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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자살과 우울에 대한 깊은 이야기, <연소일기> 탁역겸 감독
조현나 2024-11-14

한 고등학교 쓰레기통에서 ‘나는 쓸모없는 사람’이라는 글귀로 시작하는 유서 형태의 편지가 발견된다. 상황을 덮으려는 학교측과 달리 정 선생(노진업)은 편지의 주인을 찾고자 한다. 학생들의 글씨를 일일이 대조해보던 정 선생은 유년 시절, 자신이 바라는 어른의 모습을 상상하며 열심히 일기를 쓰던 한 10살 소년을 상기한다. 2023 대만금마장영화제에서 신인감독상, 관객상을 거머쥔 데 이어 2024 홍콩금상장영화제, 2024 홍콩감독조합상에서 연이어 신인감독상을 수상한 젊은 창작자가 등장했다. 장편 데뷔작 <연소일기>로 잠재력을 인정받은 탁역겸 감독은 자살과 우울증이라는, 자국 홍콩이 마주한 사회문제를 소년 요우제(황재락)의 삶에 투영한다. 요우제의 부모는 또래보다 늦되는 그를 영재 동생 요우쥔(하백염)과 비교하며 매순간 몰아붙인다. 부모의 기대치에 도달하기 위해 노력하지만 요우제에게 돌아오는 건 그를 무시하는 주변인들의 가시 돋친 말뿐이다. 탁역겸 감독은 “육체적 상처는 시간이 지나면 치유될 수 있지만, 말로 인한 상처는 평생 마음에 남는다”며 타인의 말이 개인에게 미치는 영향력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 <연소일기>는 청소년뿐만 아니라 어른의 입장에서도 생각할 여지를 남기는 작품이다. 이 이야기를 시작하게 된 계기가 있다면.

학생 시절에는 선생님들이 늘 고고하고 진지해 보여서 다가가기 어려운 존재로 느껴졌다. 하지만 어른이 되고 나서 보니 선생님도 우리와 똑같이 가족이 있고 개인 생활을 하며, 때로는 담배를 피우거나 술을 마시기도 하는 사람이었다. 더불어 청소년 우울증과 자살 문제는 선생님과 학생이 함께 겪어나가는 도전이라고 생각해 지금과 같은 구성을 떠올리게 되었다.

- 극 초반, 빈센트라는 학생을 혼낼 때까지만 해도 정 선생은 타성에 젖어 보였다. 학생의 유서를 발견하기 전까지 정 선생은 어떤 유형의 선생님이었나.

감정이 없는 것처럼 보이는 사람. 때로는 학생들을 꽤 엄격하게 대하기도 하는데 정작 본인은 그렇게 느껴질 수 있다는 걸 잘 모른다.

- 학원폭력과 가정폭력을 어디까지 어떻게 묘사할 것인지 고민이 컸을 듯하다.

실제 상황은 영화에서 보여준 사례들보다 훨씬 극단적이다. 그래서 관객이 받아들일 수 있을 범위 안에서 사실과 허구 사이의 균형을 맞추려고 노력했다.

- 노진업, 황재락, 하백염 배우를 캐스팅한 이유는.

정 선생 역의 노진업 배우는 세심하고 부드러워 보이면서도 내면의 무언가가 비어 있는 듯한 신비로운 인상을 준다. 그가 마음이 무거워 보일 때마다 어깨를 토닥이며 위로해주고 싶은데, 그 점에서 맡은 역할에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요우제 역의 황재락 배우는 오디션 당시 연기가 압도적이었다. 아버지가 요우제를 때리려다 포기하는 장면을 연기했는데 다른 아이들은 대사를 읊자마자 울었지만, 황재락 배우는 눈물을 참아가며 공부를 계속할 기회를 달라고 아버지를 설득했다. 그리고 아버지가 정말 자신을 포기했다는 걸 깨닫고 나서야 비로소 눈물을 흘리고, 맡은 대사가 끝나고 나서야 무너져내렸다. 그 순간만큼은 정말로 요우제가 되어 있었다. 하백염 배우는 오디션장에 놓인 전자 키보드에 본능적으로 다가가 연주를 시작했다. 먼저 캐스팅된 황재락이 그를 보고 ‘와, 저 친구 대단하네요’라고 말한 기억이 난다. <연소일기>에는 모두를 압도하는 존재감을 가진 천재 동생이 필요하다고 여기던 차였기에 그가 곧바로 눈에 들어왔다.

