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투선수 김득구(1955~82)의 삶을 영화로 옮긴 〈챔피언〉의 개봉(28일)을 한 주 앞두고 ‘섀도복싱’(단독연습)으로 몸을 풀고 있는 곽경택(36·오른쪽 사진) 감독을 라커룸에서 만나봤다. 미리 엿본 〈챔피언〉에는, 그가 1970년대의 도시공간을 사실적으로 재현한 〈친구〉의 감각이 생생하게 살아 있었다. 또 20년 전 링에서 숨져간 권투선수의 삶이 정말 그랬을 법하게 구체성을 얻고 있었다. 김득구(유오성)의 한맺힌 삶이 스크린에서 되살아날 수 있었던 건 순전히 곽 감독의 실사구시 정신 덕분이다.
“〈친구〉가 끝나자마자 〈챔피언〉의 시나리오를 쓰는 일부터 시작했습니다. 〈친구〉 때문에, 언론사 인터뷰는 물론이려니와 심지어는 광고 출연 제안까지 들어왔습니다. 이럴 때 잘못하면 야전에 있어야 할 사람이 파티에 익숙해지는 일이 생기겠다 싶어서 다음 작업에 박차를 가했습니다. 그래서 무작정 조감독들과 함께 김득구의 고향인 강원도 고성군 거진으로, 밥 지어 먹고 텐트 치거나 민박하면서 고등학생 식의 ‘캠핑’을 떠났습니다. 그때 거진에 일주일 묵으면서 〈챔피언〉의 초고를 완성했죠.” 그러나 〈챔피언〉의 시나리오가 영화답게 되기까지는 그뒤 적어도 세 번의 결정적인 만남을 거쳐야 했다.
첫번째 만남은 김득구의 고향인 고성군 거진읍 반암리에 도착했을 때 닥쳐왔다. 곽 감독 일행은 먼저 그의 무덤을 찾아보기로 했다. 일행은 동네에서 처음 만나는 사람에게 무작정 김득구의 무덤이 어디 있는지 아느냐고 물었다. 이때 곽 감독은 ‘소름이 쫙 끼치는’ 답을 들었다. “내가 김득구 형이오.”
김득구와 배다른 큰형인 그분은 처음엔 김득구의 무덤에 함께 가려 하지 않았다. “바로 코앞”이라며 손짓으로 알려줄 뿐이었다. 그러나 곽 감독 일행이 산꼭대기까지 헤매다 끝내 못 찾고 다시 내려오자, 그는 “내가 하도 (산소에) 안 올라오니까 나 오라고 그러는구먼!” 하면서 김득구의 무덤을 직접 안내했다. 그날 곽 감독 일행은 오징어회에 소주를 마시며 김득구의 큰형으로부터 그의 어린 시절을 절절하게 들을 수 있었다.
초고를 좀더 영화적으로 발전시키기 위해 곽 감독은 연세대 상남경영관에서 2고를 썼다. 이때 결정적인 자료를 제공한 건, 그가 김득구의 삶을 영화로 만든다는 기사를 보고 나타난 어느 스포츠 신문의 기자였다. 그는 신문사의 선배가 김득구로부터 입수한 그의 낡은 대학노트를 한 권 들고 나타났다. 곽 감독은 이 노트의 첫 장을 넘기며 다시 한번 전율이 온몸을 감싸는 체험을 했다. 노트 첫 장 상단엔 이런 문구가 쓰여 있었다. “나에겐 최후까지 싸울 용기와 의지가 있노라.” ‘용기’와 ‘의지’라는 낱말엔 볼펜으로 덧칠까지 돼 있었다. 곽 감독은 20년 전 링에서 숨을 거둔 가난한 권투선수가 남긴 대학노트의 낡은 책장들을 넘기며 울음을 삼켰다. 거기엔 길창덕의 인기 만화 꺼벙이를 베낀 낙서에서부터 영어 단어를 연습한 흔적까지, 주먹 하나로 삶을 헤쳐온 이의 고독한 기록이 오롯이 남아 있었다. “아마도 외국에서 경기를 치를 때 최소한의 인사 같은 건 해야 하니까, 그런 영어 단어를 연습한 거 같습디다.” 노트 마지막 장에 남아있는 다른 사람의 필적은 “열쇠를 …에 두고 가라”는 내용이었다. “체육관에서 김득구 선수가 제일 늦게까지 남아 연습하다 마지막에 갔다는 뜻이죠.”김득구의 노트가 시나리오를 좀더 생생하게 만들긴 했지만, 곽 감독의 성에는 차지 않았다. “비주얼의 신뢰도가 떨어지면 영화엔 치명탑니다. 캐릭터가 설득력이 없어져 버리고, 나아가 영화 전체에 믿음이 가지 않고, 재미가 없어지는 거 아니겠습니까.” 〈친구〉에서 낡은 철대문의 부식도까지 꼼꼼하게 챙겼던 곽 감독의 장인정신은 〈챔피언〉에서도 바래지 않았다. 소품 담당자로부터 “곽 감독이 1970~80년대를 배경으로 한 영화를 또 만들면 다신 같이 하지 않겠다”는 말을 들어가면서도 그는 권투경기장에 울려퍼지는 낡은 ‘공’과 김득구의 운동화 끈 색깔까지 챙겼다. 그 결과 〈챔피언〉은, 텔레비전에 한번 비치기 위해 아나운서와 해설자 뒤에서 몸싸움 벌이는 관객들의 모습에서, 진수성찬 오층금탑처럼 촌스럽기 그지없는 한국 챔피언 트로피와, 사천왕처럼 권투체육관에 내걸린 챔피언벨트 맨 권투선수들의 빛 바랜 사진에 이르기까지, 70~80년대 권투경기의 풍물을 기록영화 이상의 꼼꼼함으로 되살려냈다.
