는 출세욕이 있는 야망가이면서도 사랑하는 사람 앞에서 무너지고 성당에서 누나의 꽃밭 가꾸는 일을 돕는 친근한 면모를 동시에 지녔다. 이러한 간극은 캐릭터를 입체적으로 만드는 중요한 포인트인데, 어떻게 차이를 드러내려 했나.
박형식 장면 단위로 차이점을 일일이 나눠서 생각하는 유형은 아니다. 현실적으로 그런 접근은 어렵고, 그보다는 주어진 상황에서 상대방이 누구인지를 집중해서 받아들이려 한다. 동주가 오랜 시간을 함께해온 누나한테 하는 행동과 거대 기업 회장에게 보이는 태도는 다를 수밖에 없다. 상황과 상대방, 거기에 집중하면서 인물의 반응과 자세를 드러내는 편이다.
- <보물섬> 대본을 읽고 영상으로 다시 보는데 염장선에 허준호 배우가 덧씌워지면서 공포감이 느껴지더라. 아마도 이 압도감은 허준호 배우의 목소리와 눈빛 때문인 듯하다. 염장선 고유의 분위기에 어떤 것을 공들였나.
허준호 공들였다기보다… 너무 창피하지 않나. 사회에 불균형·비합리·비이성적인 문제를 켜켜이 쌓아온 기성세대가 바로 지금 내 또래들이더라. 너무 창피하다. 자신의 행동이 창피한 줄 모르고 잘난 줄만 아는 어른들이 많다. 그 삐뚤어진 균열을 표현하고 싶었다. 잘못되는 순간 와르르 무너진다. 나는 인물을 묘사할 때 아주 간단하게 생각한다. 일단 대본을 보고 거기서 그 사람이 반복해 사용하는 말을 찾는다. 나는 대본에 충실한 배우라 토씨 하나 바꾸지 않는다. 대본에 드러난 그 사람의 습관, 집착, 반복을 들여다보면서 거꾸로 버릇이나 성향, 성격이 파악된다. 그런데 배우들을 만나면 또 달라진다. 상대방도 준비해온 호흡이 있으니까. 내 호흡만으로 가져가서는 안되고 이걸 잘 섞을 줄 알아야 한다.
아픈 사람들의 감정
- 대본에서 동주의 감정이 지문으로 묘사된 경우가 많다. 워낙 말로 구구절절 설명하는 인물이 아니기 때문에 묵묵히 표정을 잘 활용해야 했을 것 같다.
박형식 <보물섬>은 지문이 비교적 자세히 설명돼 있지만 지금까지 거쳐온 다른 작품을 돌이켜보면 대본에 ‘…’이라고 써 있는 경우도 더러 있었다. 그땐 진짜 생각이 많아진다. 그래서 그런 부분은 장면의 앞과 뒤를 많이 보려고 한다. 이 친구는 어떤 생각으로 이런 행동을 했지, 무슨 일이 벌어졌길래 이 상황에 놓였지, 지금 무엇을 그렇게 싫어하고 좋아하지 등등. 이것들을 이해하려면 대본을 계속 반복해서 읽고 또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보물섬>도 그랬다. 전후 상황을 이해하는 게 무척 중요해서 모두가 손에서 대본을 놓지 않았다.
- <보물섬>을 한마디로 정리한다면 각기 다른 욕망을 지닌 두 인물의 충돌이 아닐까. 그렇기에 서동주와 염장선을 선과 악, 주인공과 빌런처럼 흑백논리로 단순하게 정의하기 어려운 지점이 있다.
허준호 정말 아픈 사람들의 세계다. (인터뷰 당시) 요즘 한창 마지막 회차를 달려가면서 촬영 중인데 모든 등장인물이 다 아프다는 생각이 든다. 그런데 이런 사람을 포용하지 못하면 이 세상은 어떻게 될까? 정신적인 결핍이 있는 인물을 병원에 가둔다고 가정하면 그것이 과연 궁극적인 해결책이 될까? 이들이 아프다고 묶어두는 사람은 진정 아프지 않은 사람일까? 많은 것을 생각하게 된다.
박형식 맞다. 모든 인물이 각자의 역사에서 결핍을 지니고 있다. 그 결핍에서 시작된 비정상적이고 비이상적인 행동을 하기도 하고. 이런 것들을 통해 인간의 얼굴을 들여다볼 수 있다. 서동주와 염장선을 오로지 선과 악으로 나눌 수 없는 이유도 이들이 지닌 결핍이 무척 복잡하기 때문이다.
- 일대일 대립구도가 명확한 작품은 점진적으로 각자의 적개심을 부풀려가다가 폭발시키는 게 굉장히 중요하다. 어떤 감정적 서스펜스를 기대할 수 있을까.
허준호 기본적인 감정 표현보다 나조차 깜짝 놀라는 장면이 펼쳐져서 ‘와, 이 사람들은 이렇게까지 하는구나’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정확한 기점은 6화다. 6화부터 엄청난 사건들이 휘몰아친다.
박형식 그래서 정말 죽겠다. (웃음) 외로운 싸움을 펼치고 있다.