- “우리 다음에는 꼭 형도 데리고 여행 가요”라는 요우쥔의 대사가 마음에 남았다. 형이 죽었다는 걸 알면서도 요우쥔은 부모에게 왜 그런 말을 했을까.

우울증 이론의 5단계 중 첫 단계는 ‘부정’인데 나는 이것이 들어맞는다고 생각한다. 몇년 전 친구가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내가 처음 보인 반응도 요우쥔과 마찬가지로 그의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부정하는 것이었다. 결과적으로 이런 배경들을 요우쥔의 반응에 적용했다.

- 요우제가 삶을 포기하지 않는 전개를 생각해본 적 있는지.

있다. 만약 요우제가 살아남아 성장했다면 부모에게 반항하고 심지어 맞서 싸우기 시작하는 청소년이 됐을지도 모른다.

- 정 선생의 부인 쉐얼이 그의 속마음을 파악하고 이해해주려는 모습이 후반부에 꽤 길게 묘사된다. 상대방에게 자신의 속내를 드러내고, 반대로 그것을 들어주려는 태도의 중요성을 공들여 강조했다는 인상이다.

모든 관계에서 상대방에게 진솔하게 마음을 여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여기는 편이다. 때로는 어렵지만, 누군가를 사랑하기 전에 먼저 스스로를 사랑하고 자신에게 솔직해지는 법을 배워야 하니 말이다.

- 후반작업 때 감정의 기준점이 되는 신이 있었다고.

비서 조이가 병원에서 요우쥔에게 요우제의 카세트테이프에 대해 이야기하는 장면이다. 이 장면을 기점으로 요우쥔은 20년간 소원했던 아버지와 자신 사이에 여전히 공통점이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나는 사랑하는 사람을 추억하는 작품의 감정에 몰입하기 위해 편집을 시작할 때마다 항상 이 장면을 먼저 봤다.

- 원제는 <연소일기>이고, 영어제목은 <Time Still Turns the Pages>이다. 원제와 영어제목의 의미를 다르게 간 이유가 있다면.

영어제목은 어벤지드 세븐폴드의 노래 <So Far Away> 가사에서 가져왔다. 이 노래는 밴드의 오리지널 드러머였던 제임스 오언 설리번에게 헌정된 곡인데 몇년 전 친구가 자살로 생을 마감했을 때 느꼈던 것과 비슷한 감정이 이 곡의 후렴에 잘 담겨 있었다. ‘사랑하는 사람들 없이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 시간은 이미 불타버린 책의 페이지를 계속 넘겨가고, 장소와 시간이 늘 내 머릿속에 맴돈다. 할 말이 너무 많은데, 넌 너무 멀리 있어.’ 동시에 이 가사는 내가 전하고 싶은 메시지이기도 하다. 우리는 과거를 바꿀 수 없지만, 시간은 계속해서 흘러간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이미 일어난 일에 대한 관점을 바꾸는 것이며 이러한 노력을 통해 우리는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

- 홍콩에서 작품의 반응이 무척 좋았는데 그 이유가 뭐라고 생각하나.

안타깝게도 홍콩의 자살 문제가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심각하기 때문인 것 같다.

- <연소일기>를 관람할 한국 관객들에게 전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영화의 주제가 무겁고 진지해 대중이 쉽게 외면할 수도 있다. 하지만 자살과 우울에 관해 함께 대화를 나누고 싶은 관객에게는 작품이 꼭 닿길 바란다. 나도 그 주제에 관해 궁금한 것이 정말 많다.

- 예정된 차기작이 있나. 앞으로 어떤 작품을 만들고 싶은지도 듣고 싶다.

현재 두 가지 프로젝트를 개발 중인데 하나는 로맨틱코미디이고 다른 하나는 초자연적인 심리 스릴러다. 항상 탐정 드라마 시리즈에 대한 열망이 있었기에 기회가 닿는다면 수사물을 연출해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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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제공 누리픽쳐스