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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웨이트 오브 워터>에서 엿본 `강샘`의 감정, 아저씨를 쓸쓸하게 하다
2002-06-20

지금 내가 선 곳에 발 디뎠던 자는 어디로 갔는가?

● 캐스린 비글로 감독의 <웨이트 오브 워터>는 1백수십년 전에 미국 메인주의 스머티노즈 섬에서 일어났다는 살인사건을 소재로 삼았다. 그러나 이 영화는 일반적 의미의 추리물은 아니다. 원작자든 연출자든 순수이성의 긴장이 자아내는 지적 즐거움을 베풀기 위해 이 작품을 만든 것은 아닌 듯하다. 특별히 무딘 관객이 아니라면 그 살인사건의 진짜 범인이 누구였는지를 이미 영화의 도입부에서 알아챌 수(없다면 적어도 짐작할 수) 있다. 연출자가 공을 들이는 것은 올케와 친언니를 도끼로 무참히 찍어대는 살인자 마렌(사라 폴리)의 심리묘사다. 그 살인자의 마음의 결은 1백수십년 뒤 그 사건을 다시 조사하러 스머티노즈 섬을 찾은 사진기자 진(캐서린 매코맥)의 마음의 결과 맥놀이를 만들어내며, 이야기의 단조로움을 덜어내는 긴장을 생산한다. 그러니까 이 영화 속의 긴장은 지적 긴장이 아니라 심리적 긴장이다. 그 긴장의 공간을 상상 속의 에테르처럼 채우고 있는 것은 강샘이라는 감정이다.

강샘은 자기가 사랑하는 사람이 자기말고 남을 사랑할 때 느끼게 되는 조바심과 좌절과 미움의 감정이다. 강샘은 구약성서의 <아가>에 따르면 저승처럼 극성스러운 것이고, 어떤 불길보다도 더 거센 것이다. 그것은 자신의 열세를 초라하게 인정하는 것이지만, 그것 없이는 어떤 알짜배기 사랑도 불가능한 정열의 원천이다. 그것은 사랑과 함께 태어나는 감정이지만, 그렇다고 사랑과 함께 시들지는 않는 감정이다. 요컨대 그것은 사랑 이상으로 절대적인 감정이다. 강샘은 또 사랑을 포함한 많은 정열들이 그렇듯 소모적인 감정이다. 그것은 피를 말리고 장을 썩히고 얼굴빛을 검게 하고 머리카락을 희게 한다. 누군가의 익살에 따르면 강샘은 인류의 역사만큼이나 오래된 것이다. 아담이 한번 새벽녘에야 들어오자 이브는 그의 늑골을 헤아려보기 시작했다. 장씨 성을 지닌 여자들의 강샘은 조선 왕조의 사직을 마구 흔들어댔다. 더 나아가, 강샘은 인간만의 감정이 아니라 신들의 감정이기도 하다. 고등종교의 유일신이든 신화 속의 잡신이든. 여호와는 모세에게 준 열개의 계명 가운데 하나에서 자기말고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고 못박았다. 그리스 신화의 많은 부분은 제우스의 난봉에 격분한 헤라가 제 남편의 애인들에게 가하는 끔찍스러운 보복과 박해로 채워져 있다. 그러고보면 영화 <웨이트 오브 워터>의 스토리는 인간의 이야기면서 신(들)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영화 속에서, 강샘이라는 주(主)코드는 동성애나 근친상간 같은 보조코드와 버무려지며 태고 이래 신화와 역사의 힘줄이 돼온 어떤 격렬한 마음의 풍경을 빚는다.

<웨이트 오브 워터>에서 진이 마렌에게 그러듯, 자신이 지금 발 딛고 있는 지점에 언젠가 발 디뎠던 사람에게 자신의 마음을 투사해보는 것은 짜릿한 놀이다. 내 마음이 그의 마음과 포개질 때, 내 몸도 그의 몸과 포개지며 잠들었던 감각이 활짝 깨어나기 시작한다. 10년 전 그라나다의 알함브라 궁전을 찾았을 때, 나는 알카사바 성벽에서 그라나다 시내쪽을 내려다보며 스스로를 이슬람의 마지막 군주 보압딜이라고 생각했다. 멀리 말발굽이 일으키는 흙먼지 속에서 기독교도들이 몰려오고 있었다. 저 야만인들은 이제 내 조상들이 700년 동안 가꿔온 찬란한 이슬람 문명을 무자비하게 파괴해버릴 것이다. 이 수려한 헤네랄리페 별궁과 정원도 더이상 내 것이 아니다. 나는 여기서 옥쇄해야 할 것인가, 아니면 바다를 건너 아프리카로 몸을 피해야 할 것인가? 내 눈이 젖어들고 있었다. 이촌동의 단골 술집에 들를 때마다, 나는 그 언저리의 새남터에서 목이 잘리기를 기다리고 있는 이름없는 천주교 신자의 몸 속으로 들어간다. 나는 기독교도이므로 죽음 이후의 세상을 믿는다. 아니, 나는 죽음 이후의 세상을 믿으므로 기독교도다. 그런데 왜 온몸이 이렇게 바들거리는가? 내 믿음이 고작 이 정도였던가? 나는 목이 붙어 있는 것에 안도하며 이번에는 망나니가 돼본다. 나는 칼을 휘두르며 덩실덩실 춤을 춘다. 저 나쁜 놈들의 목을 베어 국태민안(國泰民安)에 이바지하는 것은 신민된 자의 도리다. 그런데 내 칼이 저 놈의 목에 닿을 때 내 손의 느낌은 어떨까? 잘려나간 머리에 박힌 두눈을 나는 마주볼 수 있을까? 나는 왜 천 것으로 태어나 손에 피를 묻혀야 하나? 혹시 정말 나쁜 놈들은 저 관복을 입은 놈들 아닐까? 나는 진저리를 치며, 세차게 도리질하며 맥주를 입에 쏟는다.

그러나 내가 발 딛고 있는 지점에 발 디뎠던 자가 어디 있단 말인가? 까까머리 시절 과학교사가 친절하게 가르쳐주었듯, 지구가 움직이고 태양계가 움직이는 한 오늘 한겨레신문사의 위치는 어제 한겨레신문사의 위치가 아니다. 움직이는 기차 안에서 화장실에 다녀온 뒤 앉는 내 자리가 그전에 내가 앉았던 자리가 아니듯. 내가 가보았던 알함브라 궁전에 나는 결코 다시 가볼 수 없을 것이다. 이촌동의 술집은 내가 갈 때마다 다른 곳에 있을 것이다. 슬프다. 덧없는 삶이, 되돌릴 수 없는 공간이, 바스러질 듯한 시간이. 고종석/ 소설가 aromachi@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