허준호 아이 그럼~ 형식이는 작품 끝나면 한달 동안 그냥 내버려둬야 한다. 아까 말했던 아픈 사람들의 대명사를 하고 있지 않나. 누군가의 위로가 절실하다. 얼굴만 웃고 있지 아마도 속은 썩어들어가고 있을 것이다.
- 박형식 배우는 지금 한마디밖에 안 했는데 허준호 배우가 옆에서 그 마음을 섬세하게 알아주고 읽어준다.
박형식 이런 게 내가 늘 선배님에게 감동받는 포인트다. 그냥 다 아신다. 말 한마디 툭 해주셔도 눈물이 터질 것 같은 순간들이 있다.
허준호 배우는 끊임없이 혼자만의 싸움을 해야 하거든. 작품에 몰입해서 자신을 모두 토해냈다가 또 그로부터 빠져나올 시간이 필요하다. 처음엔 그게 너무 억울했다. 감정 소모가 워낙 크니까. 하지만 우리를 보고 사람들이 희로애락을 얻지 않나. 우리는 애초 그걸 주는 사람이지 받는 사람이 아니다. 받을 생각을 하면 고개가 빳빳해져서 휘지 않고 부러지고 만다. 나 역시 언젠가부터 이 사실을 받아들이고 나니 마음이 편해졌다. 그런 면에서 요즘 젊은 배우들이 안타깝다. 우리는 전화기가 없던 시절에 놀러 다녔다. 시비 거는 사람들과 싸움질도 하고 욕도 하고. 길거리에 앉아서 술도 마셨다. 그렇지만 지금은 그럴 수가 없다. 스마트폰 카메라에 갇혀 배우들의 경험 범위가 한정되고 있다.
- 하지만 박형식 배우도 나름의 행복과 경험을 쌓아가고 있지 않나. 예전에 작품이 끝나고 노래방에서 노래를 부르는 영상이 SNS에 올라왔는데 상당히 편하고 자유로워 보였다.
허준호 에이, 그것도 다 갇혀 있는 거잖아. 우리 때는 가라오케라고 넓~은 데가 있었다. 진짜 얼마나 안타까워, 이 젊은 배우들이. 아무것도 못해! 그때는 노래 잘하는 배우들 경연도 했다.
박형식 아 진짜 웃겨! (박장대소) 아, 그 정도는 아니에요! 우리 그 정도는 아니에요! (웃음) 그런데 선배님 말씀이 이해는 간다. 옛날에는 구속될 것이 상대적으로 적어서 배우가 더 자유롭게 세상과 교감하고 감정을 나누었던 것 같다. 그게 배우에겐 자양분이고 자산이니까. 요즘은 민감한 영역이 넓게 커져서 안전한 곳에 있는 게 중요해졌다. 그런 부분에선 배우로서 감정을 소화하기에 어려운 지점도 있다.
- 워낙 인물이 많다보니 촬영장이 시끌벅적 복작복작했겠다. <보물섬> 촬영장에 두드러지는 풍경도 있을 듯한데.
박형식 특히 진창규 감독님이 작품에 애정이 많아서 인물이 많은데도 모든 피드백과 의견을 조율하면서 고군분투해주셨다. 모두가 <보물섬>에 애정이 크다.
허준호 이 말에 동의한다. 감독님이 있었기에 가능한 지점들이 많다. 다만 전반적인 드라마 산업에서 바뀌길 바라는 점이 있다면 현장에서 이뤄지는 새로운 논의도 물론 200% 좋지만 그걸 연습 단계에서 먼저 소화할 수 있는 시간이 만들어지면 더 좋을 것 같다. 촬영 현장에서는 바로 실전에 돌입해 작품의 퀄리티를 높이는 게 중요하다. 배우가 모든 내용을 숙지하고 나와도 좋은 연기가 나올까 말까인데, 요즘 시스템에는 연습 시간 자체가 물리적으로 부족하다. 그래서 앞으로 드라마 제작 환경에 이런 변화가 적용될 수 있으면 좋겠다.
박형식 와, 그런 환경이 될 수만 있다면 진짜 너무 좋겠다. 선배님의 말씀을 들으면서도 ‘이게 가능할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만큼 드라마 산업에 필요한 요소인 것 같다.
- 로맨틱코미디 장인인 박형식 배우는 이번에도 은남 역의 홍화연 배우와 로맨스를 이어간다.
박형식 지금까지 해왔던 로코와는 완전히 다른 결의 이야기다. 그래서 감정도 표현도 너무나 달랐다. 나에게도 새로웠기에 시청자들에게도 새로울 것 같다. 은남과 동주는 이미 연인으로 시작하는 설정이라 홍화연 배우와 더 빨리 친해져야 할 필요가 있었다. 촬영 때만이라도 우리가 진짜로 사랑할 수 있도록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
허준호 아이돌 경험을 가진 배우만이 할 수 있는 변신이 있다. 몸을 잘 쓰는 사람들이 감정적 표현도 잘한다. 그래서인지 박형식 배우에게서 지금까지 볼 수 없었던 다른 결의 눈빛이 드러나더라. 호흡을 바꿀 줄 아는 배우다. 박형식은 이미 준비돼 있다.
박형식 아이 참… (손으로 입을 가리고 웃으며)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