그래도 곽 감독은 불만스런 게 있었다. “어떤 사람을 영화에서 캐릭터로 만들 땐, 피상적인 걸로는 안 됩니다. 그 사람의 목소리, 버릇, 걷는 폼, 마 이런 걸 구체적으로 얘기해줄 수 있는 사람이 있어야 되는 겁니다. 김득구의 그런 걸 아는 사람을 찾아야 했죠.”
뭔가 미진한 2고를 좀더 다듬어 3고를 쓰기 위해 취재에 박차를 가할 때였다. 모든 얘기가 김득구의 친구이자 그 자신 권투선수로 한국 챔피언까지 올랐던 이상봉이란 인물로 모아졌다. 사람들로부터 “그 얘긴 이상봉씨가 정말 잘 알텐데…”란 답이 계속 돌아온 것이다. 그에 관한 소식은 그가 영등포에서 육체미 체육관을 하다 아이엠에프 때문에 어려움을 겪었다는 정도였다. 스태프는 영등포 일대의 모든 육체미 체육관에 전화를 돌렸다. “사장님 계십니까? 혹시 이상봉씨라고 모르십니까?” 이 두 마디가 전화 취재의 모든 메뉴였다. 이씨가 오스트레일리아에 있다는 건 백여 통의 전화를 돌린 뒤 알게 됐다. 곽 감독은 그 다음날 바로 오스트레일리아행 비행기를 탔다. 지난해 9월의 일이다. 그로부터 〈챔피언〉의 김득구는 몸가짐과 습관과 즐겨 불렀던 노래와 말투와 삶의 잔잔한 고뇌 따위를 얻게 됐다. 김득구가 조용필의 〈정〉을 개사해 즐겨 불렀다는, (영화에선 유오성의 나지막한 목소리로 깔리는) “권투란 무엇일까/ 때리는 걸까/ 맞는 걸까/ 때릴 땐 꿈속 같고/ 맞을 땐 지옥 같아” 하는 노래에서부터, 김득구에 관한 숱한 디테일이 이상봉씨로부터 나왔다.
“이때부터 시나리오에서 ‘내레이션’으로 처리했던 부분들이 거의 없어지고 대사로 바뀝니다.” 내레이션이 대사로 바뀐다는 건 그만큼 캐릭터가 생생하게 자기 모습을 그려 보여준다는 의미다.
비운의 권투선수를 스크린에 불러들이는 지노귀굿에 혼신의 힘을 다 쏟았던 곽 감독은 〈챔피언〉 후반작업이 어느 정도 마무리되자 벌써 다음 작업에 들어간 상태다. “다음 작품은 코미디입니다. 죽은 이의 삶을 그리는 작업은 사실 제게도 매우 힘겨웠습니다. 그래서 저 자신도 좀 부추길 겸 코미디를 할 겁니다.” 곽 감독은 부산고 동창인 양중경(36) 대표와 함께 차린 제작사 진인사 필름에서 다른 감독의 작품을 제작하는 일에도 관여한다. 박흥식 감독의 〈연〉이 그 첫 작품이다. “남의 작품 뒷바라지하는 건 처음이지요. 그동안 엄마 노릇만 했다면, 아버지 노릇도 한번 해보는 거죠.”
글 이상수 기자leess@hani.co.kr
△ 1982년 링에 쓰러진 뒤 마지막 힘을 다해 일어나려던 김득구 선수의 모습(위·한겨레 자료사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