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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사월의 외로워 말아요 눈물을 닦아요] 천만원 걸 김OO
김사월 2024-12-05

2008년에 개봉한 영화 <백만엔걸 스즈코> 다들 재미있게 보셨나요? 20대 초반의 주인공 스즈코는 가족과 함께 사는 게 슬슬 눈치가 보입니다. 독립을 꿈꾸며 자취를 하려는 과정에서 다툼이 생겨 그녀는 전과자가 되고 맙니다. “그토록 얌전하던 애가 전과자라니?” 같은 주변 사람들의 반응이 힘들었던 스즈코는 이 사실을 아무도 모르는 곳으로 떠나기로 결심합니다. 그곳에 도착해서는 아르바이트를 하며 생활을 하고요, 백만엔이 모이면 또 다른 곳으로 거취를 옮깁니다. 백만엔 정도라면 어디서든 새로운 시작을 할 수 있을 것 같아서 돈을 모으는 거라지만, 머물지 않고 떠돌고 싶어서 돈을 버는 것처럼도 보입니다. 시간이 흐르면 주변 사람들과 관계가 생기기 마련일 텐데 언젠가는 나 자신을 보여주고 그 반응에 직면해야 한다는 건 스즈코에게 두려운 부분이겠습니다.

일본의 착한 청춘영화 느낌이지만 젊은 여자가 유랑하며 겪게 되는 뭐라 말하기는 어려운 애매함 같은 것에 대한 표현도 피하지 않는 연출이 흥미롭습니다. 그리고 청순미의 대명사로 불리는 아오이 유우가 주연으로 출연하기에 솔직히 그녀의 아름다운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도 무척 재미가 있습니다. 가끔은 대놓고 아름답고 재미있는 것을 보고 싶은 거지요.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지켜보는 게 괴로워지고 그렇다고 모른 척 살아갈 수도 없어서 힘이 빠질 때, 좀 비겁하지만 저는 재미있는 이야기 속으로 회피 겸 도피를 하며 활력을 빌리기도 합니다. 인간이라는 알 수 없는 존재를 그나마 변화시킬 수 있는 건 아름다움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무얼 아름답게 느끼는지는 개인마다 달라서 각자에게 어떤 변화가 다가올지 알 수 없는 점을 상상하면 약간 아찔해지긴 하지만, 뭐 일단 저 같은 경우는 이 영화 속 풍경의 아름다움과 스즈코의 성장에 결국 “인생을 직면하자! 주체적인 삶을 살자!” 같은 활발한 기분을 느끼고 말았네요.

만약 제가 스즈코처럼 이곳을 떠나서 새로운 인생을 살아보고 싶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전과는 없습니다만 아무래도 이름과 얼굴이 조금 공개된 상태라 지금까지의 제 생활을 잘 정리하고 떠나는 게 여러모로 좋겠습니다. 유통사에 연락해서 제가 발표한 음원들을 비공개로 바꿉니다. 음악가 이름으로 만들어진 SNS 계정을 보이지 않게 처리하고 여러 가지 계약된 곳과도 정리해서 누군가 저에게 더 이상은 연락할 수 없도록 공개된 발자취를 잘 숨겨야겠네요. 여기서 예상치 못한 장점으로 활용할 수 있는 지점이 하나 있었는데요, 저에게는 가수 이름이 아닌 본명이 따로 있어서 인연이 없던 곳으로 가면 표면적으로는 정말 지금까지 음악가로 살아온 약 10년간의 세월과 상관없이 살아갈 수 있다는 겁니다!

그렇게 새로운 시작을 해볼까요? 스즈코가 일하던 당시 일본 노동자들의 임금 상황과 부동산 상태는 현재의 한국 상황과는 좀 다를 것 같습니다만 현지화 패치를 대충 걸어버린 느낌으로 가자면 원룸 보증금을 가지고 전국을 유랑하는 ‘천만원 걸 김OO’입니다. 2년의 계약기간이 끝나면 다른 지방으로 이동합니다. 원작의 싱그러움과는 달리 어쩐지 묘하게 기분 나쁜 느낌이 드는 건 제가 ‘걸’이 아니라서일까요, 천만원이라는 초라하고도 세속적인 숫자 때문일까요…. 아무튼 스즈코보다는 확실히 일자리를 구하는 데에 어려움을 겪을 것 같지만 이런 저라도 세상 어딘가 도울 수 있는 일은 있을 겁니다. 처음에는 시급이 높길래 멋모르고 예식장 서빙 아르바이트를 했다가 몸살이 나서 며칠 동안 누워 있기도 하고요, 요거트 전문점의 일이 너무 힘들어서 출근 첫날만 일하고 도망치는 지경으로 살아가던 중, 앉아서 일할 수 있는 사무 보조 아르바이트가 그나마 맞았나 봅니다. 비영리단체에서 9 to 6 출퇴근을 경험하며 ‘천만원 걸’은 서서히 새로운 삶에 적응해갑니다. 그러나 어딘지 허전한 기분이 드는 건 왜일까요? 집으로 돌아온 저녁에는 테이크아웃한 햄버거를 먹고요 그걸로는 부족했는지 라면까지 끓여 먹습니다. 어쩌면 주말에는 유리잔에 소주를 콸콸 따르고 구운 김을 씹으며 아이돌이 나오는 음악방송을 보며 누워 있을 테지요. 왜냐하면 음악을 하기 전의 제 생활이 그랬거든요….

그러다가 오랜만에 좋아하던 음악이라도 듣게 되는 날이면 순수하게 음악을 들을 수 있는 즐거움과 창작을 하던 시절에 대한 그리움을 함께 느끼며 심란한 기분이 들 것입니다. 이쯤 되면 저는 인터넷에 제 이름을 검색하고 있을 것 같습니다. 생각만큼, 아니 생각보다 너무 잘 사라져버린 흔적들을 보며 “그땐 그랬었지” 하고 추억에 잠길까요? 내심 그만둔 걸 아깝다 생각할까요?

로드 무비에서는 집을 떠나 다른 곳으로 향하면서 내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게 되더군요. 쉽게 떠날 수 없는 상황에 있는 우리 대부분은 떠난다는 상상만으로도 현재의 무거움을 잠시나마 잊을 수 있습니다. 스즈코가 대신 떠나준 덕분에 ‘천만원 걸 김OO’는 이렇게 안전하게 인디 가수 김사월로 돌아옵니다. 이런 극단적인 상상을 하지 않아도 우리는 매일 어디론가 미세하게 떠나고 있긴 한데요. 모험이나 귀향으로 나눌 수도 구별할 수도 없게 이상하게 섞여 있는 모습으로요.

집에서 영화를 보다 보면 가끔 재생 바를 확인하게 됩니다. 좀 집중력이 떨어진다 싶을 때 확인해보면 영화 초반의 15~20분 사이를 지나기도 하고요, “이제 곧 끝나겠는걸” 싶어서 남은 바의 길이를 확인해보고는 “아니 아직 많이 남았는데 어쩌려고?” 하며 궁금해하는 때도 있습니다. 어디쯤 왔는지 얼마나 더 가야 하는지 화면 위에 마우스를 올려 볼 수 없는 이곳에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걸 사실 저는 좀 좋아하고 있는 걸까요? 뭐, 딱히 좋아하는 것 같진 않지만 태어난 이상 일단 계속 살아